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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 속의 구원과 절망

 

                                                                              [경향잡지 1996.4월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망하고…

 

“얼마 전 한국인 실업가 두 사람이 필리핀 마닐라 공항 트랩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같은 비행기에서 내리던 필리핀 청년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몰매를 때렸다. 즉시 출동한 공항경찰대는 한국인과 필리핀 청년들을 연행하였는데, 필리핀 청년들이 한국에서 취업기간 중 당한 학대와 모욕을 얘기하자 이번에는 경찰마저 합세하여 한국인들을 다시 두들겨 팼다. 한국인들은 마닐라 주재 한국대사관에 호소하였으나 결국 강제 출국 당하고 말았다.”

 

외국인 노동자들한테 ‘무서운 나라, 추악한 한국인’으로 소문나면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곳곳에서 이런 봉변을 당하고 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현장이 전세계 신문과 텔레비전에 대문짝만하게 나간 뒤 한국 기업인들은 어디를 가나 부실공사의 주범으로 지목당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 <뉴스 위크> 등에 노태우, 전두환씨의 얼굴이 표지로 나오고 세계 사상 최고의 부정축재자로 소문나면서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서나 얼굴을 들지 못한다.

 

사순절과 부활절을 맞을 적마다, 신앙이 미약한 필자의 심중에 맴도는 커다란 의문이 하나 있었다. “한 사람의 범행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단죄에 이르게 된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생명의 의로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로마 5, 18) 바오로의 이 말씀이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까닭이다.

 

우리 조상 단군의 전설처럼,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인지 신화인지도 모르는 아담과 그의 "사과 도둑질" 하나로 말미암아 한민족 창녕 성씨 가문에서 난 내가 원죄를 쓰고 태어났다니 말이 되는가? 2000년 전 저 팔레스티나 한 구석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사람 예수의 죽음이 20세기의 한국인인 내 죄를 씻어주고 영원한 구원을 준다니 그게 될 법인가? 인류를 지어내신 한 분 하느님, 그 하느님이 정하신 한 분 구세주를 믿더라도 수긍하기 힘들던 교리가, 국제무대에서 당하는 한국인의 수난을 듣고 보면서 피부에 와 닿았다. 우리는 한 겨레여서 한 사람의 잘잘못으로 구원받고 망하는 신세이다.

 

우리 곁을 지나가시는 하느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일찍이 “내 곁을 지나가 버리시는 하느님이 나는 무섭다!”고 고백하였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신자라면 누구나 자기는 굶주리고 헐벗고 울고 신음하는 사람을 돕고 싶다고, 무죄하게 옥에 갇히고 정의를 위하여 힘쓰는 사람을 아끼고 돌보겠다고 마음 먹는다. 우리 누구나 자기는 이 땅이 조금 더 정의로워지기 바라고, 없는 사람들도 사람대접을 받고 살기 바라며, 배고픈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나라가 되기 바란다고 한다.

 

4년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선거는 우리가 실제로 나라와 겨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불의와 부정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중대한 기회처럼 보인다. 사실 선거 때마다 주교님들이 내리시는 가르침대로 4월은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이며 우리나라의 역사에,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매우 중요한 시점이리라.

 

이 땅의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일어나느냐, 더 절망적이고 불의한 정권과 정치로 내닫느냐를 내 한 표로 결정해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영원히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을 주교님들이 거듭하셨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투표하러 가는 일은 신앙인으로서의 본분으로 여겨진다. 한국처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국민이 참여할 기회가 없는 나라에서 이런 기회마저 포기하는 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이 나라 구원의 기회를 놓치는 일로 여겨진다.

 

"그들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감당하겠습니다!"

 

한국 갤럽 조사연구소가 지난 2월 16일 발표한, ‘직업인들에 대한 윤리 수준 평가’에 따르면 자랑스럽게도 우리 신부님들이 ‘이 땅의 가장 정직한 직업인’(62.6%: 그 다음은 교수 48.1%)으로 나타났다. 그 반대로 국민이 ‘가장 정직하지 못한 직업인’으로 꼽은 사람들은 우리가 오는 11일에 뽑아야 하는 국회의원(7.7%: 그 다음은 대기업 사장 8.6%)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는 몇 해마다 한 번씩 투표를 해왔다. 우리 각자가 무슨 명분으로 어느 정당 누구한테 투표를 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만, 역사에 나타난 결과는 4천 억을 도둑질한 대통령과 7천 억을 도둑질한 대통령이 쇠고랑을 차고 재판을 받는 중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았고, 5․18 내란을 일으켜 광주에서 몇 백 몇 천의 시민을 총칼로 도륙한 살인자들이었다.

