20221225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아침. 온 세상이 은빛의 궁궐. 머언 지리산 하봉에 내린 눈은 수만 개 보석으로 치장한 크리스탈 왕관이고 가까운 산은 무거운 눈을 이고 나무들이 허리까지 휘었다. 거친 떡갈나무의 등걸에 걸친 흰 눈은 보드라운 토끼털 배자다어린 시절 엄마가 명절에 사다 입히신 배자가 얼마나 따뜻하고 고왔던가! 우주는 사방으로 적막하고 자연은 고요히 명상에 들었고 휴천재의 여자는 무념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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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3학년 때 가평 현리에 살았다. 아버지가 조종중학교 교장이셨고 교회는 교장 사택에서 꽤 멀었다. 성탄절이면 교회에 모여 자정까지 놀다가 어른들 사이에 끼어 새벽송을 돌았다. 교인들 집 앞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목청 높여 부르면 집주인은 박수를 치며 나와 추운데 수고한다고 과자나 사탕 그리고 금일봉을 주는 집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 가평은 정말 추웠다. 영하 20여도를 오르내리는 그 추위에 나나 다른 사람들의 입성은 형편 없었다. 내복에 엄마가 짜주신 빨간 털세타가 전부여서 새벽송을 돌고 교회로 돌아가면 모두 꽁꽁 언 동태가 되었다. 목사 사모님이 끓여 주신 떡국 한 그릇씩을 먹고 겨우 손발이 풀려 그날의 새벽송 수확품을 끌러 나누던 재미가 그 추위를 이겨내게 하는 힘이었다. 요새 애들이라면 절대 안 했을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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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려 해만에 휴천재에 15센티 이상의 눈이 내렸고 기온도 영하 10도 이상 내려가 제대로 산중 겨울을 맛보았다. 나쁘지 않다. 차도 안 다니고, 택배도 안 오고, 동네에 오가는 사람도 없다. 성탄이라 케이크 한 조각과 밀감을 가지고 드물댁을 찾아갔더니 길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 한참 노닥거리다 집을 나서는데 셋째딸이 무릎 토시 두 개를 보내왔다며 한 개는 나에게 성탄선물로 주겠단다. 이번 성탄절에 받은 가장 정다운 선물이라 고맙게 받고서 우리 집까지 따라온 그미에게는 버선 두 켤레를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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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댁의 미술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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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점심에 은빛나래단성탄절 모임을 가졌다. 보스코가 생환한 기념이기도 하니 이런 잔치 쯤이야 열 번도 하겠다. 피자와 샐러드, 커피와 쿠키와 케이크. 언제 만나도 반가운 팔순의 동갑내기들이 은빛으로 물든 고개를 넘으면서 서로 기대고 밀고 끌며 함께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 봉재언니는 뇌경색으로, 남해형부는 설암으로, 우리 보스코는 폐암으로 모두 2022년을 힘들게 보냈지만 이렇게 살아남아 '생존을 확인하는기쁨을 나누는 모임이랄까? 살아 있어 고맙고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서도 반가운 얼굴로 마주하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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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일은 우리 큰 손주 시아의 16번째 생일이다.그래서 세례명이 임마누엘이다. 과묵하고 의젓한 손주가 할머니가 보낸 생일 선물로 노스페이스 잠바를 샀다니 공룡이나 로봇을 살 나이는 지났구나 싶다. 2년 후 만18세가 되면 독립할 작정이라니, 나이 서른이 넘어도 독립 못하는 우리나라 캥거루들 참 부끄럽겠다. 작은손주 시우가 졸라서 '겨울'이라는 이름의 눈처럼 흰 강아지가 그 집 새 식구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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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절이자 일요일. 우리는 미루네 부부와 성심원에 가서 성탄 미사를 드렸다. 예수님이 오신 탄생일인데 성심원 성당에서는 박경수(케루비노)라는 젊은 장애인의 장례식이 함께 있었다. 성심원 갈 적에 가끔 보던 젊은이였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출생도 죽음도 똑같이 성스러운 탄생. 저 사람도 오늘 천국에서 건강한 몸과 혼으로 다시 태어나 세상에 아기로 오셨던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겠구나 싶어 안식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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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처럼 운구를 따라가는 주례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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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 살다가 떠나는 한센인들과 장애인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진 유신부님이 청년을 떠나보내시는 강론이 심금을 울렸다. 성당 입구에 걸린 커다란 사진, 유신부님과 한센인 할머니가 마주보고 미소짓는 사진이 스페인인 노사제의 프란치스칸다운 사랑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한센병으로, 중증장애로 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시는 하느님의 눈길이 저러하려니.... 그것으로 성이 안 차셔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처럼) 가련한 인생들이 살아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몸소 겪어 보시러 말씀께서 아버지의 품에서 '가출하셔서' 오늘 베틀레헴 마굿간에서부터 '인간 체험'을 개시하셨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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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네가 대접해 주는 점심을 먹고 남강 강변에 자리 잡은 카페에서 슈톨렌과 커피를 들며 넷이서 성탄을 축하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에 우리 노부부가 외로울까 챙겨주는 셋째딸이다. 남강에는 청둥오리가 수도 없이 날아와 얼음이 녹은 돌팍들 틈에서 물고기를 찾다가 여기저기서 날아오르기도 했다. 우리 인생도 저 오리들처럼 하나둘 날아올라 머나먼 곳으로 떠날 날이 멀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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