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1. ㉯ 미세레올(MISEREOR) (1994. 7.17: ㉯해 연중 16)

2. ㉰ “마르타, 마르타...” (1980.7.20: ㉰해 연중 l6)

3. ㉯ R.Cantalamessa,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2006 ㉯해 연중 16)

 

 

1. 미세레올(MISEREOR)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르 6,30-34)

 

독일 천주교회에 「미세레올(MISEREOR)」이라는 주교회의의 산하 기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일 국민의 속죄 의식이 가톨릭교회에도 확대된 한 단체인 미세레올은 개발도상국의 교육활동과 빈민운동을 원조해 왔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나라에도 그 혜택을 입은 단체가 한둘이 아니었다. 서울 교구 “한 마음 한 몸 운동 본부”와 흡사하다고 할까? 그런데 미세레올이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misereror super turbam)."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 단체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될까?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예레 23,1-2)고 하느님께 심한 꾸중을 듣는 직업 목자와는 전혀 딴판이다. 밥 먹을 틈도 없이 시달리는 사목자의 모습, 모처럼의 피정 기회마저 신자 사목에 빼앗긴 성직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하기야 사제관이든 본당 수녀원이든 식사시간, 기도시간, 회의시간이 따로 있어서 사목자를 면담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불평도 없지는 않다. 사목 위원들의 원만한 본당신부 '대좌'와 보잘것없는 노동자의 힘겨운 '알현'이 차이가 난다면, 치맛바람 쌩쌩한 부인은 제 집 드나들듯 사제관을 출입하지만 본당 신부님을 짜증나게 할 가난한 아낙네는 사무장, 수녀, 식복사의 인간 장막을 통과해야만 한다면, 거기서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물론 수많은 신자들에게 봉직하자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변명도 얼마든지 이해할 만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제가 교우를 사목할 때 말씀을 펴고 성사를 베풀고 신자들을 상담하고 소공동체들을 방문하는데 온 전력을 다한다면, 그리고 본당 살림, 서류 결재, 산하 단체들의 외적인 활동은 사목협의회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관리를 맡긴다면 시간은 충분할 듯하다. 사제직은 관리직이 아니고 사제의 권위는 돈주머니나 결재 도장에 있지 않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지난 수십 년 간 가톨릭교회로 몰려온 그 많은 입교자들을 어떻게 교육시켜 왔을까? 당신을 찾아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엇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까? 교리 받고 세례 받고 미사 참례한다? 그러나 성당에 오면 남편 출세와 자식 입학만 생각나는 기복신앙을 타파하는데 교회가 준 도움은 무엇이었을까? 보수언론과 반공교육으로 지새는 사회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민족통일과 화해를 얼마나 준비시켜 왔는가? 성당 크기나 화려함, 사목회의 구성, 주임사제가 가까이하는 부류, 강론의 성격으로 보건대 교회는 과연 맘몬 숭배자들을 하느님 예배자로 교육시켜 왔는가?

 

그리스도교 신앙 교육을 천년 동안 받고도 사회주의 교육까지 70년 받은 보스니아 땅의 비극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르완다와 부룬디의 대통령을 폭사시킨 사건은 벨기에의 음모인가, 불란서의 음모인가? 그리하여 한 달 만에 르완다 소수민족 30만 명이 몰살당해도 전 세계는 지금까지 구경만 하고 있다. 깜둥이들이야 씨가 마른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서구 사회의 양심에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했는가? 기아와 내전과 학살로 죽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가슴에 끓고 있을 분노가 우리는 두렵지 않은가?

(1994. 7.17: ㉯ 연중 16)

 

 

2. “마르타, 마르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10,38-42)

 

"저 여우같은 기집애, 난 눈코 뜰 새 없는데 선생님 턱 밑에 앉아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꼴 좀 보라지. 선생님 좋아하는 제 속 모르는 바 아니고 원래 물에 손만 담그면 어찌되는 줄로 아는 얌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열댓 명 손님을 나 혼자서 치우라니… 선생님도 저렇게 눈치가 없으실까? 한 마디 해야만..."

