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는 은총(전도서 3장)

 

야누스의 얼굴

 

     "그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라는 말은 그 사람을 이중인격자로, 겉으로는 웃고 등뒤로 비수를 꽂는 악인으로, 언뜻 보기에 더할나위없이 경건하고 선량하지만 숨어서는 표독하고 추접한 위선자로 매도하는 표현이다. 헌데 서양에서 새해 정월(January)의 이름이 유래한 야누스(Janus) 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하기로도(신국론 7.2-3), 로마인들이 상고시대부터 조상전래로 섬겨온 30명 토속신들 가운데 유피터를 앞서는 최고신이었다. 로마의 가장 오랜 시가(Carmen Saliare)에서도 "좋으신 조물주, 신 중의 신이여!"라는 호칭기도를 받을 정도였다.

 

사실 로마의 가장 오래된 동전에도 야누스신상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신은 통과(通過)를 주관하는 신령이었으므로 인간사의 한 상태가 끝나고 다른 상태가 시작하는 계기마다 로마인들은 그에게 제전을 올리고 가호를 빌었다. 동지후 해가 길어지는 첫달이 야누스에게 바쳐졌으므로 그는 한 얼굴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다른 얼굴로는 밝아오는 새해를 바라본다. 또 야누스 신은 대문(ianua)을 지키는 지방신이어서 한 얼굴로는 집안을 지키고 한 얼굴로는 문밖을 살핀다. 이 신의 상징물이 열쇠였던 것도 그 쇠붙이가 문을 잠그는 잠을쇠도 되고 문을 여는 열쇠도 되는 까닭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하는 말대로는 태아의 잉태가 이 신의 섭리로 이루어지고, 심지어는 우리 삼신할매처럼 해산에 도움도 주었으므로 그의 두 얼굴은 어린이와 더불어 모태안의 세상과 태밖의 세상을 함께 바라본다. 우리가 이천년대의 마지막 해 1999년을 맞으면서 전도서 3장을 펴는 것도 거기 시간의 두 얼굴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두 얼굴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어진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병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전도 3,1-8)

 

시간의 두 얼굴은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는 구절까지 나아가서는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3,9)라는 탄식으로 매듭을 짓는다. 만약 이 구절을 "태어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고 죽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다"는 식으로 숙명론을 담아 이해한다면 전도자의 장탄식과 더불어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또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 속에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12-13절)라는 해답밖에 얻어낼 것이 없으리라("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우주의 거대한 윤회 속에 만사가 예정된 듯한 인생에서 비록 하느님의 손길로 정해진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가혹함에 비겨 무상한 인간의 수고가 너무 헛되다는 비감에서다.

 

하지만 만일 우리 마음에서도 야누스의 얼굴을 발견하고서,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는 구절을 단순 미래로 생각해서, "어느 찰라는 사람을 사랑을 하다 구원받는가 하면 어느 순간은 사람을 미워하다 내 스스로 파멸시키는 시간이 된다"는 의미로 알아듣는다면, 시간의 두 얼굴이 내 손에 달려있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내 문앞을 지나가버리시는 하느님이 두렵다"(Timeo Deum transeuntem)고 곧잘 탄식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초침이 재깍거리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생사를 가름하는 카이로스이다. 주사맞거나 매맞듯이 이를 악물고 견뎌넘길 찰라라기보다는 나의 까딱 잘잘못으로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순간이라는 뜻이다. 모든 시간이 은총이기에 그 때를 놓치면 영겁에 이르도록 다시 없다는 의미이리라.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지속됨을 알았다.
거기에 더 보탤 것도 없고
거기에서 더 뺄 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행하시니
그분을 경외할 수밖에.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라진 것을 찾아내신다.
(전도 3, 10-15)


 

전도자의 이 가르침에는 새해를 맞는 초자연한 지혜가 엿보인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지속됨"에 비해서 인간만사가 "허무요 바람잡는 일"(전도 2,26)이 되는 연고는 무엇일까? 그분의 본질은 '끝없는' 사랑이고 인간의 본질은 '끝있는'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이고 인간의 시간은 찰라 아닐까?

