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지혜는 민족의 구원(지혜서 6장)

 

 

지혜는 정치적이다.

 

"한국말 손님들 오세요. '빨리!' '빨리!' 오세요. '처언' '처언'히 오세요."

스페인 출신 살레시오 노인 신부님이 서툴게 배운 한국어 문장 몇 개를 가락까지 실어서 장난삼아 확성기로 내보낼 적마다 로마의 이곳 성갈리스도 카타콤바 입구에는 우리 나라 순례객들이 실히 사오십명은 모여들곤 했었다. 더군다나 우리 순례자들은 구교, 신교를 막론하고 지하의 별당을 구해 예배를 보거나 미사를 집전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안내인들에게도, 외국인들에게도 종교심있는 국민으로 기억되곤 하였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족히 하루 오백명은 찾아오던 한국 순례자들이 올해 들어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같은 경내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 신부님들이 곧잘 물어오신다. "한국의 경제위기에 관해서는 많이 듣고 읽었지만 이 정도로 심한가?" "그것보다는 저희 국민은 위기가 닥치면 정부와 합심하여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삼가는 것뿐입니다. 몇 달 지나면 다시들 찾아올 것입니다." 막상 대답은 이렇게 하면서도 우리로서는 고국의 정부와 국민이 단결하여 이 어두운 터널을 빨리 벗어나 주기를 기다리는 마음만 간절하다.

 

일찍이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주창한대로, 선한 정치, 참다운 철학적 지혜를 갖춘 정치가의 손에 국민의 행복과 안녕이 달려 있음이 실감난다. 우상숭배에 가까운 부자세습의 독재정권하에서 닥쳐온 이북의 식량난이나,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감을 방지하기 위해서 집권자들이 숨기고 미루다가 온국민에게 뒤집어씌운 이남의 IMF 위기가 이를 실증한다. 내 회사의 파산, 우리 남편의 실직, 우리 자녀의 취업난을 목격하면서 내가 여태까지 투표소 휘장 속 하느님만 보시는 데서 찍어온 투표지를 두고 하느님 앞에 성찰해볼 눈을 가진 신앙인은 대견하다. 지혜서 6장을 읽으면서 내 일신의 정치적 성찰을 시도해 본다.

 

그러면 왕들이여,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깨달아라.
땅의 끝에서 끝까지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아 배워라.
그대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그대들의 주권 또한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대들의 업적을 굽어보시고
그대들의 계략을 낱낱이 살피실 것이며
만일 주님의 나라를 맡은 통치자로서 그대들이 정의로 다스리지 않았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처신하지 않았으면
주님께서는 지체없이 무서운 힘으로 그대들을 엄습하실 것이다.
권세있는 자들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미천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용서를 받겠지만
권력자들은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지혜 6,1-6)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교육, 가정에서 행사되는 모든 힘이나 권력은 하느님 권력에 참여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지혜서가 가르치려는 바는, 권력이 신성하니까 시비하지 말고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권력은 하느님이 행사하시는 방식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여년전 유럽의 어느 경제지가 전세계에서 약육강식의 논리를 가장 철저하게 구사하는 정부로 한국 군사정부를 꼽은 사실이 있었다. 정경유착으로 무한정한 융자를 받아온 재벌들의 40, 50개에 이르는 기업 확장과 이에 따른 중소기업들의 도산이 의당한 시장경제처럼 선전되고, 의정부 법조인들에게서 목격하듯이 유전무죄(有錢無罪)요 무전유죄(無錢有罪)가 한국사회의 법정의로 통해왔을지 모르지만, 하느님께는 정반대이리라. 약자들의 과오는 하느님이 눈감아 두시지만 강자들은 가차없이 처리하시겠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왜 창녀, 세리, 부정탄 죄인들은 감싸주시면서도 군주와 제관들과 바리사이같은 소위 엘리트들은 그토록 가혹하게 대하셨는지 납득케 한다.

 

그래서 성서 전부가 그렇지만 지혜서 역시 군주와 지배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읽을 책이 아니라 권리를 유린당하고 공연히 핍박받고 온갖 차별에 허덕이는 희생자들, 정의를 주리고 목말하면서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을 책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마태 5,6)는 말씀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읽을 책이다. 이 성서가 가르치는 "지혜"는 어떤 사변적 철학이 아니라 실천적 정의(正義)이기 때문이다. 세도가들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종을 받지 않고 강자를 편들지 않는 정의이다. 이래서 하느님의 지혜는 정치적이다. 성서를 비정치적이라고 하거나 종교는 정치적 비판을 삼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존세력에 속하거나 그 집단에게서 혜택을 받는 층이리라.

