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하느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正義 1989.6 제4호]
6․25! 기성세대에게는 치가 떨리는 악몽이다. 얼마나 많은 겨레가 그 수년간 목숨을 잃었고 불구가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향을 잃었던가! 그들에게는 남은 인생 전체가 한과 슬픔과 가난과 불행으로 엮어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면, 자기 인생과 민족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좀 다른 눈, 신앙의 눈으로 보고자 노력하는 그 점이 아닌가 한다. 40년의 거리를 두고 저 엄청난 민족상잔의 비극을 어떤 눈으로 돌이켜볼 수 있을까?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신 것처럼, ‘괴뢰군의 남침’과 강대국들의 세력다툼만으로 전쟁이 터진 것처럼 볼 수만은 없다.
“내가 바라보니 …… 야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거룹들 위에 멈추셨다. ‘너희는 이 도성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거리거리를 시체로 더럽게 만들었다. 너희가 무서워하는 것은 칼, 내가 적군을 너희에게 불러 들이리라. 내가 너희를 이 성에서 끌어내어 적군의 손에 붙이리라. 이렇게 너희를 심판하리라.’ 말씀이 끝나자 거룹들이 날개를 펴는데 그 거룹들 위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다. 그 야훼의 영광이 도성 한가운데서 떠올라 동쪽 산으로 떠나갔다.” 자기 나라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예언자 에제키엘이 본 환시다(에제 10~11장).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버리자 그 민족은 멸망한다.
1945년, 미소가 짜고서 이 나라를 두 동강내어 점렴한 다음에 각기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다. “저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이니 죽여 없애라!”던 이북이나 “저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니 가서 죽여라!”고 하던 미군정이나 이 땅을 무죄한 사람들의 피로 철철 넘치게 만들었다. 남쪽만 해도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대구에서, 서울에서 무수한 동족들이 사상이 어떻다 하여 학살당했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 무죄한 사람들이 죽는 곳에서는 어디나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비명이 있고, 그 악이 찰만큼 차면, 하느님은 그곳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죄벌로 보내시는 듯하다. 그래서 6․25 전쟁은 악마적이면서도, 해방 후 한반도에서 저질러진 민족의 범죄를 치시는 하느님의 채찍이 그 안에 보였다.
그 전쟁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지난 30년간 남쪽의 한국인들은 전쟁만 안 일어난다면야, 무슨 짓을 당해도 좋다는 심경으로 살아왔겠는가? 안보만 내세우면 독재자들이 무슨 짓을 해도 참아냈고, 빨갱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아무리 무죄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해도 입을 다물었다. 40만 군대니 미국군이니 핵무기만 있으면 되지 하느님이니 정의니 하는 것은 없어도 된다는 태도였다.
그러다 불의와 죄가 가득하면 하느님이 일순간에 만사를 뒤집어 엎으신다는 것을 잊고 만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들, 가난하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짓밟히고 희생당하는 땅에서는 민중의 마음이 떠나고, 민중의 마음이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영광도 떠나버린다. 그것은 전쟁과 멸망을 뜻한다. 6․25의 종교적 메시지가 이것이 아니가 한다.
(정의 1989.6 제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