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흐림
오늘 오전에는 흐리고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고 예보한다. 새벽에 텃밭에 내려가서 야콘과 땅콩을 밭이랑에 옮겨 심었다. 지난 번 모종을 사와서 바로 심으려다 뿌리가 너무 부실해서 포트에 넣어 뿌리를 내리라고 심어둔 것이다. 불과 두 주일만에 이 식물들은 대견하게도 뿌리를 힘껏 뻗으면서 자그만 화분 바닥까지 더듬고 있었다. “아, 발 뻗느라, 고생했다. 이젠 좀 쉬어야겠다.” 하는 순간 “어어, 이거 뭐야? 쉬려고 했더니 더 뛰어야겠네. 그래도 넓은 곳에 오니 살 것 같다.”라면서 모종들이 도란도란 땅 속에다 자리를 잡을 게다.
도마도는 어제 이기자가 만들어다 준 대나무 지줏대를 박고서 높은 가지를 그곳에 묶어 주었다. 지주의 키가 크니까 "누가누가 더 큰가" 열심히 자라서 튼실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 것 같다. 진이네가 오래 전에 심었는데 시들시들 죽거가던 몇 폭의 도마도도 내일 비에 혹시 살아날까 싶어 사형을 유보했다.
밭고랑 풀도 빗속에 쑥쑥 자라 올라올 게 틀림 없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호미로 캐냈다. 쑥갓과 아욱은 웃자란 가지를 꺾어 주어 옆에 잔가지가 자라게 하고 부추는 바닥 까지 바싹 잘라냈다.
내일 새벽에 도착한다는 사촌여동생 전희경과 그니의 친구들을 위해 아욱국을 끓이고 비름나물 순도 땄다. 밭아 나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보스코가 어제 저녁에도 효소단식을 해서 입이 댓 자나 나와 있는데 아침까지 늦는다면 머리 꼭지가 뜨뜻해질까 봐 얼른 뛰어들어와 밥상을 차렸다.
보스코가 찍어온 기도회 기념사진 (⇒홈피의 <문정리 사진첩> 참조)
보스코가 지리산 종교연대에서 주최하는 “한국전쟁 60주년 지리산 생명평화기도회”에 가서 강연을 하게 되어 있다. “한국전쟁 60주년과 현대적 의미”라는 거창한 제목이었다. 구례에 있는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평화공원”이라는 곳에서 한단다. 11시 반에 이른 점심을 차려주니 함양의 엄용식 목사님이 그를 대동하러 문정리까지 와서 내가 구례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행사 후에는 실상사 주지 해강스님과 함께 돌아왔다. 스님이 문정리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단다. 모이는 사람들이 기독교 목사와 천주교 신부, 불교 스님과 원불교 교무들이어서 강연을 보스코에게 떠밀었을 게다. 성직자들에게 강연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6.25 전쟁 전후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손에 100만명의 국민이 학살당했다.
함평 불갑산 학살현장에서 나온 어린아기의 고무신 (오늘치 한겨레신문에서 퍼옴)
아래층 진이네는 중국산 편백소나무로 벽을 붙였다. 향기가 집 전체에 진동한다. 보스코는 방향제나 이런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인상씨와 함께 일해서인지 단 하루에 공사가 다 끝나간다.
편백나무로 향기롭게 마루를 돌리는 진이네 공사현장
오후 2시에는 휴천면사무소에 “부끄부끄” 춤을 추러 갔다. 다음 주에 있을 함양군 면대항 춤경연대회에 출전하는 연습을 시키느라 선생님 여간 애를 먹지 않는다. 오른쪽부터 시작한다는데 오른쪽 왼쪽을 모르고, 꼭 두어 박자 늦게 시작하며, 남들은 왼쪽 하늘로 손가락질 하는데 오른쪽 하늘을 손가락질 하는 할머니들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어느 할머니는 하도 못하니까 여기다 세워보았다 저기다 세워보았다 하는데 나아지지 않는다. 그니도 눈치를 챘는지 “하도 몬항께 가운데로 꼭 숨겨뿔라꼬예?” 라고 항의해서 모두 웃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비가 부슬부슬이다. 내일 희경이네 삼겹살구이에 싸 먹을 상추를 뜯지 않아서 문상마을 “이엄마네” 비닐하우스로 달려 올라갔다. 노인 근로 갔던 할머니들이 비를 옴팍 맞으면서 문상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정까지 올라가는 노인들은 족히 30분은 더 걸릴 것 같아서 내 차로 태워다 드렸다.
그 중 한 할머니는 내가 봄에 자기네 땅 민들레를 캔다고 지천을 했던 노인이어서 내 눈치를 흘끔거린다. 그러니 시골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안 좋은 얘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 우물물 안 먹겠다고 침을 뱉았다가 그물 다시 먹는 꼴이 될 때가 많다.
자정이 되니까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목말랐던 초목들이 저 어둠 속에서나마 환한 얼굴일 게고 “홀딱벗고” 우는 꾀꼬리는 도정에서 짝을 못 찾았는지 문하마을까지 내려와 밤새 울어대고 있다.
조록조록 조록조록 비가 내리네
나가 놀까 말까 하늘만 보네
쪼록쪼록 쪼록쪼록 비가 막 오네
창수네집 갈래도 갈 수가 없네
주룩주룩 주룩주룩 비가 더 오네
찾아오는 친구가 하나도 없네
쭈룩쭈룩 쭈룩쭈룩 비가 오는데
누나 옆에 앉아서 공부나 하자
“비오는 날”이라는 임석재 시인의 동요다. 에라, 나도 누워 잠이나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