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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에 뜬 연꽃"의 비의(秘儀)

 

 

                                                                          [서강학보 1996.5.8]

 

서강대학교의 교육이념을 이루는 그리스도교는 한 마디로 '죽음의 종교'이다! 이 말이 의아하거든 서강대 강의실마다 걸려 있는 십자가, 교내를 오가는 예수회원들이나 수녀들의 가슴께에 붙어 있는 금붙이 십자가를 보라! 십자가는 로마인들에게 치욕적인 죽음의 상징이었고 제일 잔인한 죽음의 형틀이었다! 그뿐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로, 나사렛 사람 예수가 인류를 구하는 구세주가 된 것은 신의 아들이라는 품위 때문도 아니고, 기적을 행하던 위력 때문도 아니고, 고결한 인품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그의 죽음 때문이었단다! 죽음에서 구원이 오다니! 죽음이 무의미해지면 삶 전부가 무의미해질 터이므로, 그들은 자기네 신이 죽음이라는 신비에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나 보다.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죽음의 복음'이라고 일컫는다.

 

1963년 6월 11일, 사이공 판딘그풍 거리에서 칠순이 넘는 틱 쾅 둑 스님이 월남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표시로 분신자살을 감행하였고, 월남이 패망하기까지 10여년간 잔학한 전쟁에 항의하는 뜻으로, 인도지나 반도에 평화 회복을 기원하는 희생으로 월남  승려들의 분신이 연달아 일어났다. 불교도들은 그것을 '불바다에 뜬 연꽃', 화중련(火中蓮)이라고 불렀다. 월남전 당시 반정부 투쟁을 영도하던(최근에 한국을 다녀갔다.) 틱 나트 한 스님은 그 당시 전세계 언론 앞에서 스님들의 분산을 대강 다음과 같이 풀이해 들려주었다.

 

"이것은 스님들이 수계(受戒)할 적에 자기 몸에 뜸질을 하면서 중생제도에 목숨을 걸기로 서원하는 의식, 연비(燃臂)에서 영감을 얻었으리라. 혹은 중국에서 민간설화로 전해오는 대로, 전란과 훙년이 휩쓸 때에 백성을 위해서 고승이 자기 몸을 산채로 화장하여 바치던 의식 - "금강좌(金剛座)에 앉는다."라고 했다-에서 연원한지도 모른다. 스님들의 죽음은 10여년 내전으로 월남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세상에 호소하는 행동이고, 자기를 불사른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말이 참으로 중대하다는 메시지이리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행(行)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분신자의 고(苦)에는 민중들의, 동포들의 고(苦)가 들어 있으리라."

 

그 작은 육체가 불길 속에 숨끊어지는 순간, 인간은 아마도 육체라는, 좁다란 시공점을 벗어나서 원래부터 지향하던 전우주적(全宇宙的) 세계 관계를 실현하고서 우주 깊숙히 들어가리라. 그리하여 다른 영육체들의 생명의 뿌리가 되며, 인류의 역사를 좌우하는 공동규정소(共同規定素)로 변하여,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서는 조국의 민주화와 번영과 통일에 이바지하리라.

 

같은 불교문화권이어선지 몰라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부터 시작해서 현대 한국사에는 수많은 분신자결이 있었다. 1992년만해도 12명의 젊은이들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한다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결하였다. 천주교신자만도 조성만(요셉)군의 투신자살과, 박승희(아가다), 이정순(카타리나), 유재관(루카)의 분신자살이 있었으므로, 천주교 내에서 그들의 죽음을 해석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자살자에게는 교회 예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지 못하게 금하던 천주교의 법조항(구교회법 1240조)이 80년에 삭제된 취지를 살리고, 죽은 이들의 이타적 의향과 신의 자비를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이 수습된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소위 문민정부가 중반기를 넘기는 금년에도 4월 6일 진철원군(경원대), 4월 16일 황혜인양(성균관대), 4월 19일오영권군(여수수산대), 같은 날 안미옥씨(37세)의 분신자살이 발생하여 '잔인한 달 4월'을 맞는, 양심 있는 지성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노수석군(연세대)의 죽음, 권희정양(성신여대)의 죽음에 뒤따르르는 이러한 비극에 당면하여, 평소 청년들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마저도 우려를 금치 못하였다. 제자들이 대학 캠퍼스 안에서 스스로 기름을 끼얹고 죽어가는 현장에 접하면서 일부 교수들이 젊은이들에게 자제와 숙고를 권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하였다.

