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사는 집 (잠언 9장)

 

 

"97년 가을, 20세기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잃었다!"

늦게나마 98년 신년호 『한겨레 21』의 인물평을 전해듣는 독자는 이 글귀에서 한결같이 다이애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주간지에서 기리던 여성은 영국의 전왕세자비가 아니라 인도 칼컷타의 빈민굴에서 세상을 떠난 마더 데레사였다. 97년을 마감하면서 (필자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이곳 이탈리아 언론 기관들이 합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그 해의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다이애나를 꼽은 이탈리아 국민은 25퍼센트였고 60퍼센트는 마더 데레사를 꼽았다.

여기 평범한 인간들을 심저에서부터 비춰주는 어떤 지혜가 엿보인다. 그리고 에집트 함족과 아라비아 셈족의 지혜가 계시의 그릇에 담겨지면서 한결 빛을 발하는 지혜문학 성경들을 우리가 한 장씩 들춰보려는 까닭도 여기 있다.

중동의 금언집이라고 할 『잠언』도, 그보다 한참 뒤에 엮어진 『집회서』도 인간 실존의 평범하면서도 깊이있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어느 민족에게나 조상대대로 전해오는 지혜문학은 마악 인생의 항로에 닻을 올리는 젊은이들에게나 성쇄고락의 인간 운명과 실존적 한계상황에서 고뇌하는 중늙은이들에게나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우리가 읽으려는 『잠언』9장은 인생의 여로를 아예 두 갈래 길로 묘사한다.

두 갈래 길

지혜 마나님(잠언 9,1-12)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푼다.
시녀들을 내보내어 마을 언덕에서 외치게 한다.

"어리석은 이여, 이리 들어오시오."
그리고 속없는 사람을 이렇게 초대한다.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받아 마시지 않겠소?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나서 보시오."
... ... ...
지혜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
수명이 길어진다.
지혜를 얻으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만
거만하면 자기가 해를 입는다.

어리석음 계집(잠언 9,13-18)

어리석은 여인은 속이 비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선을 떤다.
그는 제 집 문 앞이나

마을 언덕 위에 앉아
제 갈 길 바로 걷는 사람을 불러 말한다.
"이 숙맥아, 이리 오렴!"
또 속없는 사람에겐 이렇게 말한다.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
그런 무리들은 멋모르고 들어섰다가
죽은 혼백을 보고
저승 골짜기에 들어 섰음을 알게 되리라.

지혜문학은 시종 일관 지혜와 어리석음을 두 주인공으로 삼는다. 인생의 가도에서 지혜라는 마나님과 어리석음이라는 계집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장면을 설정한다. 두 여인이 "속없는 사람" (우리 누구나 속절없는 사람 아닐까?)을 초대하여 가르침을 내리겠다는 마음은 같지만, 지혜는 스스로 어리석다고 자처하는 사람을 불러들이는데 비해서 어리석음은 "제 갈 길 바로 걷는 사람"을 "숙맥"이라고 조롱하며 꼬드긴다.

먹고 마시는 잔치를 약속하는 말투는 두 여자가 비숫한데 말씨가 사뭇 다르다. 마나님은 손님 맞을 채비로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손수 잔치를 베푼다. 어리석음이라는 계집은 "훔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흘리면서 흐트러진 삶을 유혹한다. 어리석은 언행을 가르치고는 "우리와 한 통속이 되어 같이 먹고 같이 살자"(잠언 1,14)는 꼬임을 이 성서는 창녀의 행실로 간주한다.

"지혜를 네 신부로 삼고 슬기를 네 애인이라 불러라.
그래야 지혜가 너를 창녀에게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7,5)
지혜가 짓는 집은 일곱 기둥위에 세워져 있지만 어리석음의 집은 결국 알고보면 죽은 혼백들이 갇히는 저승(셔올)이다. "그런 계집의 집은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라 죽음의 방으로 내려가게 된다"(7,27).

어차피 인생의 매순간과 모든 만남과 일체의 사건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리라.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신명 30,15).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귀담아 듣고 어미의 가르침을 물리치지 말아라"(잠언 1,8)는 스승의 말대로 지혜는 "나를 붙잡지 않는 자는 제 목숨을 해치고 나를 싫어하는 자는 죽음을 택하는 자들이다."(8,36).

