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대감님 돌아가셨다!”


[모지웅 신부님 추모의 글] (2018.11.28)


모대감님이 돌아가셨다!” 광주살레시오학교 동문들에게 뜬 부고 제목이었다. 그리고 6, 70대가 된 늙은이들이 관구관을 찾아와 스승께 절하고 갔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산하가 폐허로 참담하던 한국땅에 오셔서 10여년을 광주 학교의 교감으로,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신 신부님은 복도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울리는 그 쩌렁쩌렁한 음성, 교실 복도를 돌면서 수업 중에 딴전부리는 학생들에게 창밖에서 쏘시던 눈총, 아예 수업을 빼먹고 태봉산’(지금은 자취도 없다)으로 땡땡이친 문제아들을 잡아들이시던 달음질(모대감이 언제 교문 밖으로 출동하시는지 망보기를 따로 세워두곤 했다)로 제자들에게 모대감으로 각인되어 있었으리라.


며칠 전부터 신부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던 참에 부음을 듣고 지리산에서 올라와 영등포 관구관으로 문상을 가니 빈소가 막 차려지던 참이었다. 60여 년 전, 천애고아가 되어 혼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나를 성모님께 데려다 주시며 그분의 손을 붙잡게 만드신 분이 거기 누워계셨다.


공교롭게 방명록 1번으로 내 이름이 적히고, 모신부님을 경모하는 오실비아씨와 내 아내와 내가 첫 번 연도를 바치고, 작은아들 빵고신부가 황신부님이랑 첫 연미사를 올리는 자리가 이어지다보니 마지막까지도 이 제자를 자별하게 거둬주시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간직한 모신부님과의 추억은 1957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날. 저녁식사 후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벗들을 바라보며 풀죽어 있던 나에게 모신부님이 다가오시더니 내 어깨를 감싸고 소성당으로 데려가셨다. 성당 왼편 '그리스당의 도움이신 마리아' 성상 앞에 세우고 한 마디 하셨다. “오늘부터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모든 걸 이 분께 부탁드려라.” 그날부터 나이 일흔 일곱인 오늘날까지 과연 난 평생 성모님 치마폭에서 살아왔고 내가 성모님께 떼써서 안 들어주신 부탁이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살레시오 학교와 시설을 거친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일 하나는 그 집의 축제분위기이리라. 광주에 신설된 사레지오에서는 수시로 환등상영, 연극, 교장 마신부님이 상무대 미군부대에서 빌려오시는 최신 영화로 학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모신부님은 자주 기숙생 몇을 모아 단막극을 제작 감독하셔서 기숙사 축제와 전교생의 행사에 내놓아 즐거움 속에 주님을 섬겨라!’는 모토를 체감시키셨다.


나배기에다 학급에서도 키가 제일 작은 나였지만 이상하게 주연배우로 뽑히곤 했는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국어선생님을 시켜 급조하거나 영어선생님을 시켜 급히 번역한 대사를 며칠 안에 외울 줄 안다는! 노경에도 신부님이 아이들을 만날 적마다 알레그리아!’를 외치시고 셈쁘레 알레그리아!’로 화답하게 만드시던 일이나, 몇 해 전 구신부님 장례식에서 난데없이 알렐루야!’를 외치시던 기행도 그분의 이런 성품 그대로였다.


광주교구의 많은 사제들은 기숙사 사감모신부님을 못 잊을 것이다. 그분의 발명특허에 해당할 조행증(操行證)’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달마다 기숙생 각자에게 새로 나눠주는 조그만 신분증에 규칙위반 항목들이 적혀 있었고, 위반하다 걸리면 그 종이에 구멍이 뚫려 전과가 기록되었다. 성깔을 못 누르는 아이라면 분도기로 구멍을 뽕뽕뽕뽕 뚫어 모신부님마저 헤아리지 못하게 만들어 분풀이를 하기도 했고...


