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헛된 인간사, 교회사(전도서 1장)

 

 

"가시나무새"

 

     오스트렐리아 여류작가 ( )의 순애소설 <가시나무새>가 텔리비젼 연작물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방영되던 1980년대 초반이었으리라(한국에서도 약간 늦게, 군데군데 삭제된 채로 방영은 되었다). 이 작품이 가톨릭 성직자상을 심각하게 실추시킨다며 이탈리아 국영방송국에서 방영됨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바티칸이 발표하여 이탈리아 정부와 미묘한 마찰을 일으키던 무렵이었다.

 

그해 세계어린이날이었던가? 우리집 빵고도 한국 어린이단에 뽑혀 엄마를 따라 바티칸 바오로6세홀로 갔다. 교황님의 입장을 기다리느라 스무명이 넘는 추기경들이 도열한 사이로 네 살박이 빵고가 아장아장 걸어가 할아버지 추기경들과 그 붉은 복색과 반지를 신기한 듯이 차례차례 쳐다보고 다녔다. 추기경들도 한복을 차려입은 황색인종 어린이가 귀엽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중이었다. 그때 빵고가 쬐그만 손가락으로 저 위엄있는 추기경들을 주욱 가리키면서 하던 한 마디. "할아버지들 모조리 가시나무새다!(Voi siete tutti uccelli di rovo!)"

 

엄숙하던 장내에 일제히 웃음이 터졌고, 극중 인물이 추기경이 되는지라 그 프로를 놓쳤을 리 없는 추기경들은 박장대소하며 빵고를 끌어안고 번갈아 뽀뽀를 해주면서 "보까 델라 베리따"(Bocca della verit !: "진리의 입이로다!")를 연발하였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는 경건한 성경치고는 거의 하느님을 모독하는 지경까지, 하느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정도까지 이르지 않나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책이다. 불손하다 하여 이 성서를 정전으로 받아들이는데 시비를 건 랍비들이 많았지만, 우리가 한사코 외면하고 싶은, 인생과 역사의 명암을 깨우쳐 주는 글이어서 그 철저한 염세론에도 불구하고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정전에 받아들여졌다. 인생고에 견주어 신문제를 논하면서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 햇볕에 그을리며 그토록 수고한 보람이 당사자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푸념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수고, 그분의 창조 사업이야 죽을 인생이 어찌 알겠느냐는 절망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분이 오셔서 부활의 희망, 역사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믿음을 이루어 주시기까지는 코헬렛, 곧 전도자의 절망은 "깊은 구렁에서 부르짖는" 진솔한 탄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실제체험은 소박한 낙천론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지혜서나 집회서의 소박한 인생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전도서의 인생관이다. 몸소 극단의 경지까지 인생의 고통과 인간사의 환멸을 겪어본 사람의 메시지여서 전도서에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건네 줄 말이 담겨 있다. 첫장을 새삼 묵상해 본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떳던 곳으로 숨가삐 가고
남쪽으로 불어 갔다 북쪽으로 돌아 오는 바람은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 온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 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
강물은 떠났던 곳으로 돌아 가서 다시 흘러 내리는 것을.
세상만사 속절없이 무엇이라 말할 길 없구나.
아무리 보아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아무리 들어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수가 없다.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보아라, 오늘 여기 새로운 것이 있구나!" 하더라도 믿지 말라.
그런 일은 우리가 나기 오래 전에 이미 있었던 일이다.
지나간 나날이 기억에서 사라지듯
오는 세월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 (전도서 1,1-11)

 

코헬렛이 인간 업적에 내리는 평가는 단정적이다. 인간들이 세운 모든 제도와 문화와 위업은 한 마디로 "헛되고 헛되다." 천년을 넘게 교황이 군주로 임한 로마의 주요건축물이며 바티칸궁의 방방에는 "교황 아무개가 구주강생 몇 년, 재위 몇 년에 세웠노라"는 라틴어 문구와 교황 문장(紋章)이 반드시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지만, 하느님의 현자가 보기에 "하늘 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다."(전도 1,14)

 

"하느님의 어릿광대" 프란치스코를 팔아 어지간히 흥청망청 돈을 벌던 아씨시에 작년 가을 지진이 나고 대성당 지붕이 구멍났다. 그때 뜻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물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성베드로대성당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만큼" 무너져도 우리 신앙은 여전히 굳건할까? 로마에 와서 "모든 성당들의 어머니"라는 라테란 대성당에서 성가대도 없이, 거기 설치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침묵한 채 집전되는 추기경의 성탄전야미사(신도라고는 반백의 노인들 50여명)에 참석해 본 사람, 한때 실히 2,3백명 수녀를 헤아리던 거창한 수도원들이 관광객 상대로 영업하는 여관이나 유학생을 받는 하숙집으로 바뀌는 모습을 본 사람, 성체등이 켜진 제단 앞에서마저 무릎 꿇는 법도 모르는 관광객들에게 "구경꺼리"로 변해버린 로마의 대성당들을 방문하는 신앙인에게는 전도자의 장탄식이 예사롭지 않으리라.

