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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식을 행하여라"와 "이것을 하여라"

 

                                                                                             [正義  1989. 2. 4]

 

 

“여보, 들어와 앉지 못해요?”

“아니, 왜 그러는 거야?”

“잔말 말고 들어와요!”

“왜 그래? 내 참…”

행렬에 끼어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강단 있는 아내가 기어코 소매를 잡아끌어다 자리에 앉혔다. 부인은 이어서 미사 수건을 가다듬고 남편이 섰던 줄로 들어서면서 남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다.

“고따위 짓을 하고 와서 성사도 안 본 주제에 영성체라니…”

 

필자가 어느 본당에서 목격한 장면이지만 비슷한 일을 보거나 겪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면 우리는 잘 아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앞에 나온 이야기대로라면 그 부인에게 남편은 "죄인"이다. 낚시 간답시고 주일미사를 빠졌는지, 술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장면을 소갈머리 없이 아내에게 자백하였는지, 더 심한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나, 하여튼 그는 죄인이고 따라서 아내가 지켜보는 데서 고백성사를 본 적이 없으니 영성체를 할 자격이 없다.

 

방금 인용한 고린도 전서를 펴서 11장 17~34절까지를 읽어 보았다.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나누는 식사는 주님의 성찬을 나누는 것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20절)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28~29절)

 

그런데 이상한 것이 사람이다.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 해도 우리가 읽고 싶은 말씀만 눈에 띄나 보다. 전에도 고린토서를 읽다가 위의 구절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양심성찰을 하는 나였다. 누구에게 욕을 했는가? 누구와 추잡한 짓을 하였는가? 주일미사를 빠뜨린 적은 없는가? 기도할 때에 분심이 들었는가?

 

헌데 그게 아니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은 개인의 사생활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미사참례가 불경죄가 되는 까닭이 나의 추측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조심해서 성경을 읽으면 엄청난 대목이 나온다.

 

“여러분은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각각 자기가 가져 온 것을 먼저 먹어 치우고 따라서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술에 만취하는 사람도 생기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까?”(21~22절)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 착취하는 고용주와 착취당하는 노동자, 부자와 가난한 자, 구사대와 부상자, 고문기술자와 고문당하여 불구된 자가 한 성단 안에, 한 제단 앞에, 한 장궤틀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다면 그것은 죄악이었다! 성경 이 대목에 이런 말씀이 다 있었다니……

 

술집이나 윤락가를 다녀오면, 돈 몇 푼으로 한 여자를 유린한 사실보다는 내 몸이 더럽혀지고 고백성사 깜이 생긴 것이 더 후회스럽다. 아랫것들 월급보다는 하느님께 올리는 헌금이 더 중요했다(“장사도 하느님을 상대하는 장사만큼 잇속 있는 장사 없습니다” 하시던 강론 말씀). 빨갱이면 무신론자고, 무신론자는 씨를 말리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일 테니까 안 부는 놈들이야 고문 좀 하면 어떤가?(그래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도의 엄한 말씀은 그게 아니었다. 어쩌다 색맹이 색글씨 읽듯이 성경을 내 멋대로 뽑아 읽어 왔을까?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24절)

 

미사 때에 일만 번을 넘게 들어온 이 대목을 원문이나 다른 나라 말과 견주어 보니까, 공동번역성경이나 미사경본에 나오는 "이 예를 행하여라"가 본문이 아니고 "이것을 하여라"였다. 간단한 것 같지만 두 마디는 뜻이 사뭇 다른 것 같다.

 

"이 예식을 행하여라!" 얼마나 지혜롭고 고맙고 편한 말씀인가? 허나 원문대로 나오는 "이것을 하여라!"는 말씀은 영 내 구미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주교님들과 성서학자들께서 얼마나 마음에 들게 성경을 다듬어 놓으셨는가! "이 예식을 행하여라!"는 구절은 모두 하느님하고 나하고 일대일로 시작하고 일대일로 끝이 난다. "미사를 올려라", "제사를 바쳐라", "주일에 시간 있을 적에, 차려 입고, 차에다 처자식을 싣고, 성당에 가서 성스러운 예식을 거행하고, 헌금을 하고, 좋은 말씀 듣고, 영성체하여라." 요컨데 문제는 나의 구원이요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다.

