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8일 일요일. 흐림


[크기변환]20231008_174105.jpg


10월 6일. 3주만에 돌아온 휴천재의 금요일 새벽. 책상 앞에 앉아있던 보스코가 한기가 든다며 잔등엔 파카 무릎엔 담요를 덮고 나만 쳐다본다. ‘나더러 어쩌라구?’ 휴천재 두 보일러실 중 난방과 온수가 어느 쪽인지도 모르는 팔자 편한 남자. 집안이 추워지면 난방 보일러를 켜야 하고 겨울이 닥치기 전 해마다 보충수 물탱크를 손봐야 하는데 그 일은 언제나 내 몫이다. 


내가 집 뒤 언덕으로 의자를 들고 올라가 발돋움을 하고서 수통의 물이끼를 닦아내고 청소한 다음 물을 새로 채우고서 보일러를 트니 집안에 온기가 돈다. 보스코도 식당채 앞의 센서등 고장 난 것 두 개를 서울서 사온 외등으로 갈아끼웠다. 


[크기변환]20231006_074330.jpg


[크기변환]20231007_172238.jpg


텃밭의 배추와 무는 제 철을 만나 신바람 나게 자라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날마다 우리집을 둘러보았을 드물댁이 나를 보더니 무척이나 반색이다. “어여, 아침 먹고 내려와 무 솎자구. 솎아다 김치 담자구.” “교수님이 내일 손님 오신다고 준비하라니 오늘은 못 해요.” 하니까 참 속편한 농부구먼.’하는 표정으로 날 본다


이탈리아식을 차려내려고 양상추를 구하러 마천에 가는 길에 드물댁을 싣고 오가는 길에 그간 마을 소식을 들었다. 한동댁이 이석(耳石)이 흔들려 넘어졌다 마을에서 설치해준 '마을 방송 라디오'의 어떤 버튼을 누르고 "아리아, 나 죽겠다" 소리치고 정신을 잃었는데, 119가 와서 함양응급실에 실어갔단다. 안 돼서 부산까지 가서 치료받고 살아 왔단다. 이렇게 'AI 아리아'가 자식보다 더 가까이서 효도하는 세상이 왔다.


[크기변환]20231006_173241.jpg


"내일 오는 손님 대접에 뭘 장만할까?" 혼잣말을 했더니, 드물댁이 어디 가서 고구마 줄거리를 따왔다. "껍질 내가 까 줄 테니 반은 김치 담그고 반은 볶아요." "원기댁 고추 밭에 가서 고추 따다 줄께 고추 부름하라요." "요샌 가지가 한창이니까 가지 나물하고 호박닢 따서 국 꿇이라요." 단번에 내가 손님밥상 차릴 메뉴(나는 이탈리아식을  준비하는 중인데)를 그미가 쫘악 정해준다. 아무튼 드물댁이 벗겨준 고구마 줄기로 김치는 맛나게 담갔다.


토요일 107. 5.18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깊숙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보스코는 5.18 현장에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김준태 시인을 무척이나 존중해왔다. 보스코가 집필한 서강대 철학적 인간학 교재 인간이라는 심연에 그 시를 전문 인용했고, 박기호 신부의 책 못다 부른 님의 노래에 추천사를 쓰면서도 보스코는 광주의 역사적 아픔을 표현한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이 시를 꼽았다. 더구나 '광주: 국립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초청받은 보스코의 강연(2020.3.26) "빛고을 광주'의 위상. 21세기 아시아 문화를 위하여"는 아예 김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를 종교신학적으로 해설하는 형식을 취할 정도였다.


보스코의 강연문: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479459

[크기변환]20231007_130611.jpg


[크기변환]20231007_150611.jpg


바로 그 시인이 보스코를 만나보러 지리산 휴천재에 찾아왔다. 그의 시 세계를 좋아하고, 광주 사랑이 남다르고, 특히 찬성이 서방님의 친구이기도 하기에 보스코는 그를 무척 반겼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에서)


점심을 들면서 세 시간 가까이 환담을 나눈 김시인이 산청에 있는 남명선생의 '덕천서원'을 방문한다면서 떠나고, 보스코와 나는 점심 설거지를 했다. 시인(75세)도 "아내의 설거지를 도와주느라 주부습진이 걸렸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고 그의 시집들에는 여성들에 대한 깊은 경의가 서려 있어 내게도 그의 시가 더욱 진솔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가을이 한창인데도 비는 간간이 내리고 나락도 예년에 비해 소출이 40%는 줄겠다고 예상될 만큼 벼가 여물지를 않는다. "2월에 윤달이 들면 빨간색(과일)이 안 된다"는 할매들의 말이 맞는지 가을과 초겨울 산골을 지천으로 바알갛게 꽃피우는 홍시감 꽃나무는 올핸 보기 드물 것 같다. 우리 텃밭의 감나무들도, 구장네 감나무들도 모조리 붉은 열매를 털어버렸다. 


[크기변환]20231008_143723.jpg


그래도 유영감네 뒤안의 산감과 앞마당 대봉시는 약간 열려있어 보스코랑 간짓대를 들고 내려가 소쿠리에 하나를 채워왔다. 깍지병이 워낙 심해 물과 솔로 흰 부스럼을 씻어내고 예냉고에 갖다 넣었다. 거기서 익으라고.


큰아들 빵기는 그 동안 에티오피아 방문을 마치고서 내일 또 다른 나라 또 다른 난민촌으로 떠난단다전세계의 분쟁지역 이야기,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티나 전쟁 이야기를 듣노라면 서구 강대국의 엄청난 불의와 경제 수탈에도, 약소민들의 고난과 학살에도 '침묵하는 하느님'께 등을 돌려야만 하는 지성인들의 아픈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다.


[크기변환]1696754528039.jpg


이런 사태에 그리스도신자들의 사회적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로마에서는 엊그제 4일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의 숙원사업인 '주교시노드'열려 가톨릭교회의 명운을 좌우하는 토론에 들어갔다. 벌써 보수파 추기경들이 교황의 개혁에 딴지 거는 공개편지로 교황을 공격하였다. 

 

같은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영성을 가르친 찬미받으소서(2015)의 후속 문헌으로하느님을 찬양하여라를 공표하였다.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국제 사회의 정치적 노력을 촉구하는 문서로 신자유주의 경제를 지지하는 자들에게서 엄청난 반발이 예상된다.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078

오늘은 연중 제27주일가톨릭 달력으로도 한 해가 끝나가고 있지만, 인류세(人類世)에 깊은 지질학적 흔적을 남긴 '대홍수' 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온 인류가 선각자의 경고를 비웃으며 흥청망청했다는 성서 기록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크기변환]20231008_17533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