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09년 9월 29일 화요일. 날씨 맑으나 삼각산 백운대는 뿌옇게 흐려 보임
서울집 골목길이 아스콘으로 포장되었다. 국민주택 부락에 2층집 세 채가 골목 하나를 끼고 나란히 30년간 살아왔는데 2001년 옆집 둘이 팔리고 집장사가 쳐들어와서 다세대를 짓기 시작했다. 터와 골목을 측량하면서 길의 절반이 자기네 땅이라면 재판을 걸어오고 골목길을 막으려 했고, 우리는 구청에 행정절차를 밟으면서 싸움을 벌였다. 측량선이 전국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터라서 결국 우리집이 재건축 할 때에 그쪽 땅을 내주고 아랫집으로 내려간 우리 땅도 아랫집이 재건축 할 때에 찾기로 구청이 중재하여 합의하고서 골목길을 살렸다.
그때 건축주가 오기를 부려 골목길을 흥부네 이불자락처럼 엉망으로 해 놓아서 어떻게든 손을 봐야겠다고 생각해 오다 이번에 구청이 마을길(약초원길)에 하수도관을 다시 깔고 길을 아스콘으로 포장하기에 구청에 협의했더니 골목길도 포장을 하였다. ("행정이란 그 주체가 주민이고 주민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공무원의 본분이지 자기들이 일방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이중삼중의 혈세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며 밀고 당겼다. 전시행정의 시대는 지났다는 이론도 나왔다.") 그대로 두고 보니 골목길 틈이 벌어진 시멘트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아랫집 축대는 이미 배가 나온지 오래였고, 옆의 다세대 주택으로도 물이 끊임없이 스며들어 그집 지하실이 항상 흥건했었다. 도봉구청의 골목길 포장은 재난방지 차원의 조처이기도 했다.
저녁에 보스코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갔다. 광주 서석초등학교 47회 졸업생들(6학년 7반)이라는데 50년 훨씬 넘는 세월의 간극을 갖고서 처음 만나서도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주 유쾌한 얼굴로 업업 되어서 11시가 넘어(보통 때는 늦어도 9시면 귀가하니까 하는 말이다.) 약간 얼큰한 얼굴로 돌아왔다. 칠십을 바라봐도 어린날의 추억은 늘 오늘 같은가 보다. 보스코는 동창들보다 항상 두 살이 많은 나백이로 학교를 다녔는데(그는 전쟁이 끝나고서야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 갔고 이듬해 4학년으로 올라갔단다.), 함께 졸업한 1957년도 초등학교 동창생이 993명이었다니 참 큰 학교였나보다.
보스코의 취기라야 맥주 한 잔의 주량으로 얻어지는 취기여서 그의 대자 이기자처럼 새벽 2시까지 2차, 3차를 계속할 체력은 결코 없었나 보다. 지리산 동네 이기자(프란치스코)와 스테파노씨는 정말 술을 즐기는 한량이다. 농사일, 집안일에 부지런한 한량인데도 술자리에서는 마나님들의 눈총이 어지간하다.
저녁에 나는 쉼터 식구였던 이순재를 만나러 그녀가 일하는 서울역 근방의 일터로 찾아갔었다.
"이순재종이조형장식연구회"라는 기다란 이름이 붙은 공간은 그녀의 생긴 모습 그대로 깔끔하고 잘 정리된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딸(순재의 딸은 그녀의 젊은 날 모습 처럼 아름다웠다. 나중에 딸을 데리러 온 사위는 그녀의 소원대로 정말 착해 보였다. )과 그녀 시누이도 와 있었다. 종이공예가인 그녀의 작업실에서는 한지로 무궁화 잎을 만드는데 정신들이 없었다. 다음 달 운현궁에서 무궁화꽃 종이공예전시회를 연단다. 둘이서만 나가서 저녁을 먹었다. 둘은 남편이 오면 먹는다고 해서...
돌아오는 길에 또다른 쉼터 식구였던 민석이 엄마가 운영하는 호프집 "헹가레"에 들렀다. 손님이 없어 힘없이 앉아 있었다.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우리 집도 손님이 많을 때가 있어요."라면서 나를 되레 위로한다. 씩씩하게 꺾이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기특하다. 민석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쉼터에 왔는데 민석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라니 10년 가까운 긴 세월의 인고였다. 내년이면 벌써 그 아이가 대학생이다. 긴 세월 혼자서 잘도 견뎌냈다. 아들이 떠나고 나면 함께 여생을 보낼 "착한 남자"(쉼터 식구들의 바램이 언제나 '착한 남자'다.)가 생겼으면 한단다. 그토록 고생하고서도 아직 남자에 대한 정과 바램이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조짐이었고 내게도 안도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