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성 선생에 대하여
[독자 통문]
newsdaybox_top.gif 2010년 01월 21일 (목) 10:41:02 김수복 btn_sendmail.gif kimsubok21@empal.com newsdaybox_dn.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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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다고지
지금이 새벽이 아닌 한 밤중 두시 삼십이 분, 어제가 내 결혼 36주년 기념일, 목포 북항을 다녀왔다.

회를 싼거리로 먹는다는 게 비싸서 마누라 기분이 별로였다. 소주를 좀 마신다는 게, 집에 와서 잠을 자고 나니, 일찍 깼다. 혼자 살짝 빠져나가 24시 미니스톱에서 닭다리(북창니라든가) 안주에다 소주를 더했다. (내일 머리가 지끈거릴까 몰라.)

거기에서 생각나는 게 성찬성이었다. 정찬용이 나를 직접 평가하면서 한 말마따나 오지랍이 좁은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광주에서 내심 선생으로 모신 분이 이강, 고 윤한봉, 조계선 정도다. (말과 글, 개인 판단, 평가라는 게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모른다. 존재와 역사와 현실의 심연, 사람의 깊이를 다 헤아리거나 표현하지 못한다. 이름 있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누가 감히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마음씨 착한 무수한 사람이 모두다 우리 선생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까 소주 마시다가 내가 함부로 대하는 성찬성이야말로 내가 선생으로 모셔야 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전자 편지를 쓴다. 예리한 최권행도 자기 선배 성찬성을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하고 애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길어질 지 모르겠다. 한두 마디 하고 끝내겠다. 황광우 자서전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는 그 엄혹한 시절에 유인물 5,000장을 뿌리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한다.

성염이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쓴 <해방신학>을 번역한 죄로, 그 동생 성찬성은 민중해방론 <페다고지>를 번역한 죄로, 유신철폐를 부르짖던 고 지학순 주교의 지령을 받았으리라는 혐의로 남산에서 20여 일 동안 온갖 혹독한 고문을 견디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찬성이는, 독립군 때려잡던 박정희 후광을 입고, 거만[鋸萬]의 부[富, 국민의 돈]를 부당하게[합법으로?] 상속받고, 박정희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박근혜가 얼마나 치 떨리겠는가!)

박정희가 죽기 전날 밤, 김재규가 와서 살펴보고 가더라는 말을 찬성이가 나에게 했다. 박정희가 죽은 다음 날 아침 새벽 성염, 성찬성 두 형제는 남산에서 풀려나 우룰랄라 콧노래 부르며 목욕탕을 향해 걸어갔단다.

인정 많은 찬성이는 수녀원 생활을 하다가 아프다는 여자를 돌보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하여 낳은 아들이 하영이와 하준이다. 하영이는 무량태수 착하기만 하고, (아빠 엄마 속 태우지 말라고, 조계선이 배려로, 자기 노력으로, 어엿한 일자리를 잡았다.)

하준이는 아빠를 닮아 천재인 모양, 삼성 연구원 촉망 받는 직원이다. (성염이는 서중학교를 2등으로 합격했고, 찬성이도 일고를 합격했다. 찬성이는 사레지오 고등학교 학생회장 하느라, 서울대학을 가지 못했다.)

나는 그 두 아들 태어날 때부터 예뻐한 사이이지만, 거짓말 아니라, 내 아들들보다 더 착한지 모른다. 그런 찬성이가 5,18 때 광주에 들어오려다 실패하고, 그 다음 2년 뒤엔가 광주 가톨릭 정평위 간사를 맡기로 하고 광주로 온 뒤로 나와 만나 (중학교 꼬마 때부터 그를 알고 귀여워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오토바이를 태워주면 신났다 한다.) 30년 가까이 나와 술친구가 되었다. (나는 송기인 신부 형님, 찬성이 동생의, 사업 그까짓 거 뭐라고, 학생 때 하던 번역이나 하라는 질책 겸 강권에, 여태껏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 번역에 매달려 왔다.)

찬성이 지론은 술을 마셔야 속마음이 드러나고, 속마음을 섞다보면 모든 사물, 현상이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거였다. 그렇게 상당 세월 주막에서 쓰잘데없을 것 같은 온갖 사설을 주절거렸다. 그것이 82년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찬성이는 번역으로 밥벌이를 해 왔다.

