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에서 부르는 성탄 송가(지혜서 17-18장)

 

 

 

만상이 고요 속에 잠기고
밤은 달려서 그 한허리에 다다랐을 때
주여, 전능하신 말씀이 하늘 어좌에서 내려오셨나이다.


원래 성탄절 자정미사에 나오던 무척이나 목가적인 입당송이었다. 그러나 당초의 문맥이 쑥스러워서 지금은 성탄후 제 2주일 미사 입당송으로 나오는 성서 구절(지혜 18, 14)이다. 성탄절에 쓰기로는 문맥이 쑥스럽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혜서 17-18장이 같은 하느님 손에서 에집트인들에게는 파멸이 내리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도래한 사실을 장중하게 구원의 서사시로서 순진한 목동들이 양떼를 지키며 베틀레헴 들판에서 밤새우는 풍경과는 생판 다르기 때문이다. 공동번역본 텍스트를 읽어보자.


무거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에
하늘의 옥좌로부터 주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마치 사정없는 전사처럼 멸망한 땅 한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그는 날카로운 칼과 같은 주님의 확고부동한 명령을 가지고 와서
우뚝 서서 온 세상을 시체로 가득 채웠다.
그는 아래로는 땅을 딛고 위로는 하늘까지 닿았다.
(지혜 18,14-16)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평화!"라고 목청껏 노래하는 크리스마스 자정의 낭만과는 달리, 이 구절은 "한밤중에 야훼께서 에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모조리쳐 죽이셨다"고 기록된 학살사건을 담고 있다. "그러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한밤중에 모두 일어났다. 에집트에서는 곡성이 터졌다. 초상이 나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었던 것이다."(출애 12,29-30) 에집트의 저 곡성이 안쓰러웠던지, "주님의 심판은 위대하고 설명할 수가 없다."(지혜 17,1)는 단서를 붙이면서도 지혜서의 저자는 "에집트인들이 거룩한 백성의 젖먹이들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 한 아이가 버려졌다가 홀로 살아 남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셔서 그들의 수많은 아이들을 죽이시고 그들마저도 모두 거칠은 (홍해의) 탁류 속에 묻어 버리셨다."(지혜 18,5)는 상선벌악의 논리를 펴보려고 한다.

 

지혜서 17-18장은 어둠과 불기둥이라는 주제를 시종일관 발전시키면서 구세사의 불가사의한 이 사건을 풀어보려고 시도한다. 과연 하느님의 말씀은 밤을 도와서,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선과 악을 이루시는 듯하다. 에집트인들에게는 비극의 밤이 히브리인들에게는 해방의 밤이 되고 누구에게나 죽음을 의미하던 사막이 유다의 후손들에게는 달아나서 살아나는 해방이 된다. 물이 없으면 누구나 죽지만 히브리인들을 뒤쫓던 에집트인 전차대에는 죽음의 묘지가 된다.

 

지혜서의 저자는 에집트 백성이 그토록 엄청난 비운을 당한 이유가 "그들 자신이 암흑의 죄수였고 하느님의 영원한 섭리를 외면하고 자기의 지붕 밑에 갇혀 산"(지혜 17,2) 까닭이며 그 뿌리를 그들의 '우상숭배'에서 찾고 있다. 그가 묘사하는 우상숭배의 심리가 하도 정교하고 예리하여 만일 이 두 장을 인내롭게 읽어가면서 묵상한다면 성탄절을 맞는 우리에게 구약의 이 현자가 보내려는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른 성탄 카드

 

마태오와 루가가 복음서 첫머리에 그려넣는 동화적인 설화들은 최초의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수수께끼같은 사건들을 들려주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우리 아기 예수의 탄생 때에도 구세주에게 마굿간이나마 제공한 베들레헴이 갓난아이들의 죽음과 어미들의 통곡으로 사무쳤다는 이야기다. 히브리인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없애라고 한 파라오의 학살명령과 이를 모면한 모세의 운명에, 베들레헴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없애라고 한 헤로데의 학살명령과 이를 모면한 예수의 운명을 마태오는 연결시키고 싶었겠지만 지혜서 저자의 지혜를 빌리면 좀더 알아듣기 쉬울 법하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는 꿈인지 생신지 모를 환청을 듣고도 베들레헴 양치기들은 "어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사실을 보자"면서 달려가 구유에 눕혀진 핏덩어리, 외양간에서 소와 양의 입김으로 온기를 맞는 갓난아기를 발견한다. 머나먼 동방에 산다는 박사들은 이상한 별을 "그분의 별"이라고 이름짓고는 예루살렘을 거쳐 베들레헴에 이르렀고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 두 장이다.

