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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시



            인간보다 경이로운 것이 없다!

                                         - 소포클레스


        세상에 경이로운 것이 많기는 하지만

        인간보다 경이로운 것이 없다.

        그는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그리고 신들 가운데서

        가장 성스러우며 다함이 없고

        지칠 줄 모르는 대지(大地)를

        그는 말의 후손으로 갈아 엎으며 해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괴롭힌다네.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엮은 그물의 코 안으로 꾀어 들여

        사로잡아 간다네, 재치가 뛰어난 인간은.

        그는 산 속을 헤매는 야수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텁수룩한 갈기의 말을 길들여

        그 목에 멍에를 얹는가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산(山) 소를 길들인다네.


        또한 말[言]과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그는 독학으로 배웠다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 노숙하기가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하는 방법도.

        그가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아무 대비 없이 그가 미래사를 맞는 일은

        결코 없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는 도망치는

        수단만을 손에 넣지 못하였을 뿐.

        하나 그는 좌절시키는 질병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 냈다네.


        발명의 재능이 있어

        바라던 것 이상으로 영리한 그는

        때로는 악의 길을 가고

        때로는 선의 길을 간다네.

        그가 국법과, 신들게 맹세한 정의를 존중한다면,

        그의 도시는 융성할 것이나,

        무모함으로 인하여 불미스런 것과 함께하는 자는

        도시를 갖지 못하는 법.

        그런 자는 결코 나의 화롯가에 앉지 말 것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품지 말지어다!1)


닫는 시


서정윤 


사랑을 하면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의 의미를 지니리라.


          서   장  :   인  간  이  란    무  엇  인  가  ?



가. 인간에 대한 경탄


        인간에 관한 깊은 경탄을 일컬어 철학적 인간학(哲學的人間學)이라고 한다. "세상에 경이로운 것이  많으나 인간 이상으로 경이로운 것은 없다."(소포클레스)고 하지만, 21세기 한반도의 젊은 지성인인 나에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타인은 내게  무엇인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2)라는 명제와, "인간은 인간에게  신(神)이다, 그 도리를 다 한다면."3)이라는 두 명제 중 어느 것에 나는 공감하는가? 현대 감각으로 표현해서 내게 "타인은  지옥인가?"(사르트르), 그렇지 않으면 "타인은 구원인가?"(마르셀).

    내 젊음 앞에 다가오는 인생을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주변을 위하여 나는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한 알의 밀알로 살다 갈 것인가? 아니면, 나 외의 모든 타자를 밑거름으로 삼아 살아남고 출세할 것인가? 한반도의 이 현장에서 외세와 분단과 사회 불의라는 진창 속에 빠진 민족사의 수레바퀴를 맨손으로 돌리면서 치어죽고 흙탕물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이나 ‘하나뿐인 지구’에서 인류(人類)의 공존과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들거나, 하다 못해 그들의 대열에 박수를 보낼 것인가? 그들이 끄는 수레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목숨을 구가하는 무리에 들고서도 오히려 저 사람들에게 조소와 저주의 시선을 보낼 것인가?

   나의 전공과 직장생활, 가정과 사회에서의 생활은 나의 삶과 죽음, 민족사와 인류사의 어느 구석에 자리매김되어 있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우리가 인생에 던지는 ‘의미 물음’이며, 그 답변은 우리의 인간관 또는 철학적 인간학에 의해서 정해진다. 대학생활은 어쩌면 우리의 인간관이나 인생관을 정립하거나 수정할 특전적인 기회인지도 모른다.

1.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인류가 계발해 온 모든 학문, 인류의 사색을 망라한 모든 철학은 사실상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철학적 인간학이란 인간을 바라보는 ‘부드러운 시선’을 얻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익히는 학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파우스트』의 서막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내뱉는, 인간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본다.


          태양이니 천지니 하는 것은 저는 모릅니다.

          제 눈에 띄는 것은 오직 인간들이 고생을 하는 꼴뿐이죠.

          이 지상의 어린 신(神)들은 언제나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어,

          천지개벽하던 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기묘한 존재이죠.

          차라리 각자들한테 하늘의 불빛 따위는 주시지 않았던들,

          좀더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놈들은 이것을 이성(理性)이라 부르고 오직 그것을

          어떤 짐승보다도 더욱 짐승답게 사는 데만 이용하고 있읍죠.

