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1. ㉮ 내 기적의 뜻일랑... (1996. 8. 4: ㉮해 연중 18)

2. ㉯ 빵을 주랴, 자유를 주랴? (1994. 7.31: ㉯해 연중 18)

3. ㉯ 빵의 나눔은 목숨의 나눔 (l988.7.3l: ㉯해 연중 l8)

4. ㉯ R.Cantalamessa, 믿음과 의심 (2006. ㉯해 연중 18)

 

 

1. 내 기적의 뜻일랑...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3-21)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런데 식구는 남자만도 오천 명이라... 당신 입으로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악마한테 큰소리치던 분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무엇 때문에 하셨을까? 양곡업자들은 어찌하라고? 성령업자들은 어떡하라고? 선거철도 아닌데... 당신 기적의 뜻이 도대체 무엇일까?

 

지난 한 달 간 <조선일보>를 읽어본다면, 이북에서는 인민 전체가 아사직전의 지옥이고, 그 정권은 붕괴 직전의 말기 현상이며, 하루에 수십 수백 명씩 굶어 죽고 있단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당원들이 인민을 생으로 잡아먹을 아비규환이 도래할 듯하여, 남한 땅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구경거리를 손꼽아 기다리는 눈치렷다.)

 

주님이라면 사태를 보다 못해 "측은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 북한 사람들을 먹여 살릴 궁리를 하실 법하다, 오늘 복음의 기적처럼.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노라 는 이남의 신도들 가운데 상당수가 목구멍에서 이런 소리를 갈강거리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좀 더 쫄쫄 굶어 봐야 해! 그래서 견디다 못해 김정일 정권에 아귀 떼로 덤벼서 공산 정권을 무너뜨려야 해! 그때까지는 쌀 한 톨도 주어서는 안 돼! 이북에 식량 주자는 놈들은 모조리 빨갱이들이야!" (이런 속마음을 남에게 발설하거나 설교하거나 글로 쓰는 자들의 머리에 하느님께서 활활 타는 숯불을 얹어 주시기를!)

 

그래도 입교해서 한 가닥 양심이라도 배웠다는 이들은 "오, 주님! 저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북에 먹을 것을 내려주소서!" 라고 기도나마 할 줄 알리라. 그러나 이런 신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 "그럴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대답하실 것이 뻔한데, 한국 가톨릭교회가 조직적으로 이북 동포를 위해 식량 모으기를 한다는 소식은, 적어도 오늘까지는 들려오지 않고 있다. 예언자 같은 대담한 마음을 지닌 사제를 주임으로 둔 몇몇 교회와 민족을 사랑한다는 사회단체에서만, 그나마도 보수층 신도들이 발광하며 욕설을 퍼붓는 속에서, 공안당국의 별의별 치사한 훼방 속에서, 모금을 하고 북한에 식량과 돈을 보내는 중이다.

 

오늘 봉독하는 마태오복음서를 요한복음서의 빵의 기적과 대조해서 읽는다면, 내 개인에게도 기적의 의미가 선명해지는 듯하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성당 가면 마음의 평화 주시고 건강 주시고 영육간의 복 주시는데, 육신의 빵으로 배부른 사람들에게 영혼의 빵마저 배불리 먹여 주시는데... 우리의 영성체 입맛을 싹 버려놓는 작자들 누구냐?

 

어느 주교님 말씀마다나 "예수님이 언제 가난 구제에 나섰으며, 언제 교도소 방문 가신 적 있었느냐? 언제 노동 해방 외치셨고 언제 정의구현 데모하셨느냐? 성경에서 그런 구절 찾아 보여줄 사람 있으면 나와 봐! 성령도 못 받은 것들 같으니라고..."

 

사람들이 나눠 먹을 마음만 있으면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리라. 그런데 반공이라는 증오에 병 걸리고 나니까 신앙인들마저 이북의 동포들이 굶어 죽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수리 떼로 둔갑하고 말았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마태 24,28)

 

그래선지 서기 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유신론자들을 이렇게 비웃었다.

"종교심이 이기심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한, 종교 따위는 아무한테도 남아 있지 못한다는 사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1996. 8. 4: ㉮ 연중 18)

 

 

2. 빵을 주랴, 자유를 주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4-35)

 

16세기 스페인 세빌랴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이 판치던 그 곳, 철저한 가난을 부르짖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국왕과 성직계의 미움을 받던 개혁가가 날마다 광장에서 불타 죽던 도시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곳 추기경은 당장 예수를 체포하여 지하 감방에 가두고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따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죠프가의 아들들'에 나오는 유명한 '대심문관' 장면이다.

