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의 길목에서
반공 그리스도인들
[경향잡지 1989.6월호]
세상이 쫙 둘로 갈라져 보입니다. 보수와 혁신, 좌익과 우익 그리고 ‘혁신=좌익=좌경폭력혁명세력’이라는 도식으로 이 땅의 목청 큰 사람들이 일제히 떠들어 대는 판입니다. 어떤 신도들은 멸공을 부르짖고 ‘붉은 용’의 지배를 받는다는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비는 교회 단체들도 있고 심지에 강론대에서 반공을 외치는 성직자도 있습니다.
서울 강남 같은 곳에서는 많은 개신교 형제들이 ‘문 목사’이름이 싫어 교회를 떠나 버렸다고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포승에 줄레줄레 엮어져 들어가면서도 민주, 광주학살 진상 규명, 5공 청산, 노동자 생존권 등을 굴하지 않고 외쳐 대는 성직자와 신도들이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반대 받는 표적
그래도 그리스도의 제자 되는 분들은 이럴 경우에 '분별하는' 노력을 하리라 봅니다. 우리가 안보와 반공을 부르짖을 때에 사실 우리가 어느 영(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지 살피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혈관과 입과 펜 끝과 총칼을 움직이는 것이 하느님의 성령인지, 맘몬과 권력의 영인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개인과 집단을 두고 “저 자를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고함지를 때에, 결국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대사제들과 유다 지도층은 하느님의 아들이 저 수상쩍은 나사렛 목수로 오시라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로 우리 앞에 오시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누가 하겠습니까?
쇠고랑을 차고 쇠 철창에 들어가 있는 저 문익환 목사, 전민련 간부들, 시위 주동자들, 노조 간부들, 화염병 하나의 실수로 참극을 빚은 동의대 학생들, 그리고 그 많은 관제 빨갱이들에게서 예수님의 얼굴이 언뜻 보이지 않습니까?
그 자들이 설령 무죄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마태 27, 25)라는 소리가 입 밖에 나오려 하거든, 부디 6․25 동란을 생각합시다. 제주도 "4․3사건", 전라도 "여순사건", 경상도의 "대구 폭동" 등으로 애매하고 간단하게 우리가 부르고 넘어가는 저 엄청난 죽음들의 피 값이 그 전쟁의 참화로 우리 머리 위로 쏟아졌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금력과 군대와 핵무기 말고 하느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유신론 ⇔ 무신론, 그리고 공산주의 ⇔ 자본주의
우리의 반공은 아마도 1937년 교황 비오 11세가 “볼셰비키 무신론적 공산주의는 사회질서를 전복하고 그리스도교 문명의 토대 자체를 침식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신성한 구세주, 3항)라는 선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비록 무신론을 절대적으로 배격하지만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로 건설하는 데에 함께 노력해야 함을 진심으로 선언하는 바이다. 이 일은 물론 성실하고 현명한 대화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사목헌장, 21항)라고 태도를 누그러뜨렸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요한 23세의 말을 거듭 인용하여, 마르크시즘 철학과 “이 철학이론에 근거를 두고 아직도 거기에서 활력을 받고 있는 운동(공산주의 운동)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노동헌장 80주년, 30항).
요한 바오로 2세도 자본주의든 집단주의든 인간 존엄성이 보장되고 촉진되는 한에서는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며 “교회의 사회 교리는 자유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단주의 양편에 다 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사회적 관심 21항)고 하였습니다. ‘사회적 관심 20~26항’은 우리에게 많은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유신론의 적은 무신론이지 공산주의만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가 맞붙어 싸워야 하고,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독재주의(전제주의)입니다. 도대체 어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본주의자들에게 고용되어서 공산주의와 대신 싸워 주는 용병이 되었습니까?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목숨 걸고 싸울 대상은 무신론, 온갖 형태의 무신론, 38선 건너편의 유물론적 무신론 운동 못지않게 무섭고 당장 우리 겨레에게 해악을 끼치는 황금만능주의, 약육강식의 정치, 자기의 이익을 위협받고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면 얼마든지 동포들을 때리고 고문하고 죽이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성서에서 사실상 예수님이 두 이념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립시키는 것은 단 한번입니다. “어느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루가 16, 13)
(경향잡지 1989.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