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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해방과 신학 [경향잡지 1981.8]

조회 수 4226 추천 수 0 2010.07.15 16:39:55

인간해방과 신학

 

                                                                                   [경향잡지 1981.8월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평화의 왕’(한국 언론이 그렇게 불렀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총탄을 맞기 수주 전에 한 탄식이었다. 6월 24일, 노벨상 수상자 50명은 현세계질서를 “대학살(大虐殺)”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란 혁명, 월남과 크메르의 공산화 이후, 아프가니스탄, 엘살바도르의 살육, 북아일랜드 투사들의 단식투쟁, 스페인 바스크 지방… 우리 귀를 윙윙 울린 외신들이며 우리가 모르는 국제 사태들은 이 정의로도 부족하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았던 ‘흑사병’이 모스크바와 워싱턴을 발생지로 전세계를 덮어 왔지만 오늘날처럼 기승을 부린 적은 없는 것 같다. 콤스키가 “초강대국의 지배체제”라고 일컬은 냉전을 레이건이 재개하면서 세계는 과연 대재난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굴러 가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온 인류에게 퍼졌다.

 

작년에 세계가 쓴 군사비가 5천억 불, 작년까지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핵무기가 5만 개, 정규군 2천 5백만 명에 예비 병력은 5천만 명이란다. 현재 5억 인구가 굶주리며 그 중 5천만 명은 아사(餓死)하는 중이다. 1천만 명의 인류가 정착지를 잃고 피난민수용소에 갇혀 목숨을 잇고 있다. 그런데도 미․소는 군비경쟁을 계속하고 제3세계 정부들을 총칼 잘 만지는 군부독재로 전환시켜 군수산업으로 치부한다.

 

이처럼 어두워 가는 세계를 육감으로 느껴선지 우리나라에서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름이 붙은 “1999년 8월 15일 …” 하는 책자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교회와 성당들에 입교자가 초만원이다. 목자들도 양떼들도 넋을 놓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마저 희망을 잃어서야…. 하느님이 외아들을 보내 주실 만큼 극진히 사랑하신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실 만큼 사랑하신 세계다. 오늘도 세계 각처에서 무죄하게 참살당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울부짖는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무수하다. 예언자를 자처하면서 남산 언덕 아주까리 밑에 앉아 니느웨의 불기둥이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요나들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미국인 과학자들이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를 적(賊)이 뭐냐고 컴퓨터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 답은 “3S”였다. 이기심(Selfishness), 기아(Starvation), 어떤 질병(Some kinds of disease), 아마도 공해가 그것이다. 인간이 거기서 해방되어야 할 3대 원수가 과학적으로 규명된 셈이다.

 

셋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또 그들에 의해서만 퇴치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교가 진정 복음화된다면 이 해방의 기수가 될 것이다. 하느님과 메시아의 바른 모습을 보여줄 때 말이다. 구원과 애덕과 인간 완성의 온전한 모양을 제시할 때 말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로 골수에 박힌 정교영합주의와 서구적 패권주의를 탈피할 때 말이다. 가톨릭이 진정 그리스도교화된다면 이 해방의 복음을 펼 것이다.

 

현세와 후세, 성과 속, 영과 육의 이원사상, 체질화된 권위주의, 백인우월적인 식민사상 등의 껍질을 다 깨뜨린다고 하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이루신 인간답고 신적인 사랑의 공동체, 예언자의 무리, 왕다운 사제단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미 일기 시작한 성령의 바람이 교회의 증언을 통해 지구의 껍질을 홀랑 뒤집어 놓으실 것이다.

 

교회와 신앙인 개개인의 이 사명을 연구하고 일깨우고 충동하는 신학이 있다. 해방의 신학이다. 라틴아메리카를 배경으로 1960년대에 일기 시작하여 오늘날 교회의 신학으로 정착하고 있는 신학이다.

 

해방의 신학과 시비(是非)

 

이 신학적 안목이 제3세계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의식과 신앙의 성숙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 신학은 후세에서의 개인 구원만을 강조하다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외곡하게 된다고 본다. 인간의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인 해방을 이야기한다. 교회는 마술적으로 구원을 베푸는 신통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신앙과 전례에 해방의 인자(因子)들을 갖추고 있고 그것을 신앙인들에게 전수시킨다. 교회는 신자 수나 교회기관의 크기로 그 위대함을 볼 것이 아니라 해방교육을 실시하는 그 기능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푸에블라 문헌).

 

세계에서는 역사를 초월하는 초자연 질서와 역사 안의 자연 질서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은총이 인간들을 초자연계로 들어올리고 동시에 역사 과정에서 인간 운명을 개척하는 수단을 인간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해방신학만큼 교회 안팎에서 시비가 큰 화제가 없다. 우선 중남미를 비롯하여 전세계 독재국가에서는 해방신학의 언급과 사상은 곧 정부전복음모나 사회주의나 마르크주의로 낙인찍힌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것이 교회의 기득권 보존이나 종교 자유 행사에 지장이 된다고 기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책자가 판금되고 1979년 8월에는 소위 ‘도산(都産)’을 매도하면서 매스컴들이 해방신학을 대대적으로 정치범죄로 공격하였다. 엘살바도르처럼 정치적 주장 없이 원주민 인디언이나 근로자를 위해 일하는 성직자 수도자들마저 기관총 세례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는, 해방신학 추종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로 간주된다.

 

둘째로, 이 신학은 신학계에서도 파란을 일으켜 왔다. 크게는 국제신학위원회가 1976년 10월에 이 신학의 유익성과 위험을 검토하면서 방법론상의 문제를 제기하였다(사목 56호 참조). 이에 대해서 칼 라너를 비롯한 독일인 신학자 1백여 명이 1977년말 성명서를 내고서, 해방신학에 시비를 걸고 국제공산주의로 몰아붙이는 일부 성직자들이 전제주의 정권을 비호키 위해 CIA로부터 거금을 지원받는 인물들이며, 신학적 근거보다는 정치적 입장에서 해방신학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사목 61호).

 

교회 내의 이 같은 시비는 1979년 2월의 라틴아메라키 주교회의가 다시 ‘해방교육’을 채택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해방은 분명히 신앙의 내용이며 … 성서의 근본사상 중의 하나요!” 해방신학은 곧 교회의 신학이라고 공언함으로써 일단 고비를 넘겼다(사목 63호). 교황은 이 신학이 내용과 방법을 보완하여 “인간에 관한 전진리(全眞理)에 충만”하기를 당부하고 있다.

 

셋째 문제는 ‘해방’이라는 말이 남용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주는 대중적 반응을 생각해서인지 특히 정치인들이 애용하고 극우파 이데올로기가 많이 이용했다. 우리나라의 군사정권이 “전쟁․빈곤․탄압에서의 국민 해방”을 내세우고 새 시대 새 역사를 시작한 것도 그 예로 보인다. 원래의 해방신학은 정부전복음모로 탄압받고 있는데, 극우파들 입에 해방이라는 말이 애용됨으로써 용어에 담긴 진정한 변혁의 의지와 자세가 탈색되고 있다.

 

오늘날 해방신학자들은 그 방법론을 정비하면서도 신학이 신학 교과나 대학 교양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경우처럼 인간 해방의 도구가 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오늘날 신학이 비판적이고 폭발적인 위력을 상실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생활 현실과 사회 정치 상황을 기피하고 지성의 유희나 종교적 도구로 그치고 마는가? 이렇게 그들은 신학이 정교(政敎)보다 정행(征行)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 “신학의 해방”(후안 루이스 세군도)을 부르짖고 있다.

 

(경향잡지 1981.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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