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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해방 [경향잡지 1977.8]

조회 수 4256 추천 수 0 2010.07.15 16:23:14

크리스천의 해방

 

                                                                                             [경향잡지 1977.8월]

 

내일 아침엔 반드시 새로운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리라 믿고 살라는 법은 어디 있노?

이야기 속 같은 어둑나라를 위해

달을 물오 올 개는 누구며 해를 물어 올 개는 누군고?

(박용아)

 

이 노래와 같은 심경으로 살다 간 우국지사들의 의분과 피땀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렀고 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우리 세대는 내 나라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으면서 여태까지 살아왔다.

 

광복절은 성모 승천과 똑같은 성대한 그리스도교 축일이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 날은 우리 배달 겨레가 구원(해방)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체험한 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이자 신도인 우리에게는 한낱 행사에서 그치지 않고 이 경축일이 담고 있는 해방과 자유를 기념하고 당장 이루어 주는 성스러운 기회(성사)가 됨 직하다.

 

우리의 삶은 늘 불안하고 곤궁하다. 더구나 미군이 철수한다 하고 강남의 땅값이 폭등하며 새 수도 이야기가 나도는 판국에서는 우리의 위기의식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무슨 대책을 꾸며야 하며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정치인들도, 군인들도, 우리의 경건한 목자들도… 아마 아무도 답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생존에 안전을 보장해 줄 힘이 아쉽다. 구제와 안보와 해방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가 번쩍 뜨인다.

 

해방에의 투신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새 역사 창조의 대업을 맡았노라고, 새 인류의 대사제라고 자처하는 이데올로기가 둘 있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이다. 유라시아의 태반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지금 아프리카에 그 세력을 확충하는 공산권,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바로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북한의 존재는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다.

 

그 대신 그리스도교가 당초부터 복음에 간직해 오던 ‘불씨’를 다시 살려 내고 메시지에 민감한 크리스천들이 투신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지금 요원의 불길처럼 제3세계에 번지고 있는 이 운동이 ‘해방운동’이며,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해 보려는 노력이 ‘해방신학(解放神學)’이다.

 

해방운동이 일어난 곳은 라틴아메리카다. 쿠데타와 군사독재가 전반적인 정치풍토가 되어 있고, 그 방대한 재원이 외국 기업과 소수 재벌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칠레의 본보기처럼 고문과 학살이 다반사이며, 가톨릭 액션지도자들과 신부들이 대낮에 살해당하는 땅이다. 지독한 빈곤과 영양실조의 문맹이 두루 퍼져 있다.

 

그런데 그 땅의 인구 9할이 가톨릭 신도인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계명’에 충동된 뜻 있는 신도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를 ‘인간의 전체적 해방’으로 알아듣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문맹 타파와 의식계발, 노조운동, 지하조직 등의 움직임 뿐 아니라 게릴라 운동에도 솔선하고 있다. 성직자들(카밀로 토레스 신부나 헬더 까마라는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도 그 대열에 가담하고 해방운동에 투신하는 신도들의 사목을 하고 있다.

 

해방신학의 내용

 

“해방의 신학은 라틴아메리카처럼 압제와 착취가 횡행하는 땅에서 해방의 진척을 위해 투신하는 남녀의 체험과 복음을 토대로 전개하는 신학적 고찰이다. 우리 대륙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불의한 상황을 타파하고, 보다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투쟁에 헌신하는 숫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

이러한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규준으로 삼아야 하겠다. 우리는 신앙에 비추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우리의 사랑을 강화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제시하는 약속이 보다 근본적이고 전체적이며 효과적인 것이 되도록 우리를 투신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해방의 신학’이 바라보는 목표이다.”(구티에레즈)

 

이 신학의 주도 인물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후안 루이스 세군도, 호세 미게즈 보니노, 루벰 알베즈, 우고 아쓰만, 조셉 콤블랭, 파울로 프레이리, 세군도 갈릴래아 등이 알려지고 있다.

 

그 방법은 지성소(至聖所)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에서도 복음을 읽고 사색하는 것이다. 굶주린 이들의 울음소리와 박해를 받고 구타당하고 죽임당하는 사람들의 비명과 압제 받는 사람들의 성난 외침이 거리에 울려 나오게 그냥 놔둬야 한다. 그 처절한 음성들을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의 주석I(註釋)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신학은 ‘예지’나 ‘합리적 지식’에 그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행동정식(行動定式)’이자 ‘비판적 사고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와 인간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와 교회 공동체를 변혁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어서 제3세계 각국이 한결같이 서두르는 ‘개발’의 개념이 ‘해방’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부강국이나 부유층의 수준을 부러워 뒤따라가는 체제는 결국 격차만 넓히고 기득권자들의 압제와 착취만 강화한다는 것이다.

 

‘해방’이라는 언어에는 국가나 계급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갈등의 개념이 들어 있고, 자유로이 자기 운명을 개척하라는 책임감이 들어 있으며, 모든 불의와 압제의 최종 근원인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역사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다고 한다.

 

구원 곧 해방

 

교회와 세계의 관계가 변해 온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처음에는 교회가 정치세계의 비호를 받는 형태였다가 뒤에는 교회가 일체의 속권에 간섭하는 시대가 왔었다. 그러나 교회 세력이 약화되고 사회가 변하면서 양자는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 생활이나 평신도 사도직이나 교회의 입장이나 항상 신앙생활과 현세문제를 분리시키는 이원론(二元論)을 못 벗어났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관과 역사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역사 앞에 어떤 처신을 하느냐에 따라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태도가 결정되는 까닭이다. 구원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사상이다. 구원은 ‘해방’과 같은 말이다. 그것은 먼저 죄의 예속에서 구제됨을 뜻한다. 그리고 죄의 사슬들, 곧 이기심, 무지, 빈곤, 불의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또 죄가 인간 심성에 머물지 않고 사회체제와 역사에 침투하여 구조악(構造惡)을 이루므로 구원은 개인의 회심과 더불어 사회의 개혁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인간들 전부와 한 인간의 전부를 총망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키 위한 투쟁은 구세사의 당연한 일부인 것이다.

 

신앙인의 근본 사명

 

신앙인의 눈에 역사는 숙명과 인간들의 조작으로 멋대로 굴러가는 무엇이 아니고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완성시키시는 구세사다. 하느님의 위력과 계시가 펼쳐지는 스크린이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부름받은 인간들이 자신의 운명과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 해방은 인간의 자기 창조 가운데서도 가장 결과가 현저한 활동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정치적 노력이 ‘영혼의 안전한 구원’의 조건을 갖추기 위한 소극적인 무엇이 아니고, 창조의 근원인 당연하고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크리스천이 예외적으로 할 수 있는 선업이 아니고 성세로 부여받은 근본 사명이 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 그때부터 인류가, 인간 각자가, 역사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이 성전 울타리 밖의 속된 것인 더 이상 존재 않는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역사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을 남미인들의 다혈질 기질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복음의 귀결이며 이 시대를 휘몰아치는 ‘성령의 바람’이다. 이 나라 이 겨레는 암담한 장래를 내다보면서 시대의 표징을 찾고자 한다. 우리 크리스천이 국가 안에 넓고 온전한 의미의 해방을 도모하고 또 쟁취하지 않으면, 우리를 대신하여 나설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자들이 내세우는 해방은 더없이 참담한 예속이요 굴종이라는 것과, 그 자들의 손에서 해방을 되찾은 나라가 일찍이 없었음을 상기해야겠다.

(경향잡지 1977.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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