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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泉盛과 A. 피어리스의 종교신학(下)

      亞 신학적 소재는 종교심과 빈곤

 

                                                                        [가톨릭신문 1988.5.15]

 

            이 글은 성염씨가 1987년 10월 31일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와

           1988년 4월 23일 가톨릭문화연구원에서 각각 행한 강연을 간추린 것이다.

 

아시아 신학에로의 전위

 

그러면 아시아의 신학적 소재는 무엇인가? 송천성은 "아시아인의 심성과 고난"이라 부르고 피어리스는 "아시아인의 종교심과 가난"이라 부르니 결국 두 사람은 아시아의 뿌리 깊은 정신 문화 또는 영성(鹽性)과 아시아 태반이 겪고 있는 빈곤이나 사회적 불의라는 두 기둥 위에 신학을 세우려고 한다.

 

이곳의 종교는 피안의 해탈을 도모하는 초우주적 종교심과 현세적인 구원을 찾는 우주적 종교심이 공존하고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로 합류되어 있다. 가난 혹은 고난의 문제에서도 수행자들에게서 보듯이 자발적으로 가난을 받아들이고 깨달음[般若]을 찾으면서도 결국은 중생의 고난에 참여하고 투신해온 종교사적인 구제의 역사가 엄연히 있다. 사회적으로 강요된 가난 속에서 민중은 종교적인 영감을 받아가면서 거기서 해방되려는 꾸준한 투쟁의 역사를 전개해왔다.

 

세일론의 농촌 사회주의, 중국의 역대 민중봉기와 혁명의 역사가 그 예이다. 마르크스주의도 서구적인 모델을 딴 개발주의도 결국은 서구 중심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만큼 아시아의 해방에는 궁극의 기여를 못한다.

 

여기서 피어리시는 세일론의 불교적인 분위기를 전제로 수행종교와 민중신앙을 둘 다 살리면서 이론을 존개하려는데 비해서 중국인의 실리주의가 몸에 익은 송천성은 종교 엘리트의 사상 또는 경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민중의 감각과 언어에 담긴 염원과 체험을 신학으로 풀이하는 작업으로 떠나간다.

 

그래서 송천성의 시도는 상황신학이 되고 민중신학이 된다. <아시아 이야기신학>은 민중의 언어 곧 민담에 실린 하느님 체험과 인생 체험을 풀이한 것이며 곧 간행될 <아시아 자궁(子宮)으로부터 나오는 신학>은 고대와 현대의 시가(詩歌)에 서린 백성의 한(恨)과 희로애락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해독하려는 작업이다.

 

평범한 삶의 상황에서 하느님의 구속적 사랑을 발견하는 예화로 성모의 마니피캇을 들고 우리의 아리랑에서 갈바리아의 상여 노래를 듣는 그의 신학적 감각에 독자는 경이에 가까운 탄복을 느낄 것이다. 머리의 신학 보다 마음의 신학(以心傳心의 신학)을 하려는 그는 종교 지성인보다도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

 

두 번의 세례

 

송천성의 모든 글과 저서는 그 후반부가 반드시 해방신학이 된다. 민중이 처한 고난과 불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곧 하느님의 언어요 은총이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그곳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대면하면서 성서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송천성(그리고 피어리스)은 아시아의 사회 - 정치와 이데올로기 대립에 대해 아시아 영성의 언어를 성서와 함께 사용한다.

 

같은 이야기를 피어리스는 "두 번의 세례"라는 비유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교회가 단순히 아시아에 자리 잡고 있는 교회(그의 말대로 ‘서방 총대주교좌 아시아 지부’)로 남아서 뿌리 뽑혀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토착화) 모습을 벗어나려면 "아시아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 주님의 행동방식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분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을 본따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아시아 종교심이라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 대륙의 수십억 빈민들 사이에 끼어 수행종교들의 초우주적인 영성과 소박한 민중의 우주적 종교심이 한데 합류하는 지점에서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적인 신원(身元)을 상실하고 진정 아시아의 지역교회가 되는 길이다. 아울러 아시아의 가난한 갈바리아에서 세례 받아야 한다. 어느 종교도 하느님 나라의 표지일 수 있고 그 나라를 가려버리는 반대-표지(Counter-sign)일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종교의 진면모를 보이는 길도 그것이 과연 유신론(有神論)이냐 아니냐, 그리스도가 구세주냐 불타가 구세주냐는 토론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현상 앞에 그 종교가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아시아에서 종교의 권위는 가난과 결부된다. 그리스도교가 맘몬과의 결탁을 끊고 자발적으로 가난하든, 강요에 의해서 가난해졌든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었을 경우에만 저 백인대장의 입에서 나온 고백을 듣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그는 당대의 정치집단과 종교계가 결탁하여 가난한 의인, 스스로 가난해지고자 투쟁하였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투쟁한 의인을 제거한 정치적 살인에서 하수인 노릇을 한 사형집행관이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명제는 고다마가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는 명제와 동일하게 일정한 문화권에서 나온 초논리적인 신조이다. 따라서 그 선언의 신빙성은 신학적 논증에서 오지 않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신앙으로 그 명제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상대로 하므로) 선포하는 사람들의 증언에서 온다. 예수가 구원자(해방자, 제도자)라고 하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과 그의 주변에서 해방(해탈, 자유)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언(martyrium)이라야 한다.

 

만일 아시아에서 예수야말로 유일한 구원의 중재자라고 주장한다면, 그 유일성이 다름아닌 십자가 사건, 맘몬과 투쟁하다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고 처형당하는 모습에 있음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체현(體現)하여야만 한다. 송천성도 피어리스도 아시아신학의 기조어(基調語)는 "구원"에 있다고 한다.

 

자기교의 창시자가 구원자라는 주장은 어느 종교나 할 수 있으며 다만 누가 과연 구원자인지 인정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끝까지 현장에서 지켜보는" 아시아인들, 가난한 아시아의 민중이다.

* * *

선교든 토착화든 타종교와의 대화든 결국은 우리의 자세, 자기 방어나 침략의 무장을 벗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동쪽에서 박사들이 찾아와 성문을 두드리기까지 주님이 탄생한 사실마저도 모르고 있었던 예루살렘처럼, 그리스도교도 아시아 문화와 접하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나 다른 서양 선교사가 아니라 아시아인이요 한국인인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 수천년 역사를 통해서 우리 조상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해 오신 그 거룩한 산 밑에서 살고 있다. 저기 떨나나무가 불꽃이 이는데도 타 없어지지 않는다. 힌두교, 마호메트교, 불교, 도교, 민중신앙은 우리 기대와는 달리,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착각을 하지 말자.

 

만일 우리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는, 모세만큼의 겸손이나 한국인다운 뿌리가 있다면, 거기서 우리는 우리 귀에 친숙하고도 놀라운 음성을 듣게 되리라는 것이 아시아 신학자 송천성과 피어리스가 우리에게 건네주려는 메시지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가톨릭신문, 198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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