 

철학자 세네카는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남의 것이고 시간만 우리것"이라고 하였지만 우리 것으로 주어진 이 시간은 얼마나 빨리 흘러가버리는가? 죽어갈 인생의 시간이 하느님 영원의 모상일 수 없을까?

 

"사랑으로 도금되는 순간들만이 영원하다" (괴테)

 

나의 짧은 인생은 우주의 세월 수십억년과 미래의 수십억년 사이에 늘어진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느껴진다. 양편의 무한한 시간을 멈출 길도 없고 내 찰라를 영구히 손아귀에 쥐고 있을 수도 없다. 단지 어떻게든 그 순간을 정착시킬 수는 있으리라. 영원한 순간으로 도금할 수는 있으리라, 오로지 사랑함으로. 내 피붙이와 이웃과 겨레 ,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사랑하는 길만이 영원한 유전(流轉)으로부터, 무상한 흐름으로부터 그 순간을 구원하는 길이리라. 그 순간을 인간과 하느님의 역사(歷史)로 끌어들이는 결단이리라. 인간의 수고가 하느님의 수고에 닻내릴 적에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3,11)는 글귀가 깨달아지리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적에 얼마나 후회하는가? 딱 한번만 더 보고 싶고 딱 한번만 다정한 음성을 듣고 싶고 그 파리하던 손을 딱 한번만 더 잡아보고 싶어진다. "이제는 잘 해 줄 수 있을 텐데.... 사랑만 하면서 살았어도 그토록 짧은 세월이었거늘..."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시간은 직선(直線)이어서 불교도들보다 기회가 더 적다. 그들에게는 영겁으로 돌아가서 그 기회가 다시 윤회하련만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한번 선택으로 영원해지고 만다. 잘못 산 시간을 두고 하느님과 사람에게 용서받을 수 있지만 회복할 수는 없다.

 

천년대를 마감하는 해에 결심을 해본다. 남에게 잘 해 주리라. 대부분은 딱한번 만나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 기회를 놓치면 그를 다시 만나 바로잡을 길이 없으리라. 용서를 청할 기회도 없고 용서받을 길도 없고... 내 곁을 지나가는 모든 이가 나의 영원을 가름하는 심판이 되리라고 주님이 공언하셨는데...

 

그리고 이 하루가 나에게 구원과 멸망이 좌우되는 운명의 순간이듯이 이 한 해가 이 민족에게 구원과 멸망이 달린 세월일 수도 있으리라. 하느님이 비록 인간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지만(3,11)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영원과 시간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아리랑" 한 소절을 끝마치고 한반도에서 퇴장하며 다른 세대가 "쓰리랑"을 부를 것이고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이는 아무도 없다, 그 노래를 작곡하시는 하느님 말고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낸 최후심판이라는 거대한 벽화처럼 역사의 종점에 드러날 민족사의 화폭에서 각자가 차지할 위치는 알 길이 없다. 이 땅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작은 행복이나마 소중히 누리고, 하느님의 지혜대로 사랑하려고 힘 쓸 따름이다.

 

야누스의 두 얼굴로 한 해를 주님 안에서 반성하고 다가오는 한 해를 주님의 선물로 계획할 수 있으리라.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물난리와 기아, 전쟁과 학살을 가슴아파하며 나의 내심에서 일었던 애증의 물굽이와 선악의 상처를 살필 수 있으리라. 내가 지난해에 주기에는 얼마나 인색하고 받기에는 얼마나 탐욕스러웠는지 어림잡을 수도 있으리라. "지구의 한쪽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죽어감을 생각하면 내 밥그릇은 왜 그렇게 수북해 보이는지... 산재를 당하여 팔다리 끊기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내 성한 몸둥이가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명동바닥을 배로 기면서 구걸하는 장애자들을 보면 내 잠자리가 왜 그토록 꺼끄러운지..."(어느 노동자의 수기에서) 그래서 새해만은 야누스의 열쇠로 내 마음의 빗장을 젖히고 될 수 있으면 활짝 마음을 열겠다고 작심할 수도 있으리라. 나의 수고와 사랑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사라진 것을 찾아내신다."(3,15)고 하셨으므로...


[야곱의 우물 1999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