 

내 회사 직원들? 다른 회사가 주는 만큼은 나도 준다. 구사대가 어떻다고? 교회사업체도 구사대로 자위를 하는 마당에 나만 앉아서 망하라는 말인가?

 

내가 거짓말로 신문에 갈겨쓰는 기사나 특집은 켕기는 바 없지 않지만, 어디 나 혼자뿐인가? 알아 듣는 사람은 알아 듣는다구! 나의 데스크에서, 나의 도장으로 처리되는 저 모든 공무와 결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 당, 우리 회사, 우리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다.

 

국민이 거덜나고 서민이 수탈당하고 국토가 오염되고 교육이 패한다고? 엄청난 부정과 치부를 한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모아두지 않으면 난 늙어서 어떡하라고? 누구나 다 하는 짓 아닌가?

 

나는 "고위층" 하고 해결한다구! 하느님하고 말이야. 그래서 꺼림칙한 것이 있을 적에는 고백실에서 깨끗이 해결되는데 뭐가 문제란 말야?

 

그래서 나의 경건한 시선과 온 신심은 제단 위에 놓인 밀떡, 금잔 속에 든 붉은 포도주로 집중된다. "성체만 쳐다 보아라! 사람들을 보지 말라! 분심꺼리다. 내 옆에 어떤 교우가 무슨 행색으로, 얼마나 누렇게 병든 얼굴로, 얼마나 시름 겨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지 무슨 상관인가?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구. 제가 아니면 제 부모가 게으르고 가난하고 주변머리가 없었겠지. 저것들을 보면 괜히 짜증이 난다. 적어도 주일날 성당의 이 경건한 자리에만은 저렇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군상들은 안 보였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이것을 하여라!"는 말씀은 심기를 대단히 불편케 하는 것이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이것을 하여라"고 하신 말씀이라서다. 당신은 곧 잡혀 죽어야만 하는 참담한 사정이었다. 그런 절박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에 나를 끌고 들어가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당신이야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나는 처자식 건사하고 입에 풀칠하기 바쁜 인생 아닌가?

 

“빵을 쪼개시고”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하여라" 하셨다니 나도 내 먹을 빵을 쪼개어 내놓아야 한다는 소리로 들린다. 먹고 남은 거야 나도 남 줄 줄 안다구! 하지만 내 먹을 밥그릇을 누가 감히 넘보기만 해봐라….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하여라”(25절)는 말씀에서 뜻이 더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 24)는 구절하고 합하면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양형영성체를 하는 경사로운 기회가 있을 적마다 성스러운 영약을 복용하듯이 정성껏 마셨는데…….

 

가난한 사람이 어쩌구, 민중이 어떻구 민주화니 통일이니 하는 자들과 상종하면 대개 뒤끝이 좋지 않단 말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나는 피를 흘린다.” 그러니까 너도 "이것을 하여라"는 말씀 아닌가? 모두를 짓밟고 희생시켜서라도 당신의 밑거름을 삼아 출세하실 줄 알았는데, 주님 당신이 죽어서 썩는 밀알 되시고는 너희도 "이것을 하여라"고 하신다. 그래도 내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이만큼이라도 출세한 것은 하느님 축복으로 알았는데,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시고는”(필립 2, 7) "이것을 하여라". 사회의 온갖 쓰레기들을 주변에 모아들이시고 그 죄 때문에 당국자들에게 사법조치(내가 재판장이었더라도 그분은 사형감이었다!)를 당하시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나한테까지 "이것을 하여라" 하시는가!

 

태중교우니 어쩌니 하면서도 참으로 오랫동안 나는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셔 온 셈이다. 내 영혼의 보약 먹듯이 영성체해 왔는데, 성체성사는 남과 살고 남 위해 사는 법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니!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는 바울로 사도의 엄포가 고막을 울린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正義 창간호 1989.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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