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지혜서 1-2장)

 

브루노의 동상 밑에서

 

     지난 1월 1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로마 시청을 공식방문하여 시장과 로마시의회 앞에서 연설을 하였다. 이 사안의 정치적 의미는 이탈리아 국립 텔레비젼 방송국이 두 시간 가까이를 실황으로 중개방송한 데서 잘 드러났다. 1870년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던 사보이아 왕가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자 이에 반발하여 교황이 바티칸으로 은거하고서 거의 130년만의 일이었다. 이날 교황은 카피톨 언덕에서 "나는 로마 시민이올시다"(CIVIS ROMANUS SUM)라고 선언하여 로마인들을 열광시키고 "로마의 사랑"(ROMA 철자를 거꾸로 쓰면 '사랑' AMOR이 된다)을 연발하였다. 천년을 두고 이곳 군주로 군림해오던 인물을 중개로 "로마 가톨릭"이 재탄생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같은 날 로마의 서민 지역 캄포 데 피오리에 있는 죠르다노 브루노 동상밑에는 평신도 단체들 명의로 화환이 바쳐졌다. 하느님과 대자연의 신비로운 합일을 설파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였으며 교회의 부패를 비난하다가 1600년에 바로 그 광장에서 이단자로 화형당한 도미니코수사! 지금도 청과물과 생선 시장이 열리는 이 광장의 남쪽과 동쪽의 유서깊은 건물들은 모조리, 알렉산더 6세(1492-1503)의 정부로서 그에게 네 자녀를 낳아준 반노자 카타네이가 넘겨받아 소유하던 부동산들이었다. 카타네이 궁전들이 비웃듯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개혁가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종교재판을 받고 불꽃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교회의 가난을 외치다 이단자로 몰려 화형당한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기백명이던가! 다섯 세기의 종교재판과 그 희생자들, 특히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여인들의 무고한 죽음... 서기 2000년 대희년을 두고 교회가 하느님과 인류 앞에 청산해야 할 정의의 과제는 숱하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지혜서』 첫장부터 지혜는 정의의 여신으로 등장하면서 "지상의 통치자들이여, 정의를 사랑하여라!"는 훈계로 시작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의 수작을 2장에 담아 대조시킨다.

 

지혜서 1장(1.3.5.7)

지상의 통치자들이여 정의를 사랑하여라.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라.

사악한 생각을 가진 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전능하신 분을 시험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한다.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영은 거짓을 물리치고
지각없는 생각을 멀리하시며
악을 일삼는 자로부터 떠난다.
지혜는 사람을 사랑하는 영이다.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으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알고 계신다.

 

지혜서 2장(9.11.18.21-22)

우리가 놀고 즐긴 흔적을 도처에 남기자.
약한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을 정의의 척도로 삼자.

의인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이
그를 도와서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폭력과 고문으로 시험해 보자.

악인들의 생각은 그릇되었다.
그들의 악한 마음 때문에 눈이 먼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오묘한 뜻을 모르며
거룩한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깨끗한 영혼이 받는 상급을 믿지 않는다.

 

지혜문학서가 단순한 교훈서에서 그치지 않고 구원을 주는 성경인 것은, 참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을 도덕적 죄악보다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으로 지적하는데 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뜻에서의 무신론이 아니라 하느님은 더 이상 인간사와 역사를 보살피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지목한다. 그래서 자연히 믿음과 삶이 무관해진다.

 

종교인의 무신론

 

성서의 얼이 남을 개종시키는 칼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회심시키는 영이라면, 우리는 나자렛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서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 보시라지."(마태 27,43) 하며 조롱하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살펴볼 만하다. 기이하게도 그 무리는 사악한 무신론자나 무식한 폭도들이 아니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날마다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의인들을 제거할 때에 사용한 증거는 하느님의 침묵이다. "그가 한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이 그를 도와서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폭력과 고문으로 시험해 보자. 입만 열면, 주님이 자기를 도와 주신다고 말해 왔으니 그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죽음을 한번 안겨 보자"(지혜 2,17-20). 무죄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서 종교인들은 하느님의 반응을 떠보는 것이다.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느냐?"(마르 15,32). 그런데 하느님은 개입을 않으신다. 누가 보기에도 침묵하는 하느님, 역사에 개입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가난한 의인을 골탕먹인들 어떻겠느냐? 과부라고 특별히 동정할 것 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 해서 존경할 것도 없다"(지혜 2.10).