 

그러나 이역에서 찾아온 박사들의 말을 듣고 "헤로데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으면서도",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소집되어 예언서를 연구조사한 끝에 구세주가 태어날 곳이 "유다 베들레헴입니다"라는 해답이 보도되었으면서도 예루살렘 시민이나 대사제나 율법학자 그 누구도 길안내를 자청하거나 동방박사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 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 주시오."라던 헤로데가 보낸 크리스카스 카드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는 학살명령서였다!

 

로마에서 성탄절을 맞으면서, 하드리아노 황제의 영묘 위에 세워진 미카엘 대천사상을 바라본다. 어느 해 로마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수만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교황이 현시중에 바라보니 하느님의 진노로 죽음의 칼을 휘두르던 대천사가 드디어 칼을 칼집에 거두더라는 전설이 천사상에 서려 있다.

 

나약한 아기로 태어난 하느님의 전능이라던가 십자가의 지혜를 배우고서 스무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전염병 페스트에서 아직도 하느님의 칼끝을 보는 신앙인들이라면, 가스실이든 원자폭탄이든 수단을 다해서 악인들을 몰살시키면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나고 평화가 오리라는 미신을 좀처럼 떨쳐버리지 못하리라. 대통령의 성스캔들로 탄핵을 할만큼 그리스도교적인 듯 하면서도 엄청난 무기장사로 '저주받은 땅' 아프리카를 부단히 전란의 살륙장으로 만드는 구미세계는 전쟁을 없애고 무기장사를 망치게 할 아기한테 무슨 카드를 보낼까? 이북에서 영양실조로 굶어죽어가는 어린이들의 앙상한 몰골을 사진으로 보면서도 원조식량이 인민군의 군량미로 전용될 수 있다는 의심하나만으로도 눈을 감아버리거나 식량원조를 욕하는 남한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성탄카드를 쓰고 있을까?

 

아이들에게 전할 크리스마스의 메시지

 

그래도 우리는 성탄송가를 불러야 하리라. 우리가 발붙여 사는 땅이 천상 예루살렘이 아니고 바빌론일지라도 하느님의 전능이 갓난 아기의 가냘픈 팔로 나타나셨다고 노래해야 하리라. 우리네 말구유는 어디다 놓을까? 시골의 외양간보다도 도시의 아스팔트 정글 위에, 비참과 불의, 폭력과 압제가 판치면서도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곳에, 갓난아기를 뉘인 말구유를 놓아야 하리라.

 

그리스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풍요로운 사회에서 어디론가 증발해가는 그리스도교처럼 보이더라도, 과연 삶이 아름답고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평생 한번도 겪어 본 적 없고 그럴 기회가 영영 없을 사람들, 예컨데 어려서부터 총을 잡아야 하는 팔레스티나 소년들이나, 제 1세계 신사들을 살리기 위해서 납치살해당한 뒤 장기를 척출당하는 브라질의 거리소녀들이나, '어버이 수령동지' 외에는 구원자를 개념해 본 적 없을 이북의 어린이들에게도 전달할 성탄절 메시지가 있긴 있으리라.

 

이탈리아 어느 시인(Toti Scialoja)의 글을 읽다가 떠오르는 구절을 옮겨본다. 우리 아이들에게 전할 성탄절의 메시지는 기다림과 희망이라는 생각에서다. 제목은 <크리스마스>가 어떨까?

 

엄마는 문간에 서있었어요, 날마다 문간에서 날 기다렸지요
엄마가 없어서 집이 엄청 커졌어요.
학교 파하고 집에 가면 꼭 와 있을 테지
대문만 보여도 교복이 팔락거리지만...
한참 섰다 어깨로 밀고 들어가요, 손잡인 녹물들었거든요
큰방을 지날 땐 그냥 혼자 말해요
"엄마, 크리스마스 땐 올게지? 그때 내 생일인데."

 

색색의 네온싸인이 휘황찬란한 백화점 쇼윈도에 비해서 누추한 마굿간의 초라한 등잔마냥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내 삶에서 뒷전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자주 든다. 내가 터득하여 자식들에게 전달한다는 평화 메시지도 마냥 의심스럽다. 아이들이 여러 해 모은 돼지저금통을 뜯어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행사를 가졌음직한데...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츄리 밑에 놓인 푸짐한 아이들 선물 꾸러미 속에는 사내아이가 좋아하는 플라스틱 기관총이 들어 있고 벨기제 권총도 들어있고 조로의 검도 들어 있고 땅을 포복하는 미해병대도 들어 있을 것 같아서 부끄럽기만 하다.


[야곱의 우물 1998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