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1. ㉯ 예언자여, 당장 꺼져라! (l988.7.l0: ㉯해 연중 15)

2. ㉯ R.Cantalamessa, 그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2006. ㉯해 연중 15)

 

 

1. 예언자여, 당장 꺼져라!

 

"너희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발밑에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7-l3)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예언 아닌 예언을 강요당해 왔다. 정권 교체가 아닌 정권 승계를 놓고 건국 이래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라고, 그 거룩한 일을 이룩한 사람을 훼손하는 언동은 금물이라고, 당신들이 밥숟갈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른이 불철주야 나랏일에 노심초사한 결과라고 강요하던 예언은 모두 거짓이었다.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수천의 양민이 살상당하고 나라의 국고를 제 금고인 양 축내 놓고도, 그것을 묻어 두고 못 본 체하는 것이 민족 화합의 지름길이라는 예언(?)이 지금도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시민의 발인 지하철 공사의 운영을 맡고 있는 사람이 “인천 정도야 싹 쓸어버릴 수 있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판국이니, 물러나는 장성이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는커녕 국민에게 협박을 일삼는 일은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민족의 자존심과 존엄은 간 데 없이 외세의 거대한 힘에 굴복한 수입 개방과 양담배의 수입이 부득이한 선택이라고, 그 방법만이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 땅의 인간화와 민주화,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장 여기를 떠나 유다 나라로 사라져라. 여기는 왕의 성소이지 야훼의 성소가 아니다. 여기는 권세와 폭정과 부(富)가 다스리는 곳이다. 정의니 평화니 통일이니 인권이니 하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말아라. 거듭 말하거니와 여기는 왕의 성소다."

 

"여기는 고관들과 장군들과 유지들의 성소다. 여기는 조찬회와 호국 기도와 감사 미사를 드리는 성스러운 곳이다. 우리들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룬 재산과 출세와 안녕과 성공을 감사드리는 예배소이다. 가난뱅이, 거지,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 노점상들에게 자리가 없다. 꺼져 버려라!"

 

이렇게 참된 예언자는 설 자리가 없고, 거짓 예언자의 목소리만이 더 크게 들려온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행적과 교우들에 대한 권고, 고난 가운데서 용감히 하느님을 증거하고, 사랑 속에서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을 새삼스럽게 떠올려 본다. (l988.7.l0: ㉯ 연중 15)

 

 

2. Raniero Cantalamessa, 그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2006. B. XV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오늘 복음은 다음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이 말씀에만도 중요한 사실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사도들의 파견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까지는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는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제자들은 그분을 따라다니고 듣고 배우고, 말하자면, 견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파견을 받았다. 여태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오너라!”였다면 이제는 “가거라!”가 된다. 부르심에서 파견으로 바뀐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말씀을 내리시는 예비행사였다고 할 만하다.

 

여기서 바로 밝힐 점이 하나 있다. “가거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 대개는 생각하기를 사도들에게, 그리고 지금은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한다. 교황, 주교, 사제들 말이다. 그들에게 해당하는 얘기고 가련한 우리 평신도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들 생각한다. 치명적인 오류다. 공식적이고 직무상으로 그 임무를 주어 보내신 것이 사도들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다. 사도들은 공통된 사명을 수행하는데서 지도자요 독려하는 위치에 있다. 이와 달리 생각한다면, 전쟁을 하기는 하되 전쟁은 장군과 사관들만 하고 사병은 없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축구시합을 하더라도 코치와 심판만 있으면 시합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사도들의 이 파견 직후에 예수님은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셨다.”(루카 10,1) 그 일흔두 명은 예수님이 그때까지 당신 주변에 모으실 수 있었던 사람들 전부거나, 적어도 그때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진지하게 나설 태세가 되어 있던 사람들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 제자들 전부를 보내신 것이다. 모두를 필요로 하셨던 것이다. 아니, 모두에게 당신의 사절이 되라고, 당신을 앞서가는 “선구자”가 되라고, 당신의 찾아가시려는 모든 고을에 길을 마련하고 길을 닦는 사람이 되라고 명을 내리신 것이다.

 

모두가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증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면 사람들이 보임직한 반응은 이럴 것이다. “아니, 간간이 성당에 가서 복음 말씀을 듣고 하는 것으로 족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더러 복음 선포까지 하라는 소린가? 신부님들 좀 아시라구요. 가정을 건사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살자고 아옹다옹하는 게 뭔지 아시기나 하나요?” 하지만 복음 선포자가 된다는 게 우리 일생생활에다 무슨 짐을 하나 더 얹는 것이 아니다. 되레 그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다. 삶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면서 그 무게를 잊어버리게 도와주는 청량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현세에서도 백배의 상급을 약속하신 예수님 말씀을 잊었는가?

평신도는 그리스도교의 핵에너지다. 핵에너지는 원자의 핵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라늄 원자는 중성자의 충돌로 분열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에너지를 발생하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에너지가 다른 두 원자와 충돌하고 그 다음 다시 두 배의 원자들과 충돌하면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이렇게 풀려난 에너지는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파괴적인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위해서 평화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에너지도 얼마든지 있다.