나도 한 번씩 말이 턱턱 막혀서, 그 대안으로, 번역을 하리라 마음먹었던지라 번역을 하고 있지만, 번역질도 어지간한 노동만큼 힘들다. 남의 긴박한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특히 여자일 경우) 찬성이가 지금은 착하디착한 수녀 출신 하영이 엄마와 함께 함평 신광 오지에서 감자 심고 닭 키우고 알콩달콩 살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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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도출판사에 펴낸 구띠에레즈의 <해방신학> 표지그림

다음 글은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일제시대 친일잡지)에 연재로 실은 꼭지 가운데 하나다.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온정을 쏟는 천사, 성찬성

1979년 10월 27일 어스름한 이른 새벽, 남산 중앙정보부 정문을 나선 두 형제가 목욕탕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구스타보 구띠에레스가 쓴 <해방신학>이라는 책을 번역한 성염(서강대학 철학과 교수를 하다가 로마 교황청 대사로 있다. 현재는 지리산에서 번역을 하고 있다)이고 또 한 사람은 파울루 프레이리가 쓴 <민중교육론>(페다고지)이라는 책을 번역한 그 동생 성찬성(현재 번역노동자다.)이었다.

이 형제가 20일 동안 정보부 지하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사경을 헤매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것이다. 박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사형을 받았을 것이다. 풀려나기 전날 저녁 김재규가 감방으로 찾아와 한참 쳐다보고 가더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유신독재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하여 전국의 사제들도 시국기도와 미사를 드리고 수녀들과 신자들이 맹렬하게 유신철폐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런 천주교회와 한판 붙어 정세를 반전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지학순 주교가 성염과 성찬성이를 시켜 불온한 서적을 번역하여 퍼뜨리는 등 공산주의 혁명을 꾀했다고 조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전과 이후에도 성찬성은 박정희가 운동가들을 일망타진하려고 조작해낸 이른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에 속한 사람으로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은 바 있다.

그런 성찬성이 나에게는 수호천사다. 어려서부터 아끼는 후배인데 정작 나와 친형제처럼 지내기는 이십 여 년 전부터 서다. 이 친구 특기는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온 마음을 쏟는다는 데 있다. 상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보탬이 되어주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나도 그 덕을 톡톡히 본 처지다.

나는 수도생활을 십년 남짓 하고 그 사이에 서울 신학대학 육년을 수료했지만 그만 쫓겨 난 다음 혼자서라도 수도생활을 할 요량으로 광주 신학대학에서 <전망>이라는 잡지 편집을 돕다가 안 되겠어서 결혼을 하고 사업한답시고 술에 젖어 살고 허튼 짓도 많이 하면서 방황하고 있던 차에 1982년 찬성이가 서울에서 내려와 호통을 쳐서 정신을 차려 학생 때 하던 번역 일을 다시 시작하여 우리나라에 해방신학을 좀 소개했다. 찬성이 때문에 내 인생 길이 달라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찬성이라는 은인을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성찬성이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간사를 맡기로 하고 서울에서 광주로 이사 올 때 보니 살림살이가 솥단지와 그릇 몇 개, 이불과 옷 보따리가 전부였다. 돈도 달려 사글세방을 얻어야 할 형편이었다. 안쓰러워서 내가 하는 말이, “사람이 적어도 조그마한 살 집 정도는 마련해야지. 꼴이 그게 뭔가.” 라고 했더니, 이 친구 대답이,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요. 이 정도면 난 행복한 편이요. 밥이 없소 잘 데가 없소?” 라고 대꾸했다. 그런 형편에 찬성이가 한번은 어려운 후배를 만나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쥐어주고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어떤 친구가 나에게 귀띔했다.

중고등학생 때 찬성이는 전교에서 줄곧 일등을 했다. 고등학교 삼학년 올라갈 때 그 형 성염이가 나에게 찬성이가 학생회장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공부를 시켜서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지 않고 학생회장을 하고 말았다. 엊그제 막걸리를 마시면서 찬성이더러 고등학생 때 학생회장을 하지 않고 서울대학교 법대를 가서 판사를 했더라면 더 나았으리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힘들지만 지금처럼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기는지 물었더니 그때 학생회장을 해서 이렇게라도 옳은 길을 찾으면서 살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성찬성의 생계수단은 번역노동이고 책을 약 삼백 권 번역했다. <야곱의 우물>이라는 잡지에 이년 동안 예수의 생애를 소설로 써서 연재하기도 했다. 모든 노동이 힘들겠지만, 번역노동도 꽤 지루하고 하기 싫은 일에 속한다. 그래도 아내와 두 아들을 먹여 살리고 가르치느라 지금도 묵묵히 번역노동을 하고 있다.

시골로 들어가 농사도 짓기 시작했다. 찬성이와 나는 번역하는 틈틈이 날을 받아 막걸리를 진탕 마시곤 한다.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어김없이 꺼내는 화두가 “왜 사요?”, “사랑이 무엇이요?”, “민중이 무엇이요?” 따위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이 든다. ‘삶’이 따르지 않는 ‘앎’은 속빈 앎이요 거짓 앎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과 가족과 경쟁사회를 핑계로 ‘아는’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아내와 아들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진정으로 위해주고 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나와 같은 번역노동을 하면서도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죽을 준비를 착실히 해가는 성찬성이가 고맙고도 부럽기만 한 수호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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