          이런 말씀 여쭙기 거북합니다만 제게는 그 인간이란 것들이

          늘 푸르르 날고, 나는 체하다가는 펄쩍 뛰고

          곧 풀속에 틀어박혀, 낡아빠진 노래나 부르는

          다리가 긴 메뚜기 같단 말씀이에요.

          차라리 언제까지건 풀 속에나 누워 있었으면 좋으련만,

          거름더미만 보면 곧 코를 쑤셔박는군요.4)

                               


    그런가 하면, 인간의 존엄을 재발견한 르네상스 시대에 불과 32세로 요절한 철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 1463-1494)가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에서 천명하는 인간관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경탄을 담고 있다.


저는 아랍인들의 문전에서, 사라첸 압달라가 세상의 장관(壯觀) 중에서도 가 장 경탄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그 무엇도 인간보다 더 경탄할 만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글을 읽은 바 있습니다. 그 말은 아스클레피우스의 글에서 메르쿠리우스신이 발설하는 저 유명한 구절과도  맞아 떨어집니다. "오, 아스클레피우스여, 인간이란 참으로 위대한 기적이라오!"

제가 이 명언의 뜻을 새기면  새길수록, 인간 본성의 출중함을 두고 많은 석학들에 의해서  제기된 저 많은 논리들이 내게는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들의 중간자(中間者)여서 상위존재들과 친숙하고 하위존재자들의 왕자(王者)입니다. 인간은 감관들의 명민함으로, 이성의 탐구로, 오성의 빛으로 자연에 관한 해석자가 됩니다. 인간은 고정적 영세(永世)와 유동적 시간 사이의 중간영역이고, (페르샤인들이 하는 말이지만) 두 세계의 교접(交接) 아니 혼인(婚姻) 자체이며, 다윗이 증언하는 바이지만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입니다.5)

           


2. 철학적 인간학


   본디 "지혜(知慧)를 사랑함"(philo-sophia)이라고 알려진 철학(哲學)을 "인생의 의의, 세계의 본체 등 궁극의 근본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지혜는 진리(眞理)를 바탕으로 한다. 플라톤은 외쳤다. "모든 선(善) 가운데서도, 신들에게나 인간들에게나 진리가 첫째여라!" 진리를 사랑할 명분은 진리가 인간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상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진리를 유린하는 사례가 허다하였고, 무수한 학문과 종교와 정권과 이념이 ‘진리에 대한 추잡한 사랑’(움베르토 에코)으로 인해서 타인들에게 온갖 악을 자행함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진리를 내세워 종교들은 정통과 이단을 가르고, 한반도에서는 지난 세기에 이데올로기 이름으로 무수한 동포들이 살육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그대는 무엇을 아는가?" "아무도 악을 알고서 행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생각에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묻는다. "그대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사랑이 진리를 안다.”는 명제하에 그는 세상에는 이기문화(利己文化)와 위타문화(爲他文化)가 존재할 따름이라고 설파하였다. 마르크스는 묻는다. "그대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인간은 자기가 발딛고 서 있는 위치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인간과 사물을 본다. 지상의 위대한 선구자들은 이처럼 묻고 답을 찾으면서 철학적 인간학의 밭을 일구면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왔다. 우리는 그들이 갈아놓은 이랑에 각자의 삶을 씨뿌릴 것이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우리가 연구할 전공학문은 인간과 자연과 역사의 단면만을 본다. 다채로운 언어를 통해서 남들과 만나는 어학이든, 그들의 말로 그려내는 아름다움을 헤아리는 문학이든,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인을 대상으로 하든, 사람을 양육하는 교육인을 대상으로 하든, 우리가 전공하는 개별과학은 경험적이고 단편적이다. 특정한 영역에서, 특정한 관점으로 특정한 방법으로 그 학문을 연구한다. 전체로서의 인간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우리의 전공학문이 인간과 삶과 역사라는 전체의 지평선(地平線) 안에 놓여질 필요를 절감한다.

   헤겔의 말대로 "진리는 전체적이다!" 전체를 보는 시각을 위하여, 학문의 정립을 위하여, 내 학문의 바른 쓰임을 위하여 철학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철학적 인간학을 공부하는 명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은 우리 각자가 전공하는 그 어느 학문도 제기 않고 그 물음에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개별학문이 현대에  들어와 인간에 관해서 엄청난  소재를 제공해 주지만 그  어느 학문도 인간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노라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적 인간학은 개별과학들을 수용하여 거기서 인간에 관한 전체적 시각을 얻어내고자 시도한다. 

