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4년 3월 14일 목요일. 맑음
수요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니 1센티쯤 되는 흰머리가 오른쪽 귀로부터 이마, 이마에서 왼쪽 귀까지 흰띠를 두른 듯 자라 올라있다. 염색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는 2주쯤 검정색으로 으젓하다 3주에 들면서 측은한 노인의 머리칼이 뿌리에서 올라오다 4주가 지나면 ‘인생을 포기한’ 백발이 되곤한다.
나는 3주면 거울에 비친 내 머리칼을 보기 민망해서 염색을 한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내가 염색을 않고 본디 머리칼로 찾아뵈면 ‘얘, 보기 싫다, 어여 염색해!’ 하고 나무라셨다. 보스코 역시 자기는 염색을 그만둔지 여려 해인데(염색약 알레르기로 머리 전체에 투구를 쓴 것처럼 부풀어오르곤 했다), 나더러는 흰머리가 눈에 거슬린다며 염색을 하란다. 아무튼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염색을 했다. “여보, 나 언제까지 염색해야 해?” 보스코에게 물으니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때까지”란다.
어제는 사랑하는 아우님 윤희씨 부부를 보러 함양에 나갔다. 윤희씨 남편은 살레시오고등학교 30회(보스코의 28년 후배다)로 입학했는데 한 학기 다니다, ‘구례에서 광주까지’ 너무 통학이 힘들어 구례로 전학하고 말았단다. 그렇지만, 훗날 세례명을 ‘살레시오’로 정하고 아내에게는 ‘살레시아’라는 세례명을 주어 입교했으니 ‘살레시안’임에 틀림없다.
살레시오-살레시아가 대접하는 점심을 먹고 후식을 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살레시오씨는 농협지점장을 명퇴하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도전해보는 멋진 사나이다. 요즘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산림지킴이로 활동 중인데, 광활한 국립공원을 사슴처럼 누비면서 자연과 함께 지내니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단다.
점심 후 나는 ‘명인당한의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고 보스코는 군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예전에 자주 다니던 한의원인데, 한동안 내가 아픈 곳이 없었나 보다. 오랜만에 만난 의사선생님이 무척이나 반긴다. 처녀의사로 개업한 의사에게는 그 동안 귀엽고 예쁜 따님 둘이 태어나 있었다! 어제 휴천재 마당에 맨먼저 피어난 작은 수선화들마냥 아름다웠다.
수년전 무릎이 아플 때 나를 걱정해 주신 분들 덕분에 다 나았듯이, 이번에도 멀쩡히 나으리라 믿는다. 감자도 심어야 하고, 나를 기다리는 봄일이 너무 많다. 허리 아픈 곳에 부황을 뜨고 사혈을 하고 침을 맞고 나니 훨씬 가볍다.
읍내에서 돌아오다 마을회관에 들렀더니 마치 병원 대기실 같이 안 아픈 사람이 하나도 없이 몸을 움직일 적마다 ‘아구구’ 신음들이다. 다만 아픈 부위와 정도가 다를 뿐. ‘징하게들’ 일을 하면서도 명을 부지하는 게 기적이다.
오늘은 보스코의 무릎을 수술하고 열흘째 되어 실밥을 뽑았다. 탈없이 화농없이 상처가 아물어 다행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
저녁에는 다시 읍으로 나가서 ‘느터나무독서회’ 회합을 가졌다. 읽고 이야기를 나눈 책은 소설 『파친코』. 일제 강점기, 그러니까 1900년대 초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나라를 잃은 민족의 비참한 가족사가 서술되어 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과 함께 여주인공 하숙집 선자의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인 아내와 애가 셋이나 되는 한수와의 사이에 애가 생기며 그때 당시에 첩을 두는 걸 단호히 거부한 선자, 그미에게 청혼한 맑은 영혼의 목사 이삭, 일본으로 건너간 그들을 거두어주는 형 요셉과 형수 경희는 우리나라 특유의 형제애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죽는 목사 이삭의 숭고한 영혼, 그 가족을 끝까지 거두며 병든 요셉을 돌보는 착한 아내 경희는 모든 남자가 흠모할 만하다.
선자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수와의 사이에서 난 큰아들 노아는 자신의 태어난 비밀을 알고는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놓아버리고 살다가 엄마가 찾아와 자기 삶이 탄로날 때 자살한다.
반면, 머리도 별로 였고 사고 뭉치였던 모자수(모세)는 파친코에 취직을 한다. 공직이나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던 그 사회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일거리인 빠친코 장에서 모자수는 입지를 굳혀간다. 모자수에게는 일찍 죽은 아내 유미와의 사이에 솔로몬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미국 유학 후 영국계 은행에 취직해서 잘 나가는 듯했으나 간교한 일본인 상사에게 당하고는 해고 당한다. 그 후 솔로몬도 빠친코에 들어선다. 노아, 모자수, 솔로몬까지 그들이 쌓아 올릴 수 있는 성공의 탑은 결국 빠친코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제적 궁핍과 일본 사회의 이중적 차별에서 서글프게도 한국인에게 허락된 것은 지하세계의 파친코 밖에 없었다. 오늘 함께한 독서회원들의 열띤 토른, 용서하기 힘든 간악한 일본인,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착잡하다
보스코의 말대로 ‘왜놈들이 한반도에 쉬쓸어 놓고 간’ 벌레들이 하루살이 떼처럼 깨어올라 기승을 부리는 현시국에서 이 정권은 '미-일-한' 군사동맹까지 맺으려고 안달이니... 민족 감정이 털끝 만큼이라도 있는 조선인이라면 영화 『파묘』를 보거나 소설 『파친코』라도 읽고서 총선에 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