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3년 11월 23일 목요일. 맑음
수욜 아침 '우리집 집사'가 아침상을 얌전히 쟁반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출근했다. 이 무슨 호사람? 어제는 빵을 한 쟁반 가져와 대사님이 돌아오시면 함께 드시라 했다. 우리 집에 살았던 집사들이 모두 고맙고 사랑스러웠지만 지금 집사는 이름 그대로 '안젤라' 천사다. 뜰에 가꾸는 화초에도 관심과 사랑이 각별하고, 집안에 있는 모든 것에도 호기심과 관심이 내 맘에 든다.
스쳐가는 인연들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서로 주고받는 눈길만으로도 인간 사이는 아름답게 피어난다. 최근의 집사들뿐 아니고, 45년전(1977) 우리가 처음 이 집에 사들어 올 때부터 한 집에 살았던 모든 다정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주 기도를 한다. 잘 돼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불행을 맞고 시련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 세상을 떠난 사람들 모두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몫을 끼쳐준 사람들이니 하늘이여, 보살펴주소서를 빈다.
수요일에는 보훈병원에 지하철을 타고 왔다. 운전을 안 하니 책을 볼 수도 있었고 한강변에 키다리처럼 서 있는 아파트군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한강 위에는 왜 새들이 하나도 안보일까, 그 물에 크던 고기가 아직 살고 있다면 새들도 먹이 찾아 머무를 텐데?
12시에 보훈병원 지하철역에서 큰딸 이엘리를 만났다. ‘아부이’ 병문안을 왔는데, 엘리의 작은딸 혜지도 함께 와 반가웠다. 우리더러 무슨 착한 일을 더하라고 이리 좋은 인연을 주셨을까 감사할 뿐이다. 보스코는 4일째 금식 중이라 우리만 밖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병실엔 보호자는 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
빵기도 먼 곳에서 아빠가 염려스러워 매일 전화를 해온다. 시우는 할아버지께 기쁜 소식 삼아 자기네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몄노라고 사진으로 자랑하고, 말썽장이 강아지 '겨울이'가 트리를 망쳤다고도 일러바친다. 우리가 늙어가며 행복한 것은 주변에 이렇게 많은 지인들과 생명들로 가꿔진 사랑의 숲에 둘러 쌓여 살기 때문이다.
엊저녁에 병실을 둘러본 주치의가 내일 대장 내시경을 마저 하고서 최종 진단을 내리자고 격려하고 갔다. 보스코는 나더러 집에 가서 편히 쉬라 지만 내장을 비우려고 수 리터의 물과 장약을 먹고 밤새 화장실을 오갈 처지가 딱하여 병실에 남았다.
내 염려 대로, 그는 먹은 약과 물을 토하고 한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오가며 설사로 기진해간다. 어린아이같이 겁먹고 당황한 그를 다독이면서 밤을 새웠다. 부부는 한 몸이라지만 내가 옆에 있어선지 먼 동이 트면서 그가 새벽잠에 빠졌다.
나도 잠들려고 보호자용 간이침대를 펴고 눕는다. 길이가 짧아 벗은 발 둘이 커튼 밖으로, 간이침대 밖으로 삐죽 나가 있다. 병실 환자 침대 옆마다 간이침대가 놓이고 간이침대 끝마다 삐죽 내민, 여인들의 조막만한 발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저 먼 날 찾아간 인도 바라나시. 마니까르니까 가트(화장터)에서 화장할 장작을 제대로 못 산 가난한 이들의 타다 유골에 남은 발들을 떠올리는 까닭이다. 장작 값이 별로 없는 가난한 이들은 시체를 미쳐 다 못 태운 채 강물에 띄워 보낸다,
새벽의 간지스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29925
곁에 코골며 잠든 저 남자들이 걸어온 생애를(보훈병원이어서 환자들은 7,80대 나이의 제대군인들이다. 여환자는 드물다), 때로는 이끌고 때로는 끌리며 두루두루 옮아다니던 저 작은 발들, 머지않아 여신 갠지스강이 다스리는 세계로 사라질 발들이 오늘도 고단히 남편들을 밤 도와 지키고 있다. “잠 못 드는 자에게 밤은 길고”(법구경) 각종 검사와 진단을 거듭하면서도 병세를 아직 확진 받지 못한 가족에게는 이 어둠도 가난한 인생만큼 아득하여 깊은 한숨으로들 뒤척인다.
병원측은 오늘 오후 대장 내시경 받을 때는 보호자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오후 3시에 보스코와 대장내시경을 하러 실려갔고 그 뒤를 휘적휘적 따라가는 보호자는 이런 병고 앞에 자기가 무력하기 짝이 없음을 절감한다.
4일간의 검사 결과를 들었다. 주치의는 대장 게실염에서 시작한 출혈이 그토록 심했다고 우선 알려준다. 더구나 장기복용한 아스피린과 와파린으로 지혈이 안됐다는 최종진단을 내릴 게다.
저녁부터 미음이 나오고, 내일 퇴원 여부를 정하겠다는 말이 나와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 주말까지는 서울에 남아 후유증이 나타나는지 보자고 한다. 한 시름 놓고 병실에 보스코를 남긴 채 우이동으로 돌아가면서 어제 오늘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