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집념

 

 

소크라테스의 집념

 

     로마 여러 박물관에 소장된 고대 유명인들의 흉상들 가운데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것만큼 못생긴 조각이 드물다. 거의 다 벗겨진 대머리에 들창코를 하고 콧등에 고집스런 주름이 잔뜩하여 공자, 석가, 예수와 더불어 세계 4대 성현의 반열에 드는 인물치고는 기품도 매력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살림을 전혀 돌보지 않는 바람에 아내 크산티페의 구정물 바가지를 뒤집어 써가면서 그가 하고 다니던 일은 "너 자신을 알라!"는 깨우침이었다. 아고라에서 박식한 철학도들을 만나서는 유식한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져 "너희는 도대체 그 말의 뜻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서 무엇을 생각하느냐?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려고 하느냐? 거기서 나올 결론을 내다보고 있느냐? 그 결론이 너희가 내세운 기본전제와 일치하는지 않는지를 예상하고 있느냐?" 라고 따져들어갔다. 결국 유식하다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주제넘은 노인의, "너의 무지함을 알라!"는 극성에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아테네 지성계는 그에게 독배를 마시게 만듦으로써 복수를 하였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노라고 단언할만큼 어리석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면서 선한 명분을 갖다붙이지 못할만큼 무식한 사람이 없듯이. 지혜문학서들도 지혜에 출중한 이들이 인간들의 지혜를 간추리고 정화하여 하느님의 지혜로 비추임받으려는 열성에서 역어진 책들이 아닌가? 그러니 그 저자들이 비록 솔로몬같은 현자로 자부하지는 않더라도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교훈을 내릴만한 위치에 있다는 의식은 지혜문학서 어느 장절에도 역력하다. 그런데 필자는 『잠언』을 읽다가 자신을 멍청이라고 일컫는 현자를 처음으로 만났다. <아굴의 잠언>으로 꼽히는 30장에서였다.


정녕 나는 여느 사람보다 멍청하였고
인간의 예지가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깨치지 못하였다.
누가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왔느냐?
누가 제 손바닥에 바람을 모았느냐?
누가 겉옷으로 물을 감쌌느냐?
누가 세상 끝들을 세웠느냐?
그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은?
정녕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이시다.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말아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잠언 30,2-6)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인다"

 

아굴의 이 경고는 예수께서 언젠가 성령을 받아 감격어린 음성으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루가 10, 21) 하시던 기도를 상기시킨다. 더군다나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십니다"(루가 10,22)는 성자의 고백은 세례를 받아 초자연 지혜를 갖추었노라고, 신앙 덕분에 아들이 누구신지 아노라고 자부하는 신앙인들을 뜨끔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라고 못박는다. 다만 이 말을 하면서 사도가 내세우는 현자 그리스도는 어이없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곧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17-25).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혜이신데, 그 지혜가 십자가, 자기 비움, 죽음 등으로 체현되는 까닭에 계산에 밝은 것이 곧 지혜라고 여기는 우리한테는 알아듣기 힘들다.

 

하느님의 영을 진짜로 받은 현자들은 인간들의 지적인 오만을 무척이나 경원한다. "나 지혜는 교만과 거만과 악의 길을, 사악한 입을 미워한다"(잠언 8,13) 이 경고가 학식있고 교만한 교회지도층만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예를 들어본다.

 

예수라는 분이 생전에 가장 많아 듣던 칭호는 '예언자'였다. 그런데 구약에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이 무수히 많았는데 그 중에 제 명에 죽은 예언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평이다(마태 23, 29-36). 하나같이 자기 백성들한테, 국왕에게, 사제들에게, 군인들에게 맞아죽었다. 그리고 예수님 운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의상 예언자란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언행을 볼라치면, 우리가 지혜로우신 하느님이 보내셨다면 예언자란 이러저러한 사람이겠지 하는 추측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만다. 또 예언자는 으레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발언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불길하고 기분나쁘고 지혜롭지 못한 소리들이다. 예수 시대의 교회 당국자들(대사제)과 지혜로운 평신도 지도층(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이 정해놓은 기준에 의하면 예수는 어느 모로도 예언자가 아니었다. 예언자일 수가 없었다.

 

그는 안식일도 안지키고 불치병자들을 고치는가 하면("일할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루가 13,14), 성직자에게 데려오지 않고 신들린 사람들을 직접 고쳐주는 것이었다("그는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들을 쫓아낸다": 루가 11,15). 서품도 받지 않은 주제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말해 보시오.": 루가 20,2), 중풍병자를 껑충 일으켜 세우는 짓도 눈꼴사나운데 감히 사죄경까지 염해주는 것이었다("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서품받은 성직자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르 2,7). 예수를 무조건 제거한다는 결정에 니고데모가 항의하자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결정적인 반박을 폈다: "성서를 샅샅이 뒤져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요한 7,52) 성경을 샅샅이 뒤져본 끝에 나온 지역감정이라니!

 

하느님의 딴지걸이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이사 29,14)는 말씀대로,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를 보내서 똑똑한 종교 지도층의 본색을 벗겨버리신 셈이다. 인간적 지혜에 딴지를 걸어서, 하느님의 사람들을 못 알아보는 어리석음을 밝히신 셈이다. 두려운 일은, 그리스도 사건에 버금가는 어리석은 작태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 무수히 반복되어 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성령의 감도가 제도교회에만 있다 하여, 로마주교의 무류권을 내세워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독점적인 지혜를 빙자하여 교회내에 분열과 증오를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진리의 이름으로, 교도권 수호를 명분으로 예언자들을 쫓아내고 파문하고 죽이지 않았을까?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니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말아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잠언 30,5-6)는 구절을 다시 음미해본다.

 

그리고 지혜서의 저자가 지적하는 다음 죄목이 굳이 외교인, 무신론자, 이단자나 좌익들만의 범죄일까? 아니면 우리 얘기이기도 할까?

 

이 여섯 가지를 주님께서 미워하시고
이 일곱 가지를 그분께서 역겨워하신다.
거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
간악한 계획을 꾸미는 마음
악한 일을 하려고 서둘려 달려가는 두 발
거짓말을 퍼뜨리는 거짓 증인
형제들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는 자이다. (잠언 6, 16-19)

 

언제부터인가 내 책갈피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하짐(Ignatios Hazim)의 명구가 꽃혀 있었다. 하느님의 영,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지혜가 없으면 "하느님은 멀기만 하고, 그리스도는 과거의 인물로 그치고, 복음은 죽은 문자요, 교회는 사회 조직에 불과하며, 교회 권위는 지배체제가 되고, 선교는 선전이 되고, 경신례는 직업이 되고, 그리스도교 생활은 노예근성에서 오는 윤리도덕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와 함께하면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복음은 생명을 주는 위력이 있고, 교회는 성삼위의 친교 그 자체로 드러나며, 교회 권위는 자유를 가져다 주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새로운 성령강림이요, 전례는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기념이자 선참(先參)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함은 인간이 신화(神化)한다는 뜻이다."


[야곱의 우물 1998년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