 

영성의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복음과 접하고 그래서 회심한 평신도 한 사람은 다른 두 사람 곁에서 살면서 그 둘에게 복음을 전염시킨다. 그 둘은 다른 네 사람을 전염시키고, 그러다 보면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수십만에서 그치지 않고 십수 억에 이른다. 복음의 아름다운 빛을 세상에 전파하는데 평신도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다.

 

미국에 어느 평신도가 있다. 어엿한 가장이요 자기 직장생활 외에도 복음 전도 역할도 한다. 유머가 심하고 미국 사람들을 움직이는 소란스러운 농담과 제스처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는 새로운 장소에 가면 늘 이런 말을 한다. “2천 5백 명의 주교님들이 바티칸에 모이더니 나더러 당신들한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소.” 사람들은 의당히 무슨 소린가 하고 호기심을 보인다. 그러면 그 사람은 2천 5백 명의 주교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라고 설명하고, 그들이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그 문서에는 평신도 전부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설명을 내놓는다. “그분들이 나더러 당신들한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소.”라는 말뜻이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 말씀은 공연히 한 말이 아니다. 모두에게 건네는 말씀이지만 아무에게도 해당하지 않는 빈 말씀이 아니다. 모든 평신도 가톨릭신자에게 직접 건네는 교회의 말씀이다.

 

하지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냐는 얘기도 한 마디 해야겠다. 예수님께 파견 받은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을 회개시킨 내용이 뭐냐고 물을라치면 한 마디로 “복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하느냐는 물음이 나오면 얘기가 길어진다.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무엇을 말해야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말해야 하느냐는 얘기가 더 길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암시한다. 어째서 둘씩 짝지어 보냈는가? 이탈리아 경찰도 늘 둘씩 짝지어 다닌다. 우스갯소리로 하나는 읽을 줄만 알고 하나는 쓸 줄만 알아서 이탈리아 경찰은 늘 둘이 함께 다닌다고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다. 대그레고리오 성인의 설명에 의하면, 애덕을 진작시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애덕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애덕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첫째 요소라는 말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정치나 노동이나 여러 정황에서 함께 일하는 신자가 두 명이 있다고 하자. ‘그리스도’니 ‘복음’이니 하는 말을 입 밖에 낼 필요도 없다. 그럴 처지도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일치해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께 엄청난 증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신자들은 자기네 신앙을 공공연히 설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교도들은 신자들 사이에 오가는 사랑에 깊이 감복하였고 그래서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라면서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부모에게도 해당한다. 부모가 자식의 신앙생활에 전혀 간여할 수 없는 처지더라도, 자식들이 부모를 쳐다보면서 “엄마와 아빠 두 분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시는가!”라고 감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사랑은 하느님에게 온다.”(1요한 4,7). 참된 사랑이 한 조각이라도 있는 곳에서 반드시 하느님이 전파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내가 앞서 얘기한 미국 사람은 아들 하나와 아주 불편한 관계였다. 무려 6년을 두고 그는 이 아들을 위해서 아내와 함께 특별히 기도하고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려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해 어버이날 그는 아들들에게서 성경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는 이미 스물세 살이 된 그 말썽꾸러기 아들의 필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 고마워요. 아버지 사랑 덕분에 저도 하느님 나라를 찾았어요.” (자식들과 어슷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들이 어느 날엔가 이런 답장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처럼 말없는 사랑의 증언 외에 필요하면 분명한 말을 덧붙일 필요도 있다. 성베드로는 초대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적어 보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사실 가장 초보적이고 일상적인 복음 선포 형태는 다음과 같다. 누가 무엇을 물어오면 설명을 해 주는 일과 남의 말에 귀 기울여 주려는 자세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으로 회심하였는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는 분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다. 온유하고 존경에 찬 말씨는 상대방이 이미 갖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무시하는 일이 없고, 우리 측에서 과도한 주장이나 오만방자한 자세를 보이는 일 없게 만든다. (집집이 사람들을 찾아다니거나 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덤비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얼마나 피곤하고 질리게 만드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용기와 창의적 노력마저 꺾는 것은 아니다.

여태까지 드린 얘기는 “누가”(사제들만 아니고 모든 신자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과, “어떻게” (사랑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말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디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느냐는 얘기도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이겠다. 오늘날, 평신도에게는 어떤 장소가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동네와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동네라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일 수도 있지만 대다수에게는 아주 가까운 곳이 된다. 직장, 우정, 가족 주변이 그 동네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놀랄만한 점도 엿보인다. 구원을 얻으려면 뭣을 해야 하느냐고 여쭙는 젊은이에게 예수님은 이런 답변을 내놓으셨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런데 어떤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오겠다는데 허락하지 않으신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여기서 내 머리에는 “길랏의 향유”(There is a balm in Gilead)라는 흑인영가가 떠오른다. 마지막 연은 이 강론을 끝맺는데 도움이 되겠다. “그대가 베드로처럼 설교할 줄 모르면, 그대가 바오로처럼 설교할 줄 모르면, 그냥 집으로 가거라. 가서 이웃에게 말하라.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려고 죽으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