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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우리

 

                                                                          [경향잡지 1995.3월호]

 

 

불의한 사회는 대규모 강도떼

 

알렉산더 대왕이 해적 하나를 붙잡아 ‘무슨 의도로’ 바다를 노략하고 다니느냐고 문초하였다. “그것은 당신이 온 세상을 노략하는 의도와 같습니다. 다만 저는 작은 배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하므로 해적이라 부르고, 당신은 큰 함대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하므로 황제라고 부르는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그의 『신국론 (神國論)』에 실어둔 일화이다.(4.4) 그래서 성인은 정의(正義)가 서지 않는 국가는 규모가 거대한 강도떼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강도들끼리도 의리와 공생의 원칙은 있다. 쿠데타와 학살로 정권을 잡아온 무리도, 3당 야합으로 정권을 잡은 무리도 끼리끼리는 신의를 지키고 그게 어긋나면 'TK 정서’니 ‘자민연합’이니 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법이다.

 

‘떨어진 도덕성’이라는 제목에서 이 글을 읽을 교우들은 무엇을 머리에 떠올릴까? 지존파, 온보현, 증인 살해, 한약상 부모를 죽여 불태운 박한상? 인천 세무비리, 성수대교 붕괴, 서울 아현동 가스 폭발? 정치적으로는 12․12 주범자들에 대한 기소유예, 용두사미로 끝나는 엄청난 정치자금의 비리?

 

이런 사건에서 양식있는 사람들이 법망만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상선벌악을 믿노라면 종교인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도 당연하다. 한스 큉 신부도 세계평화와 기아와 공해문제는 세계의 대종교들이 나서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고 설파한다(세계윤리구상, 안명옥 역, 분도출판사, 1993). 이 글 제목의 후반이 ‘회복시켜야 할 우리’라고 된 데는 까닭이 없지 않으리라.

 

세 가닥의 정의

 

실추된 사회도덕을 회복하는 근간은 역시 정의이리라. 현 교황의 말씀대로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며, 도덕적인 사회는 정의가 확립된 사회이리라. 삼강오륜이란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기성 세대와 새 세대,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민간의 정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에는 세 가지 정의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부정의(不正義)로서 지난 50년 동안 우리 국민이 체험해 온 한국의 정치와 사회 상황이리라. 지존파 젊은이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이가 무죄인데 왜 내가 유죄인가?”라던 피고인의 반문은 이 나라 정의를 비웃고 있다.

 

적어도 한국의 젊은 세대가 목격해 온 법정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였다! 이럴 경우에 세금은 ‘눈먼 돈’이요 ‘먹는 사람이 임자’요 ‘윗사람과 잘 나눠먹다 법망에 걸린 졸개만 되게 재수 없는 놈’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정의에 덜 물들었다는 사회적 통계는 아직 나온 바 없다! 마음 같아서는 법 없이 살아갈 선량들이지만 정작 본인이 집(성당까지 포함)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때면 한 뼘이라도 늘려 짓고 주차시설, 소방시설을 빼먹는다. 양도소득세나 상속세가 떨어지면 백방으로 손을 써서 감면받는다. 음주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서는 검찰, 경찰의 백을 총동원한다.

 

두 번째는 법정의(法正義)이다. 적어도 서구의 제일 세계에서는 사법상의 정의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어서,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면 탄핵당하고 대학생이 고문당하여 죽거나 경찰에게 맞아 죽으면 수상이 사퇴하고 정권이 무너진다. 운전자는 한밤중이라도 빨간 신호등 앞에서 정차하고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를 앞세우며 법은 지키고 규율은 존중한다. 약자는 보호받는다.

 

부정의(不正義)와 법정의(法正義)는 굳이 신앙심이 아니더라도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시비하고 식별할 수 있다. 중산층화하는 천주교도들이 무식해서 탈법하거나 부정을 저지르지는 않을 터이므로 불의를 느끼며 분개하거나, 사회부정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개인노력으로나 집단운동으로 사회를 정화하는데 참여하는 일이 가능하겠다.

