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1. ㉯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1994. 7. 3: ㉯해 연중 14)

2. 사랑하는 사제를 위한 기도 (1996. 7. 5: ㉮ 김대건 성인)

3. ㉯ R.Cantalamessa,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 (2006. ㉯해 14)

 

 

1.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마르 6.1-6)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오늘 첫째 독서(에제 2,2-5)를 읽고 있노라면 "하느님이 여간 심기가 불편하신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원 참 하느님도, 아무리 막말을 하시기로... 우리가 그토록 못된 놈이라면 구세주는 뭣 땜에 보내셨는지요?" 하느님의 대답은 듣기에 더 거북하다.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알게 하셔서 어떡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걸 구실로 삼아 우리 망하는 꼴 보시겠다는 건가요?" "......"

 

두 주 전 한반도와 우리 민족의 운명이 파멸 직전에 다다랐을 때였다. 유난스레 덧니를 내놓고 웃는 카터 씨가 평양을 간다고 했다. 카터 씨는 박정희, 전두환 씨가 독재하던 시절, 공화당과 민정당이 할아버지로 받들어 모시던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 카터 씨가 방북을 한다는데 이게 웬 걸 청와대와 민자당과 관변 언론이 기막힌 반응을 보인다. "이 시점에 웬 방북이야? 저 사람, 김일성의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청와대의 반발에 순진한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스텔스기의 북폭, 북진통일이 눈앞에 와 있는데 다된 밥에 재 뿌려 놓긴가?" "하필 이름만 들어도 각하의 뱃속에서 밥알이 곤두선다는 동교동의 제안을 따라, 동교동이 천거한 인물을 보내다니 클린턴 제 정신이야?"

 

한국의 언론은 카터 씨의 방북이 한민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집권자의 정적이 발상한 방북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떼같이 일어났다. 그들의 비판과 증오에 놀란 이라면 오늘 복음을 이해할 만하리라.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이웃 가파르나움 사람 바르톨로메오 곧 나타나엘이 일언지하에 한 말이 있다기로서니, 사실 나자렛에서 인물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 고향을 빛낸 인물이 고향에 온다하여 온 나자렛 사람들이 회당에 모였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난 나자렛 사람의 반응이란 게 가관이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목수가 어때서?

"에이, 기왕이면... 하여튼 맘에 안 들어!"

다른 패거리는 한 술 더 떴다.

"저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뭐가 어때서?

"뭐랄까 애비가 없는 자식이지. 에이, 처녀가 낳은 아들이라니..."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몰이해와 적대, 까닭 없는 증오를 다른 사람도 아닌 구세주의 동향 사람들이 드러내다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말씀이야 좋다. 허나 누군가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입에 올려, 만약 내 이익을 하나라도 가로막는다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법. 어떤 이에 대한 까닭 없는 미움, 독재정권의 수십 년 사주가 그 이유였을까? 북한 사람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감 , ‘정의’니 ‘민주’니 ‘통일’이니 하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혐오! 저런 미움과 증오와 혐오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만 뿌리박힌 것이 아니다. 교회 전체에 두루 두루 뻗쳐 있음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 첫 독서에 나온 하느님의 역정도 이해가 된다. 바로 이러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존속한다면, 또 이 민족이 전쟁의 재앙에서 이번에 구원 받는다면 그것은 큰 기적이요, 애오라지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아닐 수 없다.

(1994. 7. 3: ㉯ 연중 14)

 

 

2. 사랑하는 사제를 위한 기도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17-22)

 

아침기도에서...

 

날새와 벌레들이 새벽을 알리고

이른 녘 배달부들과 자동차 소음이 하루를 여는 이 시각에

주여, 은혜로이 주신 이 하루도 우리 [...... 신부님]

주님 사랑에 성실하고 주님께 맡은 이들의 사랑에 성실케 하소서.

신부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신부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을 보우하소서.

주님의 뜻이 세상과 교회와 우리 신부님 안에서 이루어지이다.

 

미사 중에...

 

김대건 성인 안드레아와 우리 순교 선조들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자아와 일생을 호스티아에 얹어 바치는 사제

가난한 인생들의 호소와 한 많은 이 겨레의 소망을 주님께 아뢰는 사제

그분과 우리가 드리는 이 제사를 어여삐 받아 주소서.

