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5년 5월 20일 화요일. 맑음(섭씨 32도)
나이가 들며 좋은 것 하나, 늘 마음이 느긋하고 평화롭다. 침실 서쪽 창 커튼을 열면 언덕위에 비스듬이 기대서서 우리집을 내려다보는 노송의 무심무념한 모습에 미소를 보낸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오래 살아갈 우주로 엮인 인연이다.
휴천재 마당은 작약의 계절이다
구장이 자기 밭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노송 하나를 고사시켰다. 그 후 본인도 허리를 다쳐 일년 가까이 고생을 하고 있다. 오래된 나무는 영물이어서 해코지하면 그 사람도 다친다고 한다. 윗동네 임씨가 커다란 노송을 베고 나무가 넘어가면서 고관절을 다쳐 1년 이상 고생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주는 생명들의 한 개 고리이니 서로 도우며 자연스레 살라는 깨우침이다.
어제 아침 9시쯤 동호댁이 전화를 했다. “119차가 내려가던데 혹여 대사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닌가요?” 곁에 있떤 보스코가 내 핸폰을 향해 “아주머니, 저 괜찮아요. 아주 잘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아무튼 노인만 사는 동네다보니 119차의 등장 하나만으로도 마을 전체가 덜컥 가슴을 쓸어내린다. 최근 몇 해 여기저기가 탈 난 보스코가 동네 아짐들 걱정꺼린가 보다. 하기야 아짐들 또래 남정이라곤 보스코와 허영감 둘만 남았다. 논농사 계절이 돌아왔지만 논이라도 갈아줄 장정은 윗동네 잉구씨와 강수영이장 뿐이다.
잉구씨가 새 트랙터를 샀다.다 빚으로 샀단다.
후에 마을회관에 들려 알아보니, 화산댁이 집안에서 냄비를 태워 집에 연기가 가득차자, 면에서 설치해준 '지니'가 감지하여 스스로 119를 불렀단다. 문을 열면 지니가 '문이 열렸습니다' 일깨워 주고, 제동댁 아줌마처럼 쿵 쓰러지며 ‘나 아프다.’ 하면 스스로 119에 호출하여 119를 불러 온다. 그뿐 아니라 '지니야, 이미자 동백아가씨 틀어줘!‘ 하면 노래도 들려준다.
독거노인에게 나눠주는 기계란다. 우리는 두 부부가 사니 그런 혜택은 못 받는다. 마을회관에 모인 아짐들에게 “염려해 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나누고, 동호댁에게 도너스 한 봉지를 갖다 드렸다.
올해는 유난히 배가 많이 달렸다. 보스코가 혼자 배를 솎다 보니 지루했나보다. 아래집 식구들에게 도와달라니 텃밭에 내려와 열심히 한다. 지난번엔 그 집 가장이 배밭 소독약을 뿌리고 이틀을 아팠다기에 망설였는데 도와달라길 잘했다.
보스코에게 “우리 차라리 배 한 상자 사먹고 배농사 그만두자.” 했더니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짓겠다.”는 대답. 나도 아래 텃밭 농사라도 있으니 걔들 커가는 재미로 살기에 이해가 가는 얘기다. 머리를 쓰는 사람은 몸도 함께 써야 삶이 건강하다.
성모성월도 얼추 하순. 윤마누엘라의 꽃다발이 휴천재 성모상을 꾸민다
오늘 화요일 하루 갑자기 여름이 닥쳤다. 한낮은 32도라니, 빗방울 오락가락하던 날들이 끝나고, 미려한 도령이 대문 앞에 와 있는 듯해서 겨울 코트들을 다 빨아 널었다. 오리털이니 속까지 다 마르려면 햇볕도 바람도 충분해야 한다.
어제 오늘 휴천재 옷갈이를 했다. 여름 옷들을 상자에서, 3층 다락에서 꺼내 걸고 겨울 옷은 상자에 넣거나 다락으로 올려다 걸었다. 안 입는 옷이 너무 많아 커다란 비닐봉지 둘이나 가득 채웠다. 서울집에 가져가 빌라 사는 ’김씨아줌마‘에게 주면 된다. 그집 아저씨가 오랫동안 폐지를 주어왔는데,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아줌마가 그 일을 이어받아 폐지와 고물을 줍는다. 남편 병원비와 생활비에 많이 지쳐있어 늘 안타깝다. 헌 옷이라도 수거해가면 분류하여 입을 만한 것은 가난한 나라로 보내고 나머지는 천으로 갈아서 재생섬류로 쓰는 데가 있단다.
위아래층 두 아낙의 텃밭 농사
너무 더워 한낮엔 못 나가고 4시반이 넘어 배밭에 내려갔다. 데레사 부부는 3시에 나와 일하다가 너무 더워 집으로 돌아갔단다. 오후 3시면 하루 중 제일 더운 시간이다. 우리가 내려가니 따라 내려와 네 명이서 하니 올해 배솎기가 일단 끝났다. 다음달 배봉지를 싸며 한 번 더 솎아주면 된다.
나는 텃밭 축대에 덩쿨 식물들을 모두 낫으로 쳐냈다. 노린재 잡이 틀도 귀퉁이에 세우고. 오후내 내 곁에서 밭농사 일을 했으니 데레사씨도 자칫하면 몸살 하겠다. 보스코는 축대에 거북꼬리 쳐내는 일과 배 솎기가 고됐는지 저녁 9시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이웃사람들은 ’일하기 싫으면 서울로 도망가라‘ 하지만 서울 가면 또 서울집 마당의 잡초가 기다린다. 나도 힘들지만 잡초들도 베어내고 낫질을 당하면서 ’왜 하필 우리야?‘ 하고 아우성이다. 잡초라는 이름으로만 뿌리채 뽑히는 억울한 비명이다.
최세현씨의 섬진강과 지리산의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