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1. ㉮ 강아지 (l978.8.20: ㉮해 연중 20)

2. ㉰ 불을 지르러 왔다 (1989.8.20: ㉰해 연중 20)

3. ㉯ R.Cantalamessa, "내 살은 먹을 것이요 내 피는 마실 것이다”(2006. ㉯해 연중 20)

 

 

1. 강아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l5,2l-28)

 

우리가 쓰는 말로 미루어 배달겨레를 빼놓고는 모두가 오랑캐다. ‘되놈’, ‘왜놈’, ‘양놈’이라고 낮춰 부르는 일이며, 손바닥만 한 땅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평안도와 함경도를 곧잘 헐뜯는 우리 품성으로는 오늘의 복음을 십이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예수께서는 겐네사렛에서 방금 티로 지방으로 넘어오신 참이었다. 마침 서울에서 왔노라 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법학자가 "당신이 자칭 메시아라면 왜 유대교 전통을 무시하는 거요?"라고 시비를 걸었던 뒤라 적이 마음 편치 않은 길에 가나안 여자가 붙들고 늘어진 것이다. 정결(淨潔)의 율법을 무시한다고 욕을 먹은 터수에 부정한 이방인, 더구나 여자와 상종한다는 것은 더욱 꺼림칙했다.

 

스승은 말씀이 없고 마귀 들린 딸의 어미는 갈수록 악착같아진다. 어느 어머니가 이런 기회에 염치를 가리겠는가! 제자들은 보다 못해 "한 푼 줘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는 투로 한마디 거든다. 스승의 말씀은 더욱 의아스러워진다. "비록 내 자식들(이스라엘)은 배불러 못 먹겠다고 내밀어 놓지만 그 음식(구원)을 너희 강아지(이방인)에게 던져 주기는 아깝다." 그러나 이 정도에 물러가는 어미는 없다.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은 구원을 저버리고 해 뜨는 나라에 사는 우리 배달겨레가 복음을 받았다고 해서, 우쭐대지 말라고 경고한다. 만원 버스에 가까스로 올라탄 사람이 다음 정거장부터 "그만 태워라, 고무 버스냐?"고 고함치기 일쑤다. 강아지가 부스러기를 얻어먹었다고 해서 어느새 주인 아이들 행세다. 그것까지는 좋으나, 남도 같은 처지에 오르는 것이 못마땅하기 쉽다. 하느님은 지엄 지존하셔서 믿지 않는 자는 죄로 판단하시고 죄인들에게 영벌을 내리시며 이 불의한 세계와 인간들에게 진노하고 계시다고 우리는 곧잘 말한다. 심지어 하느님이 악인 선인을 가리지 않으시고 햇볕과 비를 내리시고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하시며 만사를 선으로 이끄심이 못마땅해 보인다. 오만하고 옹졸한 선민의식이 우리 마음에 싹튼 징조다.

 

그러나 천당에서까지 부동산 투기로 한밑천 잡을 생각은 말자. 하늘에는 방이 많아서 아무리 몰려 들어가도 자리가 붐비지 않는다. '나의' 하느님이지만 '오랑캐들의' 하느님도 되시고 미워 죽는 '이웃들의' 하느님도 되신다. '우리' 아버지시다. 하느님은 당신 것을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신다. 하느님의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오늘의 복음에서 새삼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l978.8.20: ㉮ 연중 20)

 

 

2.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1,49-53)

 

성서가 놀라운 책인 이유는 그 속에 동서고금 인간들에게 일어날 만한 좋고, 궂은 이야기들이 죄다 담겨져 있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심보와 행실이 거기 다 보이기 때문이다.

 

안팎에서 보기에 교회에도 이데올로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 싸움은 관변 언론과 공작 정치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지만, 요즈음 사목자가 본당에서 겪는 고충과 뜻 있는 신자들이 주변의 이웃에게 당하는 시달림은 대단한가 보다. 정말 교회 안에 불이 붙은 듯하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한국 교회의 참모습과 그리스도인의 참 신앙은 타고남은 잿속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분열과 다툼이 당연하다는 투다. 마치 대통령 선거 때처럼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3 : 2로 패 갈라 싸우게 되었다. 주교님들이 옳았느니, 사제단이 옳았느니, 신부님이 차마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 오죽했으면 그 소리가 나왔겠느냐…. 혹자는 그분들이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깨뜨렸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고,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실현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결과가 평화이다.”(사목헌장 78)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저 마음의 평안만 얻으면 되고, 손아귀에 든 하찮은 안전을 지켜 주십사 하며 자신의 이기심을 대변하러 온 사람이 교회에서 찾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곧 죽음의 고요다.