 

필자의 논지에 서강인들이 얼마나 공감할른지 모르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리를 눈여겨 보도록 호소하면서 무고한 젊음들의 산화를 만류하고 싶다.

 

첫째, 젊은이들의 분신에는 절망이 서려 있다. 분신하는 이들은 문민정부의 기만적 개혁정책, 차단된 남북대화, 국민의 표변하는 사회의식, X세대로 성장하는 동년배 청년학생들의 자세를 한탄하는 듯하다. 그러나 절망에는 패배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청년들도, 민중들도 절망하는 사람들 뒤에는 줄을 서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민중은 승산 있는 사람들, 적어도 희망찬 무리의 편에 선다!

 

둘째, 젊은이들의 분신하는 불꽃 때문에 국민이 정작 분노해야 할 적이 가리워져 버린다. 이한렬군이나 강경대군의 죽음에는 죽인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 국민이 증오할 적이 드러난다. 그런데 자살에서는 그 죽음을 몰고 온 원래의 적은 숨어버리고 희생자만 돋보이기 때문에,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과 심지어 미움을 자아낸다.

 

셋째, 젊은이들의 분신은 동지들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황혜인양의 경우 유서를 통해서 자기의 죽음이 "대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위해, 현정권에 대한 대중의 의식이 변함있기를 바라면서" 바쳐지는 희생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민족의 질곡을 헤치고 역사의 수레를 끌어온 황양의 동지들은, 그처럼 극단적이고 처절한 메시지가 없이도 꾸준히 투신하고 투쟁할 만큼 단련되어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끝으로, 인간의 생명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지고한 목적이다. 수년전 서강대에서 일어난 강기설씨 분신을 계기로 박홍 총장의 '어둠의 세력' 지적 발언과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 논리가 대중의 공감을 산 연유를 숙지해 보아야 하리라.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는 이들도 다름 아닌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투신하고, 특히나 이 땅의 가난한 민중의 생명을 살리고 더욱 풍족하게 만들겠다고 투쟁하는 것이 아닌가?

 

누가 그랬던가? "이데올로기의 악마는 쳇바퀴를 돈다"고? 문둥병이 무서운 까닭은 나균이 피부의 통각(痛覺)을 없애버리는 데에 있다. 통각이 없으므로 손가락이나 발가락, 눈이나 코에 질병과 상처가 생겨도 신체가 반응하지 못하여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멀고 코가 썩어 문드러져도 미처 모른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서 보아 왔듯이,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나병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람들은 제주에서, 지리산 자락에서 동포인 남녀노소를 무수히 학살하고도 공훈처럼 자랑해왔다.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학살을 두고 노태후씨가 "그까짓 몇 백명 죽인 것 갖고서 왜 그리 소란이냐?'던 강변이 대표적이다.

 

우익의 보수주의자들이 걸린 이데올로기의 나병이 역겹거든,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과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고 투신하노라는, '아름다운 청년들'만은 이데올로기의 문둥병에 걸리지 않기를 빈다.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스스로 그 정치체제를 포기한 세계사상 초유의 용단이 어디서 나왔는지 숙지할 일이다.

 

젊은이답게 사회악을 응시하라! 그리고 노려보라! 제아무리 상황이 암울하더라도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돌려버리지 말라! 분노해야 할 때 울지 말라! 그러나 여러분이 서강에서 접하는 나사렛 사람, 그가 체현한 역사의 법칙이 하나 있다. "남들을 살리는 자는 자기가 죽는다!" 단 악인들의 손에.

 

(서강학보 199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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