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발행 [549호]
 
"김귀식 스테파노"

\"교정은 떠났으나 교직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올곧게 ‘평교사’로만 헌신해온 김귀식(65·스테파노·서울 망우동
본당) 전전국교직원노동조합위원장.

   김씨는 지난 8월31일을 끝으로 40년6개월간 정들었던 제자들과 학교 교정을
떠났지만 아직도 ‘교직을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신앙과 함께 해온 교육
현장은 그의 평생 끊임없는 화두(話頭)이다. 그래서 요즘 그는 퇴직교사 12명과
함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시지부 자문지도위원을 맡아 ‘교육개혁운동’을
시작했다. 제도교육에 찌든 ‘학교 현장을 살리기’ 위해서다.

   “제주도 끝까지라도 학교에  문제가 있다면 뛰어가겠습니다.  교육관료들과
교장의 학교행정 독식을 막겠습니다. ‘왕따’ 현상이나 청소년  폭력문제의 원
인은 사실 잘못된 학교교육에 있습니다. 먼저 교실이라는 틀을 규정해놓고 바깥
세상은 커튼으로 막아놓으려 하는 ‘교육적 색맹(色盲)’의 현실을 타개하지 않
으면 안됩니다. 우선 당장이야 서울에만 한정되겠지만, 활동을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이렇게 교육개혁운동에 나선지 12년째인 그의 얼굴은 ‘과격하다’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하고 푸근한 인상이다. “바르지 못한 일, 옳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과격’했습니다. 불의한 기득권층, 부조리한 교육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일 겁니다.” 변명하듯 답변을 털어놓는 그의 표정은 아주 씁
쓸해 보인다.

   그가 전교조 활동을 시작했던 것은 89년. 서울 성동고 연구주임으로 있을 때
였다. 지천명(知天命)도 이미 중반을 넘어선, ‘교감’을 바라보던  나이에 시작
한 활동으로 “인생을 포기했느냐?”는 질문도 숱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배웠던 기억 때문이
다. “유신시절, 무소불위한  권력의 횡포에 분연히  일어서던 제자들의 분노를
보며 그동안 제가 무엇을 해왔는지에 대한 자성을 했습니다.” 그러자 서울시교
육청은 그에게 ‘2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다. 그의 이름이  소위 ‘리스트’에
올라가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고 살아야 했다. 해당 상부에서는 그의  동향을 일
일이 체크, 교육부에 보고했고 수시로 경고처분을  받아야 했다. 경고가 내려오
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이런 고난의 세월을 가톨릭 신앙으로 버텼다.  신앙이 아니었다
면, 도저히 그 어려운 ‘혹한의 시대’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97년 2년 임기의 전교조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열정적으로 교육개혁을
위한 활동을 펼쳐 전교조 합법화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느
님만을 바라보는 일’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의 교육관은 한마디로 ‘교육은 교실에서만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 전체
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많이 배울수록 사회에 자기자신을 던지는 삶. 다른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
이 일하는 삶의 바탕에는 그리스도 신앙이 깔려있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도 ‘국민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없으면  하지 말라는 것이 나의 철
학입니다. 우리 교육의 뿌리는 썩어있습니다.”

   빛두레신앙인학교도 전교조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에 만들었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성염 서강대 교수, 이필립 천주교언론지키기모임 공동대표 등 10명과
함께 90년초 예수회 박홍 신부를  초대 교장으로 추대하고, ‘신앙과  교육’의
문제를 신자들에게 가르치며 함께  고민했다. 40년 가까운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이 만개하던 시기였다.

   빛두레신앙인학교에서 지금까지 배출한 졸업생만 해도 모두  2000여명. 제자
들을 보는 즐거움은 살갑기만 하다. 최근 들어 그는 지난달  29일부터 수요일마
다 빛두레신앙인학교을 수료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교회와 교육운동이라는 제목
의 특강을 하고 있다.

   “교육분야도 그렇지만, 항상 교회가 사회문제를 등한시하는  게 고민이었습
니다. 교회도 이제는 좁은 울타리를  털고 사회복음화에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
까. 교회와 사회를 둘로 나누는 편협된 ‘교회주의’나  ‘성속이원론적 사고’
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개인구원에만 치중하지 말고, 사회구원과 개인
구원을 똑같이 바라보는 균형된 시각이 필요합니다. 신앙도 개혁돼야 합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약칭 천정련)에서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80년
대말부터 천정련에서 민족통일분과장으로 여러 본당을 순회하면서 기도회와 강
연을 통해 겨레의 화해와 통일을 놓고 고민했다.  서울대교구 상봉동·돈암동·
사당동·천호동본당 등지를 돌며 이뤄졌던 강연은  호평을 받아 지금까지도 계
속하고 있다.

   그는 이번에 “제발 조용히 퇴임해달라”는 학교측의 요청에 조촐한 퇴임식
조차 없었던 쓸쓸한 퇴직을 기념해 ‘교사는 진실을 가르치는 자유인’(우리교
육 펴냄)이라는 책을 냈다.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교육제도를 답습해온  지시하달식의 우리 교육행
정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교사는 진실을 가
르칠 수 없는 부자유인이라는 자각이 이 책을 쓰게 했습니다. 이 책을  쓰고 나
서 ‘교사보다는 오히려 교장들이 읽어야 한다’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교장이 의식을 바꾸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교사들도  자각하는
시대가 와야 합니다. 민(民)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가 80년 12월24일  성탄전야, 서울대교구 상봉동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외짝교우로 성가대 활동을 한  부인 전경애(64·엘리사벳)씨의 기도가 큰  힘이
됐다. 그래서 LG 광케이블시스템연구소에 근무중인  장남 영기(38·요한)씨, 일
본 게이오대 박사과정중인 둘째아들 현철(36·야고보)씨와 함께 성가정을  이루
게됐다.

   그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은 당시 5·18민주화운동을 접하며 70∼80년대의 가
톨릭 사회운동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간 소년소녀가장이나 행려자,  홀몸노인 등 소외된 이웃을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가난한 이웃이 나올  수밖에 없
는 현실적인 사회구조악을 깨고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드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참교육에 대한 확고한 소신과 실천, 또 이를 통해 교육과  더불어 사회를 변
화시켜나가려는 그의 의지와 몸짓은 참으로 눈부시다.【오세택 기자】

  ▲1934년 서울 출생 ▲58년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59년 3월 전남
나주중을 시작으로 40년 6개월간 국어교사로 재직. ▲80년 12월24일 서울대교구
상봉동본당서 영세 ▲서울대교구 상봉동본당 사목회 사목위원(83∼90년) ▲빛두
레신앙인학교 교장(95∼96년)  ▲전국교직원노조위원장(97∼98년) ▲현   전교조
서울시지부 자문지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