   둘째, 우리가 전공하는 개별학문은 인간 실존의 제한된 부분을 분리시켜서, 제한된 관점 아래서, 고유한 방법론을 써서 인간이나 그의 활동을 고찰하며, 그 방법과 시각에 들어오지 않는 영역과 관점은 일부러라도 배제한다. 경험적 개별학문은 어떤 일정한 대상 또는 영역을 지향하므로, 대상화, 객관화, 사물화시킬 수 없는 독특한 인간적 요소나 인간 전체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이해를 규정짓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해명해  주는 고유한 차원은 철학적 인간학이 제시해 주리라 기대하고, 철학적 인간학이 제시하는 인간의 전체적 초상을 미리 전제하고서 각자의 학문을 개진한다.

   셋째, 따라서 각자의 전공 분야가 인간을 어떤 측면에서 다루든 간에, 거기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전이해(前理解)를 깔고 있다. 그래야만 개별학문과 그 성과가 인간들의 삶에 이바지하고 인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생물학, 진화론, 고고학, 문화인류학, 경제학, 광고학 어느 것이든 인간에 대한 사전 지식, 인간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사전지식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되고 정리된다. 예를 들어 의학도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의학에서  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사전에 알고 있고 또  인간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간을 돕고 구제하는 수단과 방법을 발견하고 익히려고 노력한다. 철학적 전이해를 토대로 의학이 인간의 건강하고 온전한 존재양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의학도는 자기의 전공 학문과 의술행위에서 인간다운 의의를 길어내는 것이다.

   끝으로, 철학 분야에서도 철학적 인간학은 학문하는 기본시각과 전망을 제공한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일찌기 철학함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세계시민적 의미에서의 철학의 영역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제시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첫번째 물음은 형이상학이 답하고, 두번째 물음은 도덕이 답하고, 세번째 물음은 종교가  답하며, 네번째 물음은 인간학이 답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 모든  물음을 인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의  세 물음은 결국 마지막 물음에  관계하기 때문이다.6)



나. 인간학의 주요 패러다임


    인간에 관한 궁극적 서술들이 태고적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신화 또는 종교 경전에서 철학적인 사유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인간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 구성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학의 가장 중요한 언표들도 비슷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문화의 두 축으로 삼는 서구  인간학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대표적인 개념이 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가 전수받은 헤브라이즘의 인간관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homo, imago Dei) 라는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헬레니즘의  인간관으로 소피스트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s: BC 5세기)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anthropos metron panton)라는 명제에 나타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도교(道敎), 불교(佛敎), 유교(儒敎) 등 대종교들의 인간의 인간 탐구 노력이 우리 나라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결실을 보았다고 꼽을 만하다.


(1)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창세기』(創世記: BC 7세기 문서)라는 유대-그리스도교 경전은 우주와 인류의 기원을 상상해낸 종교적 시가(詩歌)인데 그 첫머리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이다!"라는 정의를 만들어 인류에게 전수시켰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7)


    현대인은 이 종교 설화에서 인간의 기원과 본성이 신에게서 유래한다는 종교사상과 더불어, 지상 사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 및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천부적 인간 존엄성을 본다. 인간이 우주 내에서 다른 존재자들처럼 우주를 구성하는 한낱 소인(素因)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자유에 의해 지구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주체임을 의식한다.

    우선 이 경전의 문맥에 따르면, 인류는 한 집단으로서 신의 모상이  된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인류 전체가 자연 지배와 역사 완성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계 정상에 놓여져 있으면서 자신의 전체, 즉 자기 육체까지를 포함하여, 신의 모상이 된다.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한 부분, 곧 얼굴, 직립, 육체의 형상, 정신성(자유 또는  지성 또는 영혼)만이 신의  모상이라는 견해가 빈번히 대두되었으나 온건한 상식에 의해서 늘  배척을 당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신의 모상이라는 관념은 사회 윤리(社會倫理)의 성격을 띤다. 중동 세계의 종교 관념대로 신의 초상(肖像)을 파괴하면 그 신을 모독하는 행동이었듯이, 타인을 신의 모상으로 존중하는 것은 그 원형인  신을 경배하는 행위가 된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하리라"(창세기 9,6).


(2) 인간은 `만물의 척도'


    "인간은 만물의 척도"(프로타고라스: BC 5세기)라는  헬레니즘의 인간관은 철학사에서는 마치 인식의 상대주의를 표방한 말처럼 오해되어 왔으나, 현대에 와서는 사회와 교육의 기본 척도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정설로 다시 확립되었다.