 

부엌살림을 해 본 여자라면 마르타와 마리아 얘기에서 마르타의 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없겠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 성미대로 한 말씀 올렸는데, 예수님 대답이 천연덕스러웠다. "마르타, 마르타, 저녁이야 밥하고 김치면 되지 뭘 그리 야단인가? 또 저녁밥 좀 늦는다고 누가 고꾸라지나?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말씀이야 쉽죠. 선생님 맘 누가 모를라구요.) 마르타의 입이 한 자나 나온다. 그제야 마리아는 제 정신이 들어 후다닥 부엌으로 내려갔을 테고.

 

얘기를 비약해 보자. 남편과 자녀 시중이며 집안 살림에 정신없고 물가 걱정에 바쁜 주부들에게 사회 문제인 자유, 평화, 정치, 세계, 경제가 귀에 들어오기 힘들다. 가족들 건강하고 집안에 걱정이 없는 한, 쌀과 연탄 그리고 얼마의 금붙이와 곗돈이면 적이 안심이라고 한다면, 주부들에 대한 지나친 멸시일까?

 

그러나 때로는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일 경우가 있다. 주님을 모시면 찬거리 걱정보다도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와 사랑과 영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요긴하다.

 

주님의 말씀대로, “시대의 징조”를 주부들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가 놀라는 사건이 있어도 그것은 남의 땅 얘기라고 외면하면 안 된다.

 

언제나 역사 속에 사건은 있게 마련이고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도 있다. 이를 보고 십자가를 진 개인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하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 십자가 위의 죽음이 우리의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단죄하고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우리가 참회하고 속죄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정의가 더 큰 벌을 내린다면 남정네에게는 죽음이, 여인들에게는 수치가 있을 따름이다. 지금 이 시대의 모든 사건이 우리의 운명을 예고하는 하느님의 표였음을 깨달을 때 소스라치겠지만 그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1. 35)는 말씀이 있다. 경건한 여인들의 기도와 가난한 자의 속죄와 울부짖음이 주님의 손길을 가로막았던 그 역사의 죄악들을 새삼스럽게 한다.

(1980.7.20: ㉰ 연중 l6)

 

 

3. Raniero Cantalamessa,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2006. B. XV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Venite in disparte e riposatevi un po’

 

오늘의 복음을 읽어보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여기서 주제는 “휴식”이다.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더러 군중과 일에서 떠나 잠시 당신과 함께 외딴곳에서 쉬라고 권하신다. 당신이 하시던 대로 하라고 가르치신다. 활동과 관상을 조정하라고,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자신과 하느님과 나누는 내밀한 대화로 옮겨가라고 가르치신다.

 

아주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다. 이 자리에서는 ‘천천히’라는 주제를 새겨 보자. 지금은 삶의 리듬이 우리 능력을 넘어 속도를 강요한다. “천천히 서두르라!”(festina lente)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지금은 ‘천천히“라는 부사는 사라지고 그냥 ”서두르라!“는 동사만 남아 잇다. 서두르고 달리고 마냥 날뛴다. 뛰어가는 것이 지금은 편집적인 질병이 되었다. “멈추어 서면 망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결코 멈춰 서지 않는 사람도 망하기는 마찬가지다. 언어와 영상, 정보와 감성이 초고속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을 포착하여 내 손아귀에 넣지 않으면 자기는 뒤떨어지고 패배하고 망한다고들 생각한다. 기계 톱니바퀴에 끼어서 마냥 돌아가는 삶을 산다.

 