지혜는 인생의 온갖 영고성쇄를 관찰하는 자세에서 비롯한다. 세상사를 "보며 나는 깊이 생각하였다. 그것을 보고 교훈을 받았다."(24,32). 하지만 금언집이 하느님의 책으로 격상되는 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지혜를 깨쳐라"(6,6)는 가르침이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태 6,26.28)는 말씀으로 승화되기 때문에 거기 계시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생의 마나님으로 등장하는 이 지혜는 우주가 생겨날 즈음 창조주 곁에서 뛰놀던 분, 하느님의 기쁨이요 사람의 기쁨이 되어주는 존재(집회 24장)는 아직 아니더라도 인간의 머리를 초월하는 신성한 존재임은 사실이다.

"날마다 내 집 문을 쳐다보고 내 집 문 앞에 지켜서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복받으리라.
나를 얻으면 생명을 얻고 야훼의 은총을 받는다."(잠언 8,34-35).

그래서 이 지혜의 가르침을 받으면, 명암이 뚜렷한 이 삶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사뭇 달라진다.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게 된다. "야훼의 눈길은 안 미치는 데 없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한결같이 살피신다"(15,3). 그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자세가 갖추어진다. "악인을 부러워하지 말고 못된 사람을 시기하지 말아라. 악한 사람은 앞날이 없고 나쁜 사람의 등불은 꺼진다"(24,19-20). "사람 눈에는 바르게 보이는 길도 끝장에는 죽음에 이르는 수가 있기"(14,12) 때문이다.

레이디와 마더

작년 8월 31일과 9월 5일, 거의 일주일 상거로 레이디 다이아나와 마더 데레사가 세상을 떠났을 적에, 인류는 하느님 창조의 최후 걸작인 여인의 가장 '아름다운' 두 얼굴을 발견하고 깊은 경탄을 느꼈으리라. 그것은 숙녀(Lady D)와 어머니(Mother Theresa)의 얼굴이었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눈부신 미소를 간직한 레이디 D, 세계 정상의 영예를 포기하면서까지 왕세자 남편의 부정을 묵인 않고 이혼할 용기가 있었고, 자유스럽게 사랑을 찾아나서는 결단을 보이며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왕"(Queen of Hearts)으로 불리우던 여인이었다.

떠돌던 소문대로, 영국의 가장 고귀한 여인이 마호멧 교도로 개종하고 도디의 다섯 부인 중의 하나로 에집트 하렘에 자리잡고서 앤드류 왕자에게 거무잡잡한 이복동생을 낳아주는 비극이 끝장나서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그 며칠 전까지도 윈저성과 승마교사의 침실과 백만장자의 별장으로 그녀를 추적하면서 줄곧 늘씬한 허벅다리와 요트선상의 누드와 가장 비싸고 우아한 팻션과 샤넬 향기를 퍼뜨리던 서방 언론들이, 그녀가 죽자마자 성녀처럼 시성하고는 버킹감궁과 세인트폴 교회와 영국 왕실을 세트로 한 세기적 매스컴 쇼를 연출한 것은 아마도 그녀의 삶만큼이나 "세상의 지혜"에 해당한다.

그 대신 다이애나의 허리에도 찰까말까한 작은 키에다 쭈글쭈글 주름 투성이의 87세 할머니, 그 팔에서 죽어가는 빈민들 때문에 옷자락에서는 늘 송장 냄새가 나던 수녀, 그녀에게서 인류는 무엇을 보았기에 "애덕의 여왕"(Regina della Carita)이라는 칭호를 바쳤을까? 지구상의 가장 가난한 도시에서 가장 불쌍한 임종자들을 보살피는데 평생을 바친 할머니를 "20 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보는 시선에는 아마도 신적인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차차 보겠지만 하느님의 얼굴을 아무도 피해갈 길이 없다는 것이 성서 지혜문학의 결론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읽은 잠언 9장은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깊이 아는 것이 슬기다."(9,10)


[야곱의 우물 1998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