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태리 성글라라 관상 수녀원에 있는 마르티나 마리아 수녀님의 친구예요.
지난번에 성 글라라 수녀원을 어떻게 가야하는지 정보를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어 사진도 구경하고 감사해서
댓글 남겼었어요.
제가 성 글라라 관상 수녀원에 방문하기 전에 마르티나 수녀님과 통화를 하고 싶은데,
한국시각으로 언제쯤 전화하면 가장 좋을까요? 그곳 전화번호는 가지고 있고, 지금 시각(한국시각으로 저녁 9, 10시)에 하니까 계속 음성메세지가 나오네요.. 그래서 처음엔 영어로 말하고 바로 한국말로 메세지를 남겼는데.. 받으실까요?
그곳 사정을 제일 잘 아실꺼 같아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유딧올림
안녕하세요? 성교수님내외분님!!
저 왜관 안수사입니다. 여름에 산청(단계)에서 쉬고 올라갈 때에 뵙고 인사도 못드리고
올라와 항상 마음이 편하질 않습니다. 깊은 양해를 해 주시고 산청본당 조신부님께도
고맙다는 인사도 여태껏 못했습니다. 느거럽게 용서해 주시길.....
드릴 말씀은 임 세바스챤 신부님이 독일 뮨스트슈바르작 수도원 병실에서
현지 시각으로 토요일(10월12일)저녁 끝기도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우리 수도원에서는 일정을 정해 임 신부님의 추도미사를 따로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출판에 관여하신분둘이 드리는 추모미사이겠지요....
세바스챤신부님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성교수님 생각이 제일 먼져
떠 올라 간단이 굿낀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왜관 안수사 드립니다.
1979년 2월 14일. 내가 태어난 곳은 간 고등어, 찜닭, 하회마을, 도산서원으로 유명한 바로 경상북도 안동이다. 그 곳에서 결혼생활 5년째, 여전히 단칸방 삶을 면치 못하며 살고 있는 부부가 나의 부모다. 봄이 오기 전이라 아직은 쌀쌀했던 그 날, 나를 맞이하기 위한 엄마의 산통이 시작된다. 아침에 아빠는 오랜만에 일을 해보겠다고 막노동판으로 막 나가려던 참이다. 다급한 엄마는 남편을 붙잡으며 말한다. “아기가 나올 것만 같으니 출근하지 마소.” 그동안 외할머니가 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일주일간을 머물렀건만, 내가 나오지 않고 늦장을 부렸더니 잠시 집으로 돌아간 찰나다. 그러니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편이 곁을 지키자 잠시 후, 서서히 느끼던 산통은 급해지고 엄마는 방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얼마 후, 다행히 힘들게 낳았던 첫째와 달리 마지막 힘을 쓰자 나는 수월하게 나왔다. 그리고 원래 외할머니가 해야 했을 일, 그 빈자리를 채워 나를 대신 받아내고 탯줄을 잘라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빠였다. 그 아빠가 나를 보자마자 첫 환영인사도 한다. “그 놈 참, 불알이 꺼~멋타!” 엄마는 해산 후 누운 채 사내아이라는 그 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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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때처럼 집 앞으로 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아빠가 엄마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크게 포착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평소처럼 흥분도 화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게 그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젠 그만 해야지…'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에 따라 하나씩 행동으로 옮겼다. 우선 들고 있던 성경책을 방문 유리를 향해 던졌다. 문 틀에 맞아 유리가 깨지진 않았으나, 큰 굉음 소리를 냈다. 그리곤 난 방 안으로 쿵쿵쿵 달려 들어가 순식간에 엄마에게서 아빠를 밀쳐냈다. 그리고 방 다른 쪽 구석으로 몰아가 아빠를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때 만약 내가 신앙이 없었더라면 아빠는 내게 무지막지하게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그렇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아빠의 허벅지를 걷어 손바닥으로 아주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순간 아빠는 당황 한 채 겁을 냈고 그저 아프다고 고함을 질렀다. 난 계속해서 때리면서 소리 쳤다. “아빠! 아빠도 아픈걸 아세요? 아빠는 남자잖아요. 아빠는 남잔데도 그렇게 아프세요? 보세요, 저기 저 엄마는 여자예요. 힘없는 여자가 얼마나 더 아프겠어요! 내가 정말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는데 내 눈 앞에서 다시 한 번만 엄마에게 손대는 날에는 그 땐 정말로 내가 아빠를 가만 두지 않을꺼에요. 알겠어요!” 온 힘과 마음을 다해 포효를 했다. 그날 아버지는 집을 뛰쳐나가 어딘가를 방황하시다가 새벽녘에나 조용히 들어오셨고 다행히 그날 이후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버지의 폭력은 없었다. 그 때 난 아빠를 힘으로는 극복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황폐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상담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내적치유 작가들의 치유에 관련된 신앙서적 3-4권을 구해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자주 마음이 우울하고 무기력해졌는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책을 펴 줄을 긋고 당시의 내 생각들을 여백에 적어가며 스스로를 비춰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종의 독서 치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치유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교회에서 뿐 아니라 학교생활에서 리더쉽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당시 마음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학교 전교 학생회 임원도 하고 미션스쿨의 이점을 살려 신앙 수련회 때 전교생 앞에서 찬양과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경험들이 다행히 상처받아 무기력해진 모습으로만 눌려있지 않고 그나마 두렵게라도 외부세계로 힘겹게 도전할 수 있는 좋은 동력이 됐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열매, 바로 56차 영성수련을 통해 내 마음속 아빠를 다시 만나 기대치 못한 ‘화해'를 한 것이다. 그동안 아빠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하며 용서하는 과정을 거치고는 있었지만, 결코 화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수련을 통해 리더님의 도움을 받아 돌아가신 아빠를 다시 만났고 따스한 가슴으로 품으며 그렇게 미워해서 미안했다고 그리고 너무나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하며 화해를 한 것이다. 난 수련 기간 내내 아빠를 생각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프로그램 내내 울고 혼자 산책 하며 울고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눈물뿐이었다. 아빠가 너무 불쌍해서였다. 수련 이후에 난 마치 가족의 장례식을 치룬 듯 거의 탈진했다.