누가 주님의 제단에 오르며

누가 주님의 거룩한 곳에 서 있으리이까?

그러니 손이 결백하고 마음이 깨끗한 이로 신부님을 지켜 주소서.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가지런한 말씀이

상처받은 이들을 주님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고

가난한 마음들에는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위안을 채우며

올바름을 찾는 이들에게는 예언자다운 용기를 심어주게 하소서.

 

밥상머리에서...

 

들풀을 입히시고 날새를 먹이시는

주님의 손길이 얼마나 어지시나이까?

정겨운 가족들이 오순도순 하는 우리 밥상에 축복하시고

엠마오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사제관에서 홀로 밥상을 대하는 신부님과는 주님이 함께 자리하소서.

신부님에게 첫째가는 은혜로 건강을 주시며

신부님 가까이 봉사하는 이들을 축복해 주소서.

 

하루 중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모든 이가 땀 흘려 일하고

우리의 아이들은 뛰놀고 학교 가는 시각입니다.

오늘도 과분한 수고와 슬픔을 신부님에게 지우지 마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에게 사랑과 선량과 희생을 요청할 이들을

주님인양 맞게 하소서.

오로지 교회 안에서 사랑하고 diligere in Ecclesia

오로지 교회와 더불어 느껴 살며 sentire cum Ecclesia

때로는 교회를 대신하여 발언하게 하소서. praefari pro Ecclesia.

 

저녁기도에서...

 

어린이들에게 소복한 꿈을 내리시고

우리에게는 따스한 사랑의 안식을 주시는 주여,

사제관에서 홀로 잠드시는 신부님에게도 포근한 휴식을 내리소서.

하늘의 어머니시여,

이 밤도 신부님의 머리맡에 앉으시어

신부님의 번민과 잘못을 바느질하여 기우소서.

이 밤도 사제와 수도자와 동정녀들이 주님께 자신을 바친 것을

후회하지 말게 하소서.

언젠가 신부님의 눈으로 구원을 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편안히 세상을 떠나게 하소서.

(1996. 7. 5: ㉮ 김대건 성인)

 

 

2. Raniero Cantalamessa,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

     (2006. B. XIV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기적과 가르침으로 사뭇 유명해진 다음, 예수님은 어느 날 당신의 출신 마을 나자렛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환호도 없고 환영도 일체 없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사람을 판단해야 하는 법인데 그곳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를 받았을까? 저 사람은 공부를 안 했는데. 저 사람을 우리가 잘 안다구. 목수야. 마리아의 아들 아닌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시 말해서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 그분을 잘 안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태를 신랄하게 꼬집으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분의 이 말씀은 후대에 격언이 되었다. “어느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또는 “누구도 고향에서는 예언자 노릇을 못한다.” 하지만 이것을 길게 얘기할 게제는 아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의 차원에서 할 말이 많다. 그 가르침을 이렇게 간추릴 수 있다. “나자렛 사람들이 저지른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분의 복음이 다시 울릴 적마다, 한 때 그리스도교의 요람이었다고 자부하는 땅에 그분의 복음이 울릴 적마다 예수님이 당신 고향에 돌아오시는 셈이니까.

 

마르코는 그냥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루카는 그 안식일에 그분이 무엇을 가르쳤고 회당 안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특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예수님이 열거하신 항목들은 한 결같이 대희년(大喜年)의 내용이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50년마다 ‘요벨’이라고 부르는 뿔나팔 소리와 더불어 특별한 한 해를 선포하고 그 해를 ‘희년’(jubilaeum)이라고 불렀다. 그 해가 오면 토지는 매매되었더라도 원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갔고, 종살이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으며, 부채는 탕감되었다. 그야말로 은사(恩賜)의 한 해요, 화해의 한 해요, 용서의 한 해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것은 그리스도교 첫 번 희년에 해당한다. 은총의 대희년이었고 그 뒤의 모든 희년과 성년은 사실상 그 대희년의 기념제라고 하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직무에서 이 “은혜로운 해”의 혜택들을 체험하는가! 갈릴래아 마을들은 얼마나 큰 기쁨과 새 삶을 체험하였을까? 그런데 예수님이 제일 먼저 이 대희년을 선사했던 나자렛 사람들은 이 메시아 대잔치에서 스스로 제외 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대희년의 은혜를 거부했던 까닭이다.