 

세빌랴의 추기경이 예수를 설득하는 교리는 이것이다. "자유와 지상의 빵과는 어떠한 인간에게나 양립할 수 없소.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공평하게 분배할 수는 도저히 없기 때문에. 또 그들은 너무도 무력하고 너무도 사악할 뿐만 아니라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반역자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자유를 누릴 수 없소."

 

"빵을 주랴? 자유를 주랴?"

"먼저 먹을 것을 주시오, 그러고 나서 착한 행동을 요구하시오! 자유가 밥 먹여 주지 않습디다."

 

그래서 지난 30년간 이 땅에는 빵의 이름으로, 경제개발과 공업화, 수출경쟁과 개방시대와 국제 경쟁력의 이름으로 온갖 독재가 판을 치고 자유가 유린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오늘의 복음 역시 빵과 자유의 논리를 토대로 한다. 빵의 기적에 놀라 몰려온 군중을 상대로 예수께서 꾸준히 설득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길입니까?"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예언자)을 너희가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일이다."

 

과연 하느님께서 파견하시는 사람, 예언자란 누구인가? 예언자란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꿈을 꾼 이는 파라오였지만 일곱 해의 대흉년이 온다는 징조로 풀이한 이는 예언자 요셉이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잔치 때 벽에 글씨를 쓴 것은 난데없이 나타난 손가락이었지만 그 뜻을 풀어 준 이는 예언자 다니엘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가 위협하는 세상에서도 교회는 빵과 자유는 양립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빵은 강자와 부자가 독차지하고 가난한 노동자는 그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교회가 가르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문민정부 하에서 사상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다면, 그 문민정부는 가짜라고 소리쳐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채 남북대화를 하는 일은 위선이라는 사실을 종교인은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저 파업 노동자들은, 대학생들은 왜 걸핏하면 명동으로 모이는가? 무엇을 기대하고 명동으로 올라갔던가? 예언자를 보러 왔었다! 하지만 요즘 그 언덕에서 그네들은 비단옷 입은 사람의 제관만 보는 것 같다.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 끼어 난처해하는 제관의 말이 서러운 사람들 귀에는 이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여기는 힘 있고 돈 있고 변변한 선남선녀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성소이지 너희들이 몸을 피하라고 세워진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 당장 여기를 나가거라!"(아모 7,12-13 참조).

 

무슨 소리를 들으려 서울의 신도들은 수년 간 돈을 모아 '평화'의 방송과 신문을 만들었던가? “진리를 빛으로 하여, 정의를 목표로 하여, 사랑을 원동력으로 하여 참 언론을 펴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쩌다 지금은 '평화'의 소리가 공안당국의 발표 위에서, 학생과 노동자에 대한 이념적 증오를 깔고 내는 쇳소리처럼 들릴까? 아아, 빵과 자유가 양립하느냐 못하느냐가 예수와 대심문관을 구별하는 잣대이거늘...

(1994. 7.31: ㉯ 연중 18)

 

 

3. 빵의 나눔은 목숨의 나눔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1-52)

 

“이 사람들아, 너희가 내게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너희의 눈은 빵에만 있지 내 뜻은 알아듣지 못한다. 미사 중 거양되는 빵 앞에 깊이 조아리고, 빵을 모셔 둔 감실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영험도 좋은 보약을 먹듯 그렇게 착실히 영성체를 하면서 빵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를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너희와 함께 한 최후의 만찬에서 내가 전해 주려 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당장 잡혀 죽을 참이었다. 빵이 쪼개지듯 십자가에 부서질 내 목숨이었다. 다만 그렇게 죽는 일이 나 하나가 없어져 많은 인생을 살리는 길이었음을 설명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래서 ‘너희도 이렇게 하여라!’라고 유언하지 않았더냐?”

 

“너희가 먹을 빵을 나누어주는 것은 너희 목숨을 나눠주는 것과 같다. 빵을 살 돈을 나눔은 너희 목숨을 나누는 일이다. 너희 시인은 '밥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있는 이, 없는 이 할 것 없이 배고프지 않게 골고루 나누어 먹는 밥은 '영원히 살게 하는' 음식이다. 그 대신에 누구는 배가 터져 죽을 지경이고 이웃에서는 배고파 죽는 사람이 있다면, 너희는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다.”