그러다 보니까 세태의 흐름 속에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사태를 살펴보는 능력을 잃고 만다. 그러면 삶은 일종의 여행이 아니라 그냥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이사(移徙)가 된다. 삶이 나날이 제공하는 바를 알아듣고 관찰하고 즐길 여유가 없다.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정한 거리를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에 완주하겠다는 일념에 마구 달리기만 한다. 자기가 지나가는 고장을 살피고 경관을 감상할 틈이 없다. 그러다 보면 길에서 무엇을 보았다는 의식도 없이 인생의 종점에 도달할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급하게 서두르는 인상을 결코 보이지 않으셨다. 시간을 허비한 것처럼 보이시진 적도 있다. 사람들이 죄다 그분을 찾는데 발견이 되지 않았고 찾고 보니 기도에 빠져 계셨다. 그런가 하면 오늘의 복음 구절처럼, 당신 제자들한테도 시간을 좀 허송하자는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급하게 서둘지 말라는 말씀도 간혹 하신다. 우리 신체도 좀 천천히 하면 얼마나 이득을 보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천천히 한다는 것이 복음적인 가치마저 지닌다면 하루의 일과에서 잠시 멈추고 지체하는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만하다. 주일과 축일, 명절 등을 잘만 사용하면 너무 팽팽한 삶의 리듬을 끊고, 사물, 사람, 자기 자신 그리고 하느님과 보다 조화로운 관계를 설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여름휴가다. 아마 대다수 서민들에게는 여름휴가야말로 제대로 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여유를 갖고 배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자녀들과 놀아주고, 좋은 책도 읽고, 조용히 자연을 관조할 유일한 기회다. 한 마디로 몸과 맘을 풀어주는 기회다. “축제를 거룩하게 지내라!”는 말씀에 “휴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말씀을 덧붙일 수 있겠다. 축제니 휴일이니 하는 언어가 서양에서는 “예배에 바친 날”을 의미하였다. 영어 “홀리데이(성스러운 날)”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런 휴지의 시간에는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잊어야 한다. 해치워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생각도 잊어야 한다. 시간을 잃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시간을 되찾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정말 우리가 상실하는 시간, 잃어버리는 시간, 허비하는 시간은 우리 밖에서, 서둘러, 근본적인 물음을 설정하지 않고서 살아가는 시간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뭣을 하고 싶은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들이 근본적이다. 하느님이 계시고 내가 있다는 사실, 내가 하느님 안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문제다. 시편 어느 구절에는 “잠시 생각하여라(원문은 vacate '쉬어라!‘)! 내가 하느님임을 알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휴식과 정신집중의 시기를 보내는 일은, 프루스트의 말마따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는 길이기도 하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도자일수록 고독과 경청의 시간이 더 절실하다. 형제들에게 생명과 말씀을 전해줘야 하는 만큼 생명의 원천, 말씀의 원천과 꾸준히 접촉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평신도들은 자기네 사제가 지적 영적 쇄신과 재충전을 위하여 잠시 자리를 비울 적에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낄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마땅하다. 전문가도, 정치인도, 노동자도, 한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도, 젊은이도 때때로 일에서 잠시 놓여나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와 동기를 성찰할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복음의 나머지 부분도 읽어 보자. 고독과 은둔에 관해서 나름대로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이 사도들과 지내려고 하시던 휴가는 짧았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서 고기를 낚으러 배를 멈추던 짧은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군중에게 짜증을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셨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보였다.

 

이웃의 절박한 필요가 있다면 자기가 응당 누릴 휴식도 포기할 자세가 서 있어야 한다. 자기가 돌봐야 할 노인이 있는데 방해받지 않고 휴가를 즐기겠다고 병원이나 시설에 떠맡기고 떠날 수는 없다. 고독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 감수하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것도 몇 주간이나 몇 달이 아니라 수년간 아니 일평생 그것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우도 실천적인 방안이 있어야겠다. 주변을 둘러보면, 찾아보거나 전화를 해 주거나 휴가를 보내는 곳에 와서 하루 이틀 함께 지내라고 초청하여 그 고독을 덜어줄 수도 있다. 상황과 심경이 허락하는 대로 방도를 찾아볼 일이다. 또 성당이나 산비탈의 경당에 들어가 따로 시간을 내어 고요하게 침잠할 수도 있다. 폴 클로델은 주일 프랑스 대사로 가 있던 어느 날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어느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면서 동정녀 마리아께 이런 기도문을 올렸다.

 

“한낮입니다. 성당이 열려 있습니다. 들어가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기도를 하러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바칠 것도 없고 여쭐 것도 없습니다.

어머니, 그냥 당신을 쳐다보려고 들어왔습니다.

말없이 당신 얼굴만 쳐다봅니다.

내 마음에 제 나름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게 잠자코 버려두겠습니다.“

 

마음이 제 나름대로 노래를 부르거나 흐느끼게 잠자코 내버려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