그대가 지식에 관해서 묘사한 바는 프로타고라스가 흔히 제시하던 바와 같이 과히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방식만 달리해서 말하였다. 그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하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의 척도요,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의 비존재의 척도이다.” 이 말은 개개 사물이 나에게 타나나는 그대로 내게는 존재하는  셈이고 그대에게 나타나는 그대로 그대에게는 존재하는 셈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대도 나도 사람인 한에서 말이다.8)


서구 인간관의 쌍벽을 이루는 이 정의에 대한 해설을 혹자는 사회교육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바로 잡았다.


인간 문화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설정하는 중심은 인본주의(人本主義)이며  과연 그는 인본주의의 토대를 놓는다. 그의 기술은 인간의 보편성을  토대로 보편적인 문화를 가르치는 데에 이상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프로타고라스가  설정한 인본주의는 생생한 변천을 겪게 된다. 프로타고라스의 인본주의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있고 기초적인 개념이 곧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제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응당  어떤 규범을 따라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므로  당대에는 인간의 `형상'(forma)을 준거로 삼고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형상을 만들어내자는 주창이었다. 역사상으로 인본주의를 내세우는  사조는 언제나 이 명제를 준거로  삼는다. 그런데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의 이  유명한 말을 "만물의 척도는 신이다!"라는 명제로 바꾸어 버렸다.  인간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에 실제로  부딪치는 한계가 있으므로, 인간적인 것을 보호해주는 더욱 근본적인 준거를 찾아내야 하는 까닭이다.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인본주의라면 그것은 인간의 이념을 준거로  삼았던 소피스트들의 인본주의를 들 수 있다.9)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간주하는 인본주의는 인격(人格)이라는 중세 사상을 거쳐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있다"라는 현대사상으로 전개된다.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신마저 인간 실존의 근거(根據)로서 설명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기에 "모든 사회 제도의 근원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 아니어서는 안된다"는 전제하에서, 사회제도의  유일무이한 존재명분인 공동선(共同善)이라는 것이 결국은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보다 완전하고 보다  용이하게 자기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생활상 여러가지 조건들의 총체"라고 정의된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개개인의 인권(人權)은 그 정치 단체의 생명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3) 인내천(人乃天)


   한편 동아시아 인간관에서는 인간과 하늘이 함께하는 경향이 더 주도적이었다. 하늘[天]은 원래 사람[人]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과 사회 질서의 궁극적 원리를 의미했었으나, 이것이 초월적인 무엇처럼 제시된 것은 아니며, 항상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거론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명령한 것을 일러 인간의 본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일러 참다운 길이라고 한다.”10)고 하였고, “하늘의 이치를 따르므로 어떤 재앙도 없다.”11)고 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은 하늘과 인간을 연속적으로, 총체론적으로 파악한다. 이때 하늘은 물질적 하늘이 아니라 인간의 사욕(私慾)과 대비되어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로 파악되었다.


나와 천지 만물은 그 이치의 근본이 같다(吾與天地萬物 其理本一之). 그러므로 그 너그러움을 이끌어내어 그로써 내 마음 속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나를 벗어나 남을 향해 나아가면, 곧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게 되니 사물과 나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 버린다. 사물과 나 사이에 어떤 삿된 마음도 끼어들지 못하니, 천지가 한 집안이 되고 온 나라가 한 사람이  된다. 그리 되면 다른 사람들이 겪는 모든 고통과 아픔이 내  것이 되어 너그럽고 진실된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12)


    우리 조상들은 도교적 분위기와 유교 성리학의 이론을 토대로 삼아서, 인간이 우러러 보는 하늘의 길이란 기실 천지 만물과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는 근본 이치라고 간주하고서, 사람이 그 근본 이치를 따르면 천도(天道)가 인간 내면에 자리잡게 되고 결국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조상들의 이 지혜는 사회적 차원에서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백성들의 고통과 희망을 함께 나누고 인간의 존엄함을 살려내려는 동학운동(東學運動)으로 발전하여 최시형(崔時亨)의 “사람이 바로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人是天 事人如天)는 가르침으로 번졌고, 지금 와서는 천도교에서 사람이 바로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정립되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요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느니라.

    마음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한울에 있고, 한울은 어느 곳에 있든지 마음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곧 한울이요 한울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마음이 없느니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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