 

“나의 만찬은 너희에게 이 점을 가르치기 위한 자리였다. 자기 몫을 내어줌, 자기를 내어 줌, 그래서 다함께 사는 길, 남도 살리는 길, 많은 이를 살리는 길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거기서 사람들은 서로 하나가 된다. 그런 뜻을 모르고 빵만 쳐다보니, 너희에게 성찬은 분열의 표시이다.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교회의 역사를 보려무나. 누룩이 들어갑네, 안 들어갑네 하여 동방과 서방으로 갈라진 일이 있었다. 실체 변화라는 어려운 말을 가지고 신교와 구교가 갈라진 비극이 있었다. 정결한 자는 영성체를 할 수 있고 불결한 자는 못한다면서 선인과 악인을 용케도 갈라놓더구나.”

 

“수탈한 자와 수탈당한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 남의 것을 차지한 부자와 아무것도 없는 빈민, 학살자와 죽임당한 자의 가족이 나란히 내 식탁에 앉는다면 그 식탁은 심판의 자리다! 먼저 용서를 청하고 보상하고 화해한 다음이라야 심판을 면할 수 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의 뜻을 알고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

(l988.7.3l: ㉯ 연중 l8)

 

 

4. Raniero Cantalamessa, 믿음과 의심

     (2006. B. XVII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La fede e il dubbioLa fede e il dubbio

 

지난번 빵과 물고기를 많아지게 한 기적을 설명했다. 잘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우리가 복음서를 풀이할 때마다 그런 기적이 반복된다. 우리가 마련한 묵상자료는 저 아이가 마련해 온 다섯 개의 보리빵에 해당한다. 구두로 발표하거나, 글자로 적힌 강론문은 그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니 말씀을 그만큼 많아지게 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듣는 말씀이고 그렇다고 말씀이 달라지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말씀의 빵을 많아지게 한 다음에 남은 조각을 모으면, 다시 말해서 각자가 듣고서, 들은 말씀에 자기 생각을 한 마디씩 보탠다면, 그 자리에 없던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면, 남은 빵 조각을 모아서 그 자리에 없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한 그 기적이 재현되리라는 것이 나의 희망사항이다.

 

이제 오늘 복음에 정신을 집중해 보자. 그 지리적 장면을 재구성해 보자. 빵을 많아지게 한 기적이 있음 직후에, 군중의 괜한 열성을 피해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호수 맞은 편으로 피해 가신다. 하지만 군중은 물러서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배에 올라서 그곳에 이른다. 장소는 카파르나움 회당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긴, 긴 설교가 나온다. 오늘 복음 구절은 그 설교의 첫대목이다.

 

예수님은 그 군중이 당신을 찾는 이유를 아셨다.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었다.” 표징을 보고서도 표징이 의미하는 데로 시선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표징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기적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설교 전체가 예수님의 인내로운 노력, “하늘에서 내려온 빵, 생명을 주는 빵”에 시선을 두도록 사람들을 돕는 노력을 담고 있다. 그 빵은 바로 당신이고 당신의 말씀이고 당신의 목숨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주 중요한 말씀인 고로 여기에 시선을 집중코자 한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 주장은 예수님이 당신 인품에 신앙의 초석을, 당신 설교 전체의 토대를 설정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찬의 성사를 얘기함이 무의미하다. 예수님에게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빵을 알아보지 않고서는 성체란 무의미하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성찬은 마술 의식이 되어 하느님께 환심을 사서 물질적 이득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받드는 성스러운 식사가 되는데 하느님과의 내면적 친교는 거기 없다.

 

모든 미사에서 선언하듯이, 성찬은 “신앙의 신비”다. 예수님은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제단 위에 현존하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내게 믿음이 없으면 그분은 거기 안 계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교향악단이 제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귀먹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앙 자체를 얘기하느니보다는 신앙의 적, 곧 의심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다. 성체에 관한 기적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기적을 들어서 그 얘기를 하고 싶다. 이탈리아 볼세나의 기적을 예로 들자. 오르비에토 성당에 그 기적의 유물이 남아 공경을 받고 있다. 보헤미아의 어느 사제가 로마로 여행하는 중이었다. 볼세나에서 미사를 집전하는데 아주 심한 의심이 그를 엄습해 왔다.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현존하시느냐는 의심이었다. 그런데 축성한 호스티아가 자기 손에서 살덩어리로 변하고 거기서 피가 배어나오자 그 의심에서 풀려났다는 얘기다.

 

그 사제가 이런 의심과 싸운 첫 인물은 아니었고 마지막 인물도 아니었다. 다른 예를 하나 들겠다. (내게 부쳐온 상담자의 편지다.)