 

예수 마음으로 살고저

 

그리스도인은 분명 비신앙인과는 다른 "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게다. 하느님의 얼을 가리켜 "거룩한 영"(성령)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의 얼을 가리켜서는 "예수의 마음"(성심)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찾는 하느님의 얼, 하느님의 지혜를 시사하여 지혜서 6장은 다음과 같이 맺는다.

 

그러면 이제 나는 지혜가 무엇이며 그 기원이 무엇인지를 말하겠다.
내가 그대들에게 감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또 나는 사람을 눈멀게 하는 시기심을 벗삼지 않겠다.
시기심이란 지혜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많은 현자들은 세상의 구원이며
현명한 왕은 백성의 번영이다. (6,22-24)

 

과연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 익힌 "현자들은 세상의 구원이다."(24절) 이 구절이 미덥지 않으면 동방의 거룩한 현자(聖賢), 공자, 석가모니, 나자렛 예수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가 생각해보면 된다. 그들은 진정 빈자들과 약자들의 죽을 인생, 죽도록 힘겨운 인생에 빛과 희망이 되어왔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 문화는 오로지 그들의 기념물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인류의 성현들이 인류사에 남긴 불멸성을 우리는 그 분들의 얼을 기리는 성전들과 경전들과 그분들의 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남녀 수도승들에게서 본다.

 

두 번째, "현명한 왕은 백성의 번영이다."라는 글귀에서 파라오의 꿈에서 중동에 닥칠 칠년 풍작과 칠년 흉작을 예견하였고, 그러한 성조 요셉의 지혜를 인정하여 국가를 구한 파라오의 현명함이 생각난다(창세 41장). 세계 통화연구단체들과 한국은행의 줄기찬 경고와 보고서를 묵살하고 정치적 득실만 계산하다가 전세계의 비웃음을 사고 온 겨레를 사업부도와 실직과 물가고로 시달리게 만든 우리네 정치가들의 행태는 이와 대조적이다. 현자들은 권력의 남용을 비판하고 민족 경제의 파탄을 막고 그 사회에 완전한 정의를 구현하며 법정의를 펴는데 하느님 외에는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머리를 잘 굴려 북풍공작으로 차기 대권을 창출하고, 국가 경제를 파탄내면서까지 특정기업들을 육성하고, 천문학적 선거자금과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모은 뒤 법망에 걸려서도 권력의 비호를 받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악마적 꾀는 지혜가 아니다.

 

물론 솔로몬이 말을 거는 대상은 군주들과 재판관들이었지만 그것은 왕정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시대에는 우리 각자의 선거권과 여론과 정치적 발언을 겨냥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만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도 효험을 끼치는 영약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신앙인은 선거철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신명 30,15)는 말씀을 상기하리라. 투표소에 들어갈 적마다, 자기가 찍는 사람이 부정한 정치를 하고 국가 경제를 파탄내고 무죄한 자들을 희생시킬 경우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마태 27,25)는 고백을 곁들이리라.

 

지혜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현자는 "사람을 눈멀게 하는 시기심을 벗삼지 않는다." "삼이가 남이가?"(92년 대선)라거나 "우리가 남이가?"(97년 대선)라고 하면 차라리 애향심이 담긴 애교처럼 들리겠지만, 한때 포청천을 자처하였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조순 총재마저 지난 4.2 보궐선거 유세장에서 "김대중 정부의 호남싹쓸이 인사로 여러분의 후배, 아들이 밀려나고 있다"는 말로 영남인들을 선동한 일이나, 천주교 부산 교구 모본당에서 KAL기를 폭파한 마유미(= 김현희)와 나란히, 87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죄로 김대중씨를 치죄하는 연극을 상연하면서 본당교우들과 청년들이 재미있어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의 지혜를 힘입어 지역감정을 청산하고 정치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앞장서리라는 외교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기 십상이다. "시기심이란 지혜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지역감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루가 복음(9,51-56)에도 우리에게 교훈을 줄만한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참에 지름길이라 하여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셨다.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의 행선지가 예루살렘인 줄 알고서는 동네에 발도 못 들여놓게 하자 제자들이 분기탱천하였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신앙을 함께하는 분들 가운데 특정 지역을 가리키며 "저곳 사람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는 말을 하거나 듣는 교우는 (일부 성서 사본에만 나오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의 답변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너희는 어떤 영(= 얼)에 속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루가 9,55).


[야곱의 우물 1998년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