 

태양도 바람도 강물도 역사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영고성쇄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허무감이 어디서 유래할까? "세상만사 속절없이 무엇이라 말할 길 없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수가 없다."(전도 1,8)는 구절대로, 그 어느 인간도 세계와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눈으로 보거나 듣거나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까닭이리라. 자기 선에서 끝장을 보려는 인간적인 야망으로 인해서 전도자는 "하늘 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아보는 지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들에게 애쓰게 맡기신 모진 고생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는 지혜"(전도 1,13: 직역)를 깨치려고 무척 애를 써 보았지만 헛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아시아에서 이루시는 사랑과 봉사의 사명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시아에서 이루시는 사랑과 봉사의 사명"이라는 표제로, "아시아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염원으로, 지난 4월 19일부터 5월 14일까지 로마에서 아시아 주교 시노드 특별총회가 열렸다.

 

시비걸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를 아시아땅에서 의논 않고 하필 유럽땅 로마에서 논의하느냐?"고 묻는다면야, 이 시노드가 교황을 위시한 전교회적인 모임이고, 교황님이 손발을 떨만큼 연로해서라고 대꾸할 만하다. 그러나 이 주교시노드 안팎에서 들려오던 몇몇 소식은 뜻있는 이들에게 초조한 마음을 일으키기도 했다. 네 살박이 철부지 빵고의 손가락질도 바티칸 고위성직자들의 마음을 풀어 놓을 수 있었다면, 로마의 주교와 더불어 사도단을 계승하는 아시아 주교단들의 발언이야말로 분명 하느님의 영이 서린 목소리로 경청되었어야 하리라. 하느님 백성의 소리는 진정 하느님의 소리로 간주되어야 하리라.

 

그리스도교 신자가 전국민의 1, 2퍼센트밖에 안되는 지역교회, 즉 마호멧교, 불교,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는 아시아지역으로부터 온 주교들이 반만년전부터 아시아에서 구원을 이룩해 오신 하느님의 구세사를 인지하고 감사하던 언사들은 참으로 진지하였다. 그리스도만이 하느님 앞에서 유일무이한 중개자이시라는 교리를 선포하는 데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지 고심하고 있었다. 이런 현장 사목자들의 애정깊은 신앙이 교황의 최종문서에 어떻게 반영될지 궁금하다.

 

17세기에 마태오 리치 등이 중국에서 개진하던 토착화 노력에 시비를 건 도미니칸들의 궐기나 그들에게 휘둘린 교황 인노첸스 10세(1645), 글레멘스 11세(1704), 베네딕토 14세(1742)의 조처가 중국을 복음화하는 아마도 유일무이한 역사적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까? 또 그 일로 우리 조선교회는 애꿎게도 100년을 넘게 학살과 박해를 감수해야 하지 않았던가? 도미니칸의 항의나 교황청의 조처가 과연 초자연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는지는 근대 교회사에 참으로 비중있는 예수회를 해산시킨(1773: 글레멘스 14세) 사실에서 어림잡을 수 있다. 아무리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지만 똑같은 과오가 3천년기에도 되풀이될 필요야 없지 않은가?

 

따라서 구원의 성사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 가톨릭"과 외연을 같이하리라는 미련에 매달리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지연시키거나 아예 포기하는 일도 없어야 하리라. "로마"라는 한 지명과 "가톨릭"(보편)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아귀맞춤이 되는지 많은 이가 고개를 갸웃둥하지 않는가?

 

그리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최대성과인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교회관, 또 모든 주교들이 로마의 주교와 단일한 사도단을 구성한다는 "주교 공동성"을 되새기면서 아시아 목자들은 지역교회의 자율과 책임분담을 겸허하게 타진해 왔다. 그러한 요청을 묵살하는 듯한 발언이나, 교황의 교도권을 사실상 자기들이 행사하노라고 표방하려던 이들은 지역교회들에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전세계 여러 지역교회에 갈리카니즘 분위기가 점증하는 현상도 무시 못할 일이다. 우스갯 소리같지만, "말라키성인의 예언집"에 실린 111명 교황 명단이 이제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어서 "보는 이들"은 또한차례 교회시련을 우려하며 가슴을 죌지도 모르겠다. 이런 면에서 코헬렛이 얻은 해답은 사뭇 시사적이다.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것을 알 사람은 없다. 이런 일을 안다고 장담할 현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도 8,17)


[야곱의 우물 1998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