 

우리 믿음대로 내세가 있고 하느님 심판이 있다면, 우리가 찍은 투표에 따라서 그들의 도둑질과 살인죄를 함께 뒤집어쓸 것이 뻔하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우리도 그들에게 투표하여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뚫고 들어왔다.”(로마 5, 12 참조)

 

우리 기억에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사고,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와 그 희생자들이 있다. 평화의 댐이니 율곡사업이니 몇 십 개 골프장이니 4천 억이니 7천 억이니 선거비자금이니 하는 도둑질이 있다. 방금 말한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과 광주시민 학살이라는 범죄가 있다. 우리 신앙인은 ‘내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면서 하느님 앞에서 이 땅에서 저질러진 죄악을 통회하고 보속해야 하리라. 그러한 악을 자행해 온 사람들과 그 정당과 그 정당의 후보자에게 다시 투표하는 신앙인은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모든 악을 하느님 앞에서 뒤집어쓰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리라.

 

국회의원 당선자와 그 정당이 앞으로 저지르게 될 부정과 악행에 대해서도 하느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하리라. 만일 내가 대접이나 돈봉투를 받고서 누구를 찍는다면, 나는 내 투표로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고 세기적인 도둑들과 한 패가 되는 것과 다름없겠다. 만일 내가 지방색이나 옹졸한 정치색에 눈멀어, 학살자들과 그 패거리에게 투표한다면 광주 시민의 무죄한 피를 내 손에 묻히는 범죄가 아닐지 모르겠다.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오?

 

이 나라 이 겨레를 지켜주는 것은 반공과 군대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신앙인은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온갖 흑색선전과 모함, 선거철마다 국가 공안기관이 만들어 발표하는 간첩단 사건 따위는 무시해 버려야 하리라. 뚜렷한 증거도 없이 어느 당이나 후보를 좌익용공이라고 퍼뜨리는 선전에 속아넘어 갔다가는, 우리도 성금요일에 예수님을 두고 “죽여라! 죽여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고함지르던 무리에 끼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천주교 신앙여부를 떠나서, 우리 국민이 가장 잘 떨어지는 잘못이 있다면 선거 때마다 되살아나는 "지방색"이다. 그런데 필자는 예수님이 지난 성금요일에 처형당하신 이유 하나가 그분의 출신지 때문이었음을 깨닫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예수님은 출신지가 안 좋았다. 저주 받은 땅 갈릴래아 출신이었다. 요한복음 7장 40절부터 52절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지도층에서 예수를 없애기로 결정할 때, 예수의 목숨을 살리려는 소수의견을 눌러버린 것은 예수의 출신지 문제였다.

 

예루살렘 당정협의회에서 “우리의 율법에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또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알아보지도 않고서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소?”라는 반론이 나오자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7, 52)라고 묵살하고 예수 처형이 결정된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판단기준이 되었다. 예수는 우선 출신지가 안 좋았다. 가난하고 반골이고 주는 것 없이 미운 갈릴래아, 그것도 나사렛 출신이었다.

 

구원과 멸망은 한 표 차!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성막을 짓고 난 다음, 모세는 그 장막 속에 들어가서 단독으로 야훼 하느님을 뵙고 명령을 받는다. 며칠 후 우리는 투표소의 휘장 속에 들어갈 것이다. 거기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 않는 휘장 속에서 투표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과 마주서리라. 그리고 하느님만 지켜보시는 가운데 우리 속마음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인지, 하느님의 뜻, 우리보다 못살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는 뜻을 실천하는 사람인지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기회가 되리라. 정말 나와 이 한국 사회의 구원과 멸망은 거기서 우리가 찍는 한 표에 달려있을지 모른다.

(경향잡지 1996.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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