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3년 10월 3일 화요일. 흐림
10월 2일 월요일. 뚝섬 ‘서울의 숲’에서 한신 후배들과 만났다. 나는 정릉에서 한목사와 만나 가기로 했다. 전철 ‘우이선’으로 정릉까지 가서 한 목사와 만나고 나면 ‘서울숲 공원’까지 가는 길은 한목사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내리라면 내리고 바꿔 타라고 하면 그대로 하고. 이렇듯 내 인생도 든든한 안내자가 있어 그대로 따라하면 걱정이 없겠다. 다만 그 안내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삶의 모든 순간을 동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남들은 묻는다. 아무튼 우리 부부와 두 아들이 오래오래 전부터 우리 둘을 두고 하늘에 빌어 온 소원이 ‘일타쌍피’(우리 부부가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나는 행운)다.
뚝섬은 본래 골프장과 경마장이 있던 곳으로 2005년에 시민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 모두가 즐기고 쉬는 곳이 됐다. 들어가는 입구에 ‘경마장’이라는 과거의 상징물인 달리는 말과 기수 청동조각상이 있다 가까운 곳에는 유럽 자라풀, 귀여운 잎 위로 노랑꽃이 가득 피어 있다. 가을로 접어든 계절이지만 푸른 잎은 아직 여름에 끝자락이다. 일곱 여자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거닐며 지난 두어 달 있었던 얘기들을 나눈다.
같은 대학 캠퍼스를 다니던 그때 그 모습이 여전하다. 다만 흐른 시간으로 중년살이 좀 붙거나 좀 둔해지거나 지병을 앓고 있어도 창조주가 ‘여인들의 전유물’로 주신 말솜씨와 수다는 여전하다. 더구나 말로 먹고사는 사람(목사)들을 길러내는 곳이니 오죽하겠나? 한신대학에서의 낙천적이던 성격도 변함이 없다. 그 흐른 시간에도 돈 자랑, 집 자랑, 자식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부담 없이 만난다. 대부분이 여고 동창들과 모임을 갖지만 우린 가치관, 더구나 ‘시국관이 같은 대학 동문들’의 모임은 참 마음 편하다. 유유상종이어서 어쩌다 시국관이 다르면 아예 연락이 끊긴다.
내가 한신동문들과 만나는 하루 보스코는 추석 본가방문(本家訪問: 수도자의 휴가)온 작은아들 빵고신부가 아빠를 모시고 파주에 가서 점심을 대접하고, 그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가 민족화해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세운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갔다가, 두어 주일 전 이장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묘에 성묘를 하고서 돌아왔다. 조상을 추모하고 묘지나 성묘에 마음 쓰는 일은 역시 혈통을 찾는 사내들의 주요 관심사다.
10월 3일 개천절. 내가 보스코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지 50년 되는 날이어서 작은아들과 딸들이 금혼식을 마련해주었다. 추석휴가차 집에 와 있던 빵고신부가 우리를 싣고 관구관으로 가서 가까운 식당에서 축하 식사를 하고, 관구관 ‘살레시오 박물관’에 마련된 경당에서 ‘감사미사’를 드렸다. 친구 한국염 목사, 우리 큰딸 이엘리와 막내딸 엄엘리, 우리 40년 ‘주치의’ 옥련씨, 그리고 서울집 새 집사 안젤라의 모친이자 내 패친 요세피나씨가 함께 해주었다.
50년의 시간(빵고신부가 만들어준 영상) :
https://youtu.be/c32Rqi--hSc?si=W1BD3JoqdtEaZ-0v
젊은 남녀들도 아마 대부분이 ‘지금까지 도달한 상대방의 모습’ 즉 상대방의 과거에 나를 걸고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집도 절도 없는 한 남자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 한 남자가 망하면 나는 ‘폭망’인 셈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죽을뚱살뚱 모든 것을 쏟아온 삶이었다.
내 도박은 정말 재수에 달린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과연 대박이 터진 반세기였다. 30여년 후 이모는 나더러 "너 보는 눈 하나는 있었구나."라고 재평가하셨고 엄마는 딸 결혼식 한 주간 전에 딸을 훔쳐 달아나 버린 사내('XXX에서 나온 대추씨'라고 부르시던)한테. 돌아가시기 얼마 전 "성서방, 사랑해!"라는 고백을 하셨다!
내 머리에서만 나온 요행은 아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과거를 돌아보면 끊임없이 우리 둘을 이끄신 크신 손길이 있었다. 나쁜 일이 닥쳤나 싶으면 그것을 통해 더 좋은 곳으로 이끄신 손길, 가진 것을 잃고 아연하면 더 큰 것을 손에 쥐어 주신 섭리, 인생의 바닥인가 싶으면 그 바닥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당신 날개에 태워 독수리처럼 날아오르시던 보살핌으로 지난 50년 굽이마다 실타래 풀리듯 인생이 풀려나갔다. 그때마다 섭리는 소중한 인연과 은인들을 통해 우리 부부를 동반케 하셨음을 절감하면서 오늘까지 함께 걸어준 모든 길벗들께 감사드린다
미사 강론에서 아들 신부는 “두 분의 사랑이 하느님 나라에서까지 영원하기를” 축원해 주었다. 주변에 널리 알려진 사랑의 모험으로 태어난 은혜를 염두에 둔듯,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았으니 주변의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눈뜨기를 기원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는다는 작은아들의 말은 우리 둘에게 점지해주신 두 아들 두 손주를 두고도 하느님께 감사드릴 만했다. 보스코가 자기 묘비에 적어달라는 시편 구절(116,7) 그대로, "고요로 돌아가라 내 영혼아, 주님께서 너에게 잘해 주셨으니!"
중학교 1학년에 홀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던 보스코는 늘 모성애가 그리워 자기 인생을 보살피신 하느님의 손길에서 성모님의 치맛자락을 느껴온 듯하다. 미사를 끝마치면서 주례 사제의 선창으로 참석자들이 우리가 지어온 기도문을 함께 염송해주었다. 우리가 두 아들과 더불어 아주 오래전부터 바쳐 오던 기도문, 두 아들의 첫 영성체, 큰아들의 결혼과 작은아들의 사제서품, 그리고 두 손주의 세례 때에 바쳐오던 ‘봉헌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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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혼식까지 함께하신 여정. 말 그대로 다사다난하셨을텐데 크게 축하드립니다.
평소 바치는 기도처렁 모든것이 이뤄지시고 두 분 항상 강건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