 

이 성서의 가르침으로 보나 교회사로 보나, 정의 없는 유신론은, 크고 작은 나자렛 사람들을 얼마든지 처형하고 남을 맘몬교 유신론이기 쉽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이사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하셨지만, 교회는 맘몬을 마소로 길들여 그 위에 하느님을 모셔가는 길마잡이 기술을 익혀온 듯하다. 그래서 어느 주교의 사목 교서에서 (시국사건으로 갇힌)"감옥 죄수를 예수께서 면회가셨다는 이야기 복음서에 나옵니까?"라는 구절을 읽어도 이상할 것 없었고, 어느 수도회의 교구 진출을 거부한 모교구장의 명분이 "왜 하필 가난한 사람들 사목입니까? 부자들은 천당 가서 안됩니까?"라는 말이었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돈이야말로 하느님이 지으신 좋은 것이며, 부자들이야말로 교회의 보살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사업도 가난뱅이들의 푼돈을 갖고서는 안됩니다. 몫돈이 필요하고 큰돈을 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부자들입니다."라는 신학자의 강연도 지당하게만 들렸다.

 

광야의 유혹에서 보듯이, 하느님이 함께 하시더라도 돌이 빵이 되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우리 삶에서 쫓아내고나면 빵마저 돌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했다. 남한 땅에서 수조원의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면서 수백만이 아사에 직면한 북한 동포에게 국수 한 끼를 아까워하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다 IMF 위기에 빠지자 세계 언론들이 남북한을 싸잡아 "경제 실패의 쌍둥이"라고 욕하는 까닭이 어디 있을까? (Corriere della Sera 1997.12.18: COREA: Le due facce di un fallimento 참조) 한국에 닥친 자본주의 문화가 얼마나 뿌리깊었길래 남북 문제에도, 북한 식량위기에도, 남한 IMF의 위기에서도 신앙에 입각한 비젼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가 되었을까?

 

"지혜는 사람을 사랑하는 영"

 

세례받고 은총을 입어 살아가는 우리지만 누구에게나 이 성서가 꼽는 의인과 악인의 모습이 있다. 아무리해도 그중 하나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고 어느 편으로 기우는지는 사랑의 시선에, 하느님의 시선으로 인간과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에 나타난다.

 

한 송이 백합화를 보고서 "봄철의 꽃 한송이도 놓치지 말자. 장미꽃이 지기 전에 장미 화관을 쓰자."(지혜 2,7)는 말과,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태 6,30)는 말은 사뭇 다른 지혜에서 온다. 어리석은 자는 하느님을 욕한다기보다도 창조계를 착취한다. 이 실천적 무신론이 과연 어디서 오는지는 어리석은 자가 내리는 생명의 정의에 암시되어 있다. "우리의 생명이란 심장의 고동에서 나오는 불꽃에 불과하다. 불꽃이 없어지면 우리의 육체는 재가 되고 영혼은 하염없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지혜 2,2-3).

 

우리 삶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침묵은 하느님이 인간들을 보살피지 않으신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브루노의 화형장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도, 광주에서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침묵을 지키셨다. 따라서 만사를 우리 손아귀에 버려두시는 셈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기 주먹밖에, 주먹에 쥔 것밖에 믿을 것 없다고 강박관념에 서둘 수밖에. 하느님도 사람도 우리한테서 까마득히 멀어 보인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홉스)거나 "타인은 지옥이다"(사르트르).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힘을 바탕으로 정의를 세우고 싶어진다. 타인들로 하여금 나와 똑같이 사물을 보게 완력을 쓰고 싶다.

 

하지만 오늘의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다.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의인은 지옥을 모른다"(지혜 1,14-15). 과연 의인은 하느님의 침묵에서 생겨난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숨지면서까지 하느님의 침묵을 고집스럽게 믿던 분에게서 우리 희망이 오지 않았던가?


[야곱의 우물 1998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