이렇게 엄한 기숙사에 어느 해 초딩이 하나 들어왔다. 눈치코치 없고 얼마나 나대고 얼마나 떼를 쓰는지 소신학교자습실의 엄숙한 침묵과 엄격한 규율은 온데간데였다. 그럼에도 그 초딩의 행실에 영웅적인 인내를 보이며 끝까지 보살피신 주신 분이 모대감님이었다. 걔를 기숙사에서 쫓아내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고아여서 쫓아내도 갈 곳이 없다는 사실! 중학교 기숙사에서 서방초등학교 2년을 더 다니고, 사레지오 중고등학교를 기숙사에서 자고 먹고 공부한 다음(다 공짜로!) 가톨릭교회 안에서 책 번역으로 생업을 지내온 내 둘째아우 성찬성의 이야기다.


중학교 시절 모신부님에게 배운 라틴어 수업은 내 일생을 가름하였다. 2로 올라가던 학기초, 기숙사 소신학생들에게 라틴어 수업이 열리던 날이었다. “신학생 아니어도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신부님 말씀에 그냥 따라나섰다. 그 수업은 모두에게 공포의 시간이었다. 수업이 시작하면 학생들을 교실 벽에 줄지어 세우고 전날 배운 라틴어 수십 개 단어들과 그 활용(amo, amas, amavi, amatum, amare)을 연거푸 묻고 대답이 막히면 무조건 줄 끝으로 내모셨다. 줄 끝의 3분의 1에서 짤리면 그날 라틴어 숙제는 두 배로 늘어나곤 했다.


훗날 내 나이 40이 다 되어 로마 교황립 살레시안대학교로 라틴어문학을 공부하러 가서 라틴어로 수업을 듣고 라틴어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중2 시절 모신부님 라틴어교실의 공포분위기 덕분이었다!


신부님 수업의 공포분위기는 서울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강대학교에 출강하시던 스페인어와 라틴어 수업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전어의 필요성을 느끼던 어느 동료 교수님이 그분의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었는데 작문시간이면 교수님마저 예외 없이 교탁에 불러내어 학생들 앞에서 작문을 시키더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악명을 떨치신 덕분에 서강대학교에서는 85세까지 모신부님께 수업을 배당하였다. 대단한 예외였다.


서강대에 출강하시면서는 나의 수업일자와 교체하여 강의를 편성하셔서 내 연구실을 쓰셨고, 내가 공무로 파견나간 5년간에는 그 방을 통째로 쓰시면서 흐뭇해하셨다. 전쟁 후 부모 없이 기숙사에 들어와 당신 손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던 아이가 교수로 대사로 출세하던 모습에 살레시오 교육의 보람을 느끼시더라는 주위 사람들 전언.


몇 해 전부터는 대림동을 찾아가도 사람을 알아보시는 시선이 좀 흔들렸다. 처음엔 내 아내를 몰라보시고, 금년 초엔 내 이름이 튀어나오지 않는지 안타까워하셨다. 내가 ~’를 발음하면 보스코!’ 하시면서 얼싸안아주셨다. 당신의 청춘 20여년 이후 사제로 선교사로 교육자로 보내오신 현세에 눈을 감고 영원을 향하여 눈 떠가시는 여정이었으리라.


한국을, 당신 제자들을, 그리고 은인들과 협력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시지만, 고령으로 쇄약해진 구순의 기력으로는 더 이상 돌보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던 신부님은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그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그 질긴 고집으로 무슨 소원이 있으면 성삼위 하느님께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도 기어이 받아내셔서 지상에 두고 온 사람들을 보살피시리라.


그분의 집요한 교육열은 공부 좀 해라, 공부 좀 해!” 하시면서 당신 시신마저 의학도들에게 넘겨주셨으므로 관구관 모퉁이로 돌아가던 응급차와 제의 차림 그대로 달음질쳐 그 차를 뒤따라가던 젊은 회원의 뒷모습으로 다시 한 번 내 기억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