그나마 난 좋은 세상 만나 이렇게라도 교육도 받고 치유도 받으며 살지만 아버지는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힘들게만 사셨나! 난 가끔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너진다. 몸은 상할 대로 상한 대다 신부전증으로 혈액 투석을 받기 위해 나와 함께 한 번 병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처럼 무척이나 긴장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젊을 때 그 혈기왕성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내 눈엔 불안기 가득 해 큰 눈동자로 두리번거리는 비쩍 골아 버린 7살짜리 아이가 앉아 있었다. 이렇듯 세월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한 부분도 있다. 다만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아 그런 아빠를 더 사랑해 드리고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 망가진 몸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상한 마음만큼은 치유 받도록 이런 영성수련이라도 보내 드리지 못한 것이 요즘 들어 그렇게 한이 되고 서러울 수 없다. 이럴 때마다 내가 왜 목사가 됐고 왜 지금 상담 공부를 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이 땅의 아픈 상처의 대물림을 끊고 싶어서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선 이 남한 땅과 저 북녘 땅에서 말이다. 언젠가 난 어린 시절 아빠의 사랑을 찾아내어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어린 내가 볶음밥을 좋아한다고 자주 간장에다 양파를 넣고 맛있게 나를 위해 볶음 요리를 해 주시던 아빠의 모습. 또 미술 준비물인 물통이 없어 고민할 때 어디선가 PT병을 구해다가 그것을 잘라 줄까지 예쁘게 꼬아 달아 주시던 모습. 그리고 겨울철 방에서 형과 나와 함께 도란도란 둘러 앉아 재밌는 옛날 이야기를 해주시며 생고구마를 깍아 맛있게 먹게 해주신 모습.' 그때 들었던 옛날 이야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이렇게 돌이켜 보면 우리 아빠는 참 안됐고 불쌍하고 그만큼 마음이 여리고 좋은 분이셨음을 난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 지구별에 처음 왔을 때 날 받아주고 내 탯줄 까지 잘라 주셨던. 그 아빠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고 또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요즘 한 참 옹아리를 하며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아들도 있다. 나는 요즘 아들을 보면서 신비를 느낀다. 아버지는 비록 상처에 가려 맘껏 사랑을 표현 하질 못 하셨겠지만 내가 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히 샘솟듯, 아빠도 나를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했을 거라는 부모의 마음이 조금은 더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빠 낳아줘서 고마워요. 저는 아빠가 참 좋은 분인 걸 이제 안답니다. 어려운 삶의 자리 털어버리고 주님 곁에 가셨으니 편히 안식하고 계셔요. 저도 가면 인사 드릴게요. 나의 좋은 아빠! 당신이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평화를 빕니다!!!
안녕하세요? 우연히 이 브로그를 알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지리산의 지킴이로 살이가시는 성 교수님 부부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수녀원 입회전에 지리산은 수없이 오르고 또 종주를 하면서 지리산의 웅장함과 신비함에 매료되어 산에 중독(?) 되어 오랫동안 산을 올랐지요. 하느님을 알기전에 산을 오르다가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게 된 산도 지리산 반야봉, 노고단, 장터목이었답니다. 어느해 여름, 종주를 하면서 세석평원에서 야영할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들의 그 환희로움을 지금 떠올려 봅니다. 사계절 수 많은 산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것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지리산! 하면 그냥 푸른 산향기가 느껴지고 언제라도 돌아가서 그 넓은 자락에 안기고 싶은 산중에 산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유산은 아름다운 금수강산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안에 영육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며 은혜로운 성모승천대축일 맞으시길 바랍니다.
가끔 인사 올리겠습니다.
로사 수녀 올림
로사 수녀님,
산을 사랑하시니 그 아름다운 산하를 창조하신 분 가까이 평생을 바치시는 삶이
참 보람있으시리라 봅니다.