 

우리가 만일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유럽은 그리스도교로 볼 적에 예수님에게 나자렛이 그렇듯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자라나신 곳”이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자라났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자렛에서 자라나셨듯이 말이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지금은 나자렛 사람들의 처지가 될 지경이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서기 2000년의 대희년을 준비하는 행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유일한 구세주”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그리고 이 주제에 관해서 다양한 인터뷰를 모아서 내보냈다. 그 중에는 일정한 주거가 없이 공원 벤치 등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 한 사람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아주 간단한 답변인데 다름 아닌 그 사람이 발설했다는 점에서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요? 누군가를 구할 유일한 분이라고 봐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은 언젠가 한번은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이다. 이런 대담한 주장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답변은 이렇다. 우리 믿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자 사람이시다. 사람으로서는 우리를 대표하신다. 하느님으로서는 무한한 능력과 위상을 갖는 분이어서 어느 한 세대나 문화의 인간들만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인간들을 구하실 수 있다. “하느님께 너무 과하다거나 불가능하다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담의 범죄 후 사정이 이러했다. 사람은 자기가 예속한 사탄과 맞싸워서 이겨야만 했다. 그런데 그 일은 해낼 수가 없었다. 누가 남의 노예이고 그의 권세 하에 있으면서 무슨 수로 자유로워지겠는가? 그 대신 하느님은 이길 수 있는 분이시지만 싸워야 할 필요가 없으시다. 죄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죄가 인류를 지배하고 파멸로 유인하는 악순환이었다. 인간은 싸워야 하지만 이길 수가 없었고, 하느님은 이길 수 있으면서도 싸울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 그리스도에게서 이 문제가 풀렸다. 그분에게는 참 하느님이 계시고 참 사람이 있었다. 싸워야 하고 원수를 이겨야 하는 분이 이길 수 있는 분과 결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류에게 구원이 도래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 받을 일이 없습니다.”(로마 8,1)라고 외치는 바오로 사도의 신명나는 소리를 알아들을 만하다. 우리가 속량되고 구원받고 용서받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 하느님이 대희년을 선포하시고 모든 빚을 탕감하시고 노예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일을 바로 나를 위해서 하셨다. 인류라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대상을 상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나라는 구체 인간을 상대로 하였다. 예수님은 그저 세상의 구세주이신 게 아니라 내 개인의 구세주이시다. 나의 구세주이시다. 나를 위해 죽으셨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정말로 우리가 이런 소신에 이른다면 삶이 달라진다. 환한 빛이 켜진다. 전대미문의 신뢰가 생긴다. 새롭고도 무너지지 않는 용기가 솟는다. 종교라는 것이 다른 면모를 띤다. 사제들이나 흥미를 둘 만한 무엇이 아니고 내밀하고 개인적이고 중요한 사건이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사람 누구에게서나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 입으로 설교하시던 내용을 구현하고자 하신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고 부서진 마음을 낫게 하시고 시력을 되찾아 주시며 일체의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신다.

 

우리도 하느님께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한다. 복음의 구절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두신다. 제안을 하실 따름이다. 당신 선물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배척하고 거절하였을 적에도 위협과 성토를 하지 않으셨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로마를 등지고 떠나면서 “배은망덕한 로마여, 너는 내 죽은 다음 내 뼈를 간직하지 못하리라”라고 선언하였다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화내면서 떠나지도 않으셨다.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나가셨다. 한번은 제자들이 찾아간 곳에서 사람들이 맞아주지 않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불사르게 하자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그들을 돌아보시면서 엄히 꾸짖으셨다(루카 9,54).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심약하시다.” 우리의 자유를 무척이나 존중하신다. 우리끼리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존중하신다. 거기서 크나큰 책임이 따라 온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내 앞을 지나가 버리시는 예수님이 두렵다.”(Timeo Jesum transeuntem)는 말을 했다.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실 지도 모른다. 내가 맞아드릴 마음을 먹기도 전에 말이다. 그날 나자렛 사람들에게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