 

“저는 50세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하느님을 믿었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내 평생 주일과 축일의 미사를 거른 적이 없고 다만 영성체는 자주 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처신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럼 어디에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일입니다. 미사 중에 신경을 염송할 적마다 그 구절만 오면 입 밖에 내기가 힘들고 생각이 딴 데로 벗어납니다. 아주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커졌고 최근에는 영성체를 아예 그만두었습니다.”

 

이 글을 받아보고서는 나는 다시 한 번 의심이라는 문제에 고심하게 되었다. 믿음에 그림자처럼 곧잘 따라붙는 의심 말이다. ‘의심’이라는 말은 애매한 단어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띨 수 있다.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이다. 사람을 줏대 없이 만들고 매사를 의심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그런가 하면 강직하고 정신적 성실을 의미하는 수도 있다. 확실치 않은 것을 확실한 것처럼 간주하거나 주장하지 못하게 막는다. 데카르트 이후로 “방법적 회의”라는 것이 등장하였다. 의심이라는 것을 이상화하여 확실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무턱대고 교조주의자라고 욕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의심치 않는 것도, 매사를 의심하는 것도 둘 다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얘기들은 한편에 젖혀두고, 믿음에 관한 한, 언제 의심이 안 좋은 것이고 언제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자. 무지와 나태의 결과로, 다시 말해서 조금만 노력하면 문제를 깊이 살필 수 있고 그래서 의심을 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마냥 의심을 품고 있으면 안 좋은 의심이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하는 의심은 나쁜 것이다. 진리가 발견되면 그대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라고 요구한다. 그대더러 행동하라고 요청한다. 그렇지만 의심 중에는 결단과 행동을 미루고 적당히 타협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의심은 책임지지 않는 핑계가 되고 게으름을 덮는 수작이 된다.

 

믿고 싶고 의심을 떨쳐버리고 싶은 데도 의심이 솟아나고 의심이 덮칠 경우는 자기 탓이 아니다. 의심을 키운 것이 아니고 의심에 습격 받는 경우는 제 탓이 아니다. 이럴 때는 의심이 그의 믿음을 망치는 것이 아니고 강화하고 정화한다. 바람이 횃불을 꺼뜨리지 못할 경우는 더 활활 타오르게 돕는다. 의심에 쌓이는 것은 믿음의 자연스러운 한 측면이다. 믿음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고 그만큼 공덕이 크게 만든다. 위대한 성인들도 의심에 시달렸고 신앙의 시험을 겪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런 경험이 있었고 그것을 “신앙의 어둔 밤”이라고 불렀다. “제가 하늘의 행복과 하느님의 영원한 향유를 노래할 적에는, 제가 느끼는 바를 노래하는 게 아니라 제가 믿고 싶어 하는 그것을 노래하고 있답니다.” 믿고 싶어 한다는 것도 이미 믿는 것이다. 둘 다 믿음의 한 형태인데 우리에게 달려 있다.

 

마음 속 깊은 바닥을 읽으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의심을 키운 것이 언제고 의심을 당한 것이 언제인지 아신다. 어떤 경우가 신앙의 부족이고 어떤 경우가 신앙에 대한 유혹인지를 아신다. 저 보헤미아 사제에게 기적을 보여주신 것은 그 사람이 진리를 알고자 몸부림쳤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 가엾은 사제를 그 기적으로 놀라게 만드시거나 벌주시거나 혼란케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돕고자 하신 것이다. 아시다시피 바로 그 기적이 일어난 이듬 해, 즉 1264년에 “주님의 성체 축일”이 제정되었고 “복되다, 의심이여!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선익을 끼쳐준 의심이여!”라는 성가가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생긴다는 이유만으로 영성체를 그만둘 필요는 없다. 부활하신 분과 접촉하고 그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토마 사도는 의심을 극복하였다. 우리는 오로지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리자(마르 9,23).

 

이 강론을 마치기전에 누군가 제기할 만한 질문을 내놓고 싶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염송할 때마다 “하나인 세례를 믿으며”라는 구절은 나오는데 “성체성사를 믿으며”라는 구절은 왜 안 나오느냐는 물음이다. 성체성사가 우리 신자들에게 그토록 중요한데 왜 신앙고백에 안 나오느냐는 의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 신앙고백이 만들어 지던 시대에는 성찬에 대한 토론이나 이단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례에 관한 시비만 나왔었다. 교회의 관습을 무시하면서 억지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단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나 배교자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고백에 저 구절이 들어갔다. 신앙고백문에 성체성사 구절이 없어서 서운할지 모르지만, 종이에 인쇄된 신경에는 그 구절이 없더라도 우리 마음에 새겨진 신경에는 그 구절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