별을 두고 보스코가 최근 마산주보에 쓴 글에
"인류가 사는 지구를 만드실 겸해서 1000억 개의 은하계를 만들어 보신 하느님! “저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고 노래 부를 젊은이 한 쌍을 위해서 하늘에 10²²개의 별(
셀 수 있으면 세어보시라
을 하늘에 뿌리신 손길(그는 이것을 하느님의 '헤프디 헤픈 사랑' 혹은 '에로스 경제학'이라고 부릅니다)을 얘기한 기억이 납니다.
제 블로그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산자락에 사는 평범한 주부의 평범한 이야기들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신 산이 그리우면 휴천재를 방문하셔서 등산을 하셔도 좋구요....
언제나 환영입니다.
-전순란
안녕하세요?
구글에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검색을 통해서 블로그에 들어오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도 가톨릭신자(안드레아)이고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 입니다.
하나 궁금한게 있어서 여쭙고 싶습니다.
저의 여자친구는 개신교신자이고 대학생때 힘들 무렵 개신교를 믿게 되어서
거기서 큰 위로를 받아왔습니다.
제가 가톨릭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나, 교회에서 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들로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에서 힘이 되어준 종교이니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저는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성가정을 이루고 싶은데
현재로써는 그것이 어려울것같고 미래가 불행할 수 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도 가집니다...
다른 종교로 인한 생활에서 여러 갈등이 가능할것도 같구요.. 또 나아가는 방향도 다를것 같구...
의견을 좀 전해주실수 있으신가요?
그럼 안녕히계세요!
안드레아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omnia vincit amor!
기원전 1세기 시인 베르길리우스(버질)의 시구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종교 신앙의 차이가 무슨 문제인가요?
같은 그리스도신자가 "성가정"을 이루고 싶어 갈등을 일으킨다?
현대인 젊은이들이 어떻게 신앙이 사랑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듯한 말을 하지요?
주일이면 성당을 가고 교회를 가더라도 아침 저녁에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고 해 보시면,
서로 상대방의 신앙생활을 격려하고 교회활동을 밀어주면
"에큐메니칼 성가정"을 이룰 거에요.
제 남편은 결혼 40년간 한번도 제게 가톨릭신자가 되라고 권한 일이 없었어요.
다만 3년전 작은아들의 사제서품을 앞두고 작은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드디어 제가 가톨릭으로 입교하였지만...
--전순란
경기도 양평 그림쟁이 민병각입니다.
오랜만에 전여사님 글방 방문했다가 입원하신 것 알았습니다.
벌써 여러날 되신 것 같은데 병세는 어떠신지요?
편찮으신 여사님도 힘 드시겠지만 대사님도 어려우시겠어요
진작 알았으면 문병이래도 가야하는데--
언제쯤 퇴원하시는지요?
송도 병원으로 알고 있느데, 강북 송도 병원이지요/?
빨리 완쾌하셔서 퇴원 하시길 빕니다.
양평에 있는 분들은 다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연술 사장님은 편찮으신 것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저도 만난지 오래 되어서요
저는 하는 것 없이 그냥 바빠요
지난해말 전시때문에 파리 갔다오고 계속 전시회 작품 내고 하느라
편찮으신 분께 쓸데없는 말이 길어 졌습니다.
퇴원 하시면 소식 주세요
네려가시기 전에 양평에 한번 들렀다 가겨도 좋구요
병 문안 못간 턱을 한번 할 수 있게요
속히 쾌차하시길 빌며 인사드립
미음을 드시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서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성교수님! 마음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선신부님은 왜관본당 주임으로 가셨고 새로 부임
하신 신부님은 대구 대명동 본당주임으로 계시다가
이동되어 오셨습니다. 김 수영 바실리오 신부님 부산
출신으로 1965년생입니다.출판업무는 처음이어서 앞
으로 많은 공부도 해야하고 경험도 쌓아야 할 것 같
습니다. 성교수님께서도 많은 조언도 해 주시고 많이
배려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시는 성교수님께서도 환절
기에 건강 유념하시고 자주 연락 올리겠습니다.
왜관에서 안 수사가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플로리다 탬파에 사는 김혜란 율리아나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자매님 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탬파한인 공동체는 살레시오 수도회내에 있고 한국에서 살레시오회 신부님이 본당사목을 위해 파견나와 계세요.
자매님글을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는 얘기를 저희 신부님과 (살레시오회 정혁 신부님) 나누다가 저희 주보에도 1개씩 실으면 좋지 않을까 하여 글을 남깁니다. 글이 아주 재미있어서 저희 주보에 1주일에 1개를 뽑아서 '신부님 어머니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실었으면 합니다. 저희 신자분들에게 신앙생활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싶습니다.
괜찮을런지요?
순란아~
오랜만에 불러본다. 1년에 몇 번 일까 ^?^
먼저 카드를 보내줘서 미안하고 고맙고....
열심히 살고 활동하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 보기좋아^^
니가 말한것처럼 그 긴 세월 굽이굽이 지리산 자락만큼이나 할 이야기도 많은데.....!
길게 말할 수도 없고^^ 시간 나는 대로 블로그에 간단히 몇자씩 적기도 하고..그렇단다.
시간나면 놀러와^^
http://blog.naver.com/thanks419
주님 오심을 축하하며.....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