 

그런데 세상을 살 만큼 살아보면 “참다운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창건자요 통치자가 되시는 공화국”(신국론 2. 21)에서만 구현되리라는 현실적인 깨달음에 이른다. 우리가 사회에서 실현할 수 있는 정의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예시하는 희미한 빛이요 그 나라에 다가가려는 힘겨운 노력에 불과함을 지각한다. 여기서 신앙인은 세 번째로, 하느님의 초법정의(超法正義)에 눈뜬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정의가 나타났다”(로마 3, 21)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던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로마 5, 8)는 점이다. 우리가 지은 죄를 뉘우친 다음도 아니고, 우리가 그만큼 착하게 된 다음도 아니고,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하느님의 ‘정의’란다. 하느님의 정의는 자비이다! 쉽게는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겨야 할 줄 몰랐더냐?”마태 18, 33)는 교훈으로 나타난다.

 

하나 받으면 하나 주는 ‘교환적’ 정의,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는 복수에서 한걸음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정의’를 알아듣고 수긍하고 실천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한국사회의 파괴된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요한 바오로 2세, ‘자비로우신 하느님’, 1980).

 

자비로운 정의

 

미국 로키산맥에 사는 방울뱀은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독사라는데, 이 독사가 상대를 만나면 맨 먼저 상대방 눈에다 독을 쏘아 뱉아서 눈을 멀게 한단다. ‘죄’를 표시하는 성서의 동사는 언제나 ‘과녘이 빗나가다’ 다시 말해서 ‘착각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죄악이 인간에게 가하는 해악은 인간의 지성을 눈멀게 하여 사물을 제대로 못 보게 만들고, 하느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에서 정조준(正照準)을 못하게 방해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사회악을 극복하기는커녕 앞장서고ㅡ 성직자들이 불의를 불의로 인식 못하며, 교회기관들이 불의를 저지르면서 하느님의 영광과 정의를 도모하노라고 착각할 수 있다.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자비로운 정의를 행사할 만한 사례요 자칫하면 빠질 만한 맹목의 구제 사례를 하나 꼽겠다.

 

성숙한 신앙은 내 일신과 혈육의 영달을 비는 기복신앙(祈福信仰)도 아닐 테고, 이 풍진 세상에서 사치스럽게 마음의 평화나 찾는 안심(安心) 신앙도 아닐 테고, 아마도 자유(自由)의 신앙일 게다.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셨다”(갈라 5, 1)는 바오로의 선언을 믿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어째서 자유로운가? 그리스도인은 ‘사랑하기로’ 자유롭다! 그의 자유는 사랑으로 흘러들고 사랑에서 구현된다. 그가 자유로운 것은 남이나 무엇에 저지당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데올로기의 짐, 안보(安保)의 짐, 지역감정의 짐, 그리고 인간을 질식시키는 온갖 이기심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2고린 3, 17).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반공사상보다 주님의 영으로 살고, 지역감정보다는 민족 사랑의 영으로 살아간다. 신앙인은 손아귀에 쥔 기득권 놓칠까봐 “불안에 떠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다”(로마 8, 15).

 

문민정권 하의 제도언론이 ‘X세대’라는 허수아비를 써서 젊은이들에게서 ‘이념’을 앗아가 버린 다음, 필자가 대학에서 만나는 다수 학생들은 무엇 하나 진지하고 심각한 것 없고 책임질 만한 것도 없고 삶을 걸 만한 보람도 없는 잉여인생들처럼 보인다. 먹고 놀고 싸고, 그렇게 하면서도 줄잡아 출세하는 길이 이상처럼 보인다. 지난날 이념을 가진 젊은이들은 민족과 민주와 통일 등 사랑할 것이 있었고 학벌과 직장 그리고 목숨을 희생으로 바쳐가며 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데 모든 가치를 ‘썰렁하게’ 보는 이 얼빠진 세대에서 돈 없으면 지존파가, 돈 많으면 야타족이 나와도 이상할 것 없다.

 

반공과 안보의 우상을 털고 자유로운 도덕을 지닌 사람들만이 ‘총체적 부패’에 빠진 이 사회에서 함께 부패하지 않고 떨어진 도덕을 회복하는 누룩과 소금이 될 만하다. 선거를 맞아서 지역감정에 놀아나지 않고 책임 있는 처신을 할 만하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통일맞이 희년’을 회치는 사람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정의가 향하고 유지되는 목표”(신국론 19, 27) 하느님의 나라를 어렴풋하나마 겨레에서 보여줄 수 있겠다.

(경향잡지 1995.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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