 

미움과 분열은 악마와 닮았다. 그러나 정의와 선과 민족 사랑을 위해 예언자다운 선택을 한 이가 당하는 증오와 분노는 그 사람의 탓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북한에 대한 무지막지한 우리의 증오가 이번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폭로되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한 복음 앞에서는 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반(反)복음적이다."

 

우리 하느님께서 배달겨레와 한국 교회를 위해 베푸시는 은총의 잔치가 될 제 44차 성체대회가 두 달 앞으로 다가 왔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 23).

 

가난한 민중과 극소수 부유층, 영남과 호남, 남과 북이 화해하지 않은 채로 거행하는 성체대회는 서울올림픽, 평양축전처럼 반쪽짜리 대회이며, 아무리 화려하고 경건하게 거행된다 할지라도,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는 사도의 말씀을 듣기 십상이다(I코린 11,29). (1989.8.20: ㉰ 연중 20)

 

 

3. Raniero Cantalamessa, "내 살은 먹을것이요 내 피는

   마실것이다   

    (2006. B. XX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Il mio sangue è vera bevanda

 

 

이 주일 복음 구절이 무엇인자 살펴보자.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설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빵에 관한 설교에 포도주에 관한 말씀이 첨가되었다는 점이 새로운 요소다. 음식의 이미지에 음료의 이미지가 덧붙었다. 살의 표징에 피의 표징이 첨가되었다. 여기서 성체의 상징성은 절정에 다다른다.

 

지난 주일에는 생명의 빵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니 오늘은 그리스도의 피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겠다. 우리가 면병만 영하고 포도주는 영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성찬의 성사를 그리스도의 몸의 성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찬의 성사는 그리스도의 피의 성사이기도 하다. 성찬이 잔치이니까 잔치에서는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마시기도 하지 않는가?

 

그럼 예수님이 당신 몸만 주려고 하시지 않고 포도주로 상징되는 당신 피까지 주려고 하셨을까? 피가 무엇을 나타내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피라는 것은 신체의 일부 요소에 그친다. 그러나 성경 시대의 사고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 당시 피를 먹는다는 것은 성스럽고 하느님께만 속하는 생명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피가 생명의 근원이었으므로 피를 흘림은 죽음이 깃든 표지였다. 당신의 피를 준다는 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주신다는 뜻이며, 그 죽음이 간직하는 모든 것, 곧 죄의 사함과 성령의 선사를 포함했다. 주님의 몸과 피의 성사라는 말은 그분의 생명의 성사요 그분의 죽음의 성사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지상에서 흙에다 흘린 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즈음 날마다 신문을 펴면 거기 유혈낭자한 살인과 학살과 전쟁이 나온다. 전장에서, 게릴라들이, 폭탄 테러에서, 교통사고에서 취재한 기사들이 피가 범벅이 된 사진을 싣고는 한다. 성서에는 “아벨의 피가 땅바닥에서 울부짖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창세 4,10). 그 울부짖음은 세기를 통해서 증폭되기만 하였고 지금은 인류 전체가 울부짖는 거대한 함성이 되었다. 피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빵의 표지로 제단에 오르는 것이 인간의 노동이라면, 피의 상징으로 제단에 오르는 것은 지상의 모든 고통일 것이다. 거기서 그 고통이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 희망과 용서에 비추어 그 문제가 해답을 얻어야 한다.

 

이런 기회에 헌혈하는 사람들과 그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을 기억하고 싶다. 헌혈은 성찬의 성사를 모방하는 참으로 탁월한 행동이다. 다른 사람이 목숨을 이어가도록 자기 팔뚝을 내밀어 피를 뽑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행동을 정말 가까이서 실천하고 본받는 셈이다. 헌혈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기 말로 삼아도 될 것이다. “받아라! 이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바치는 내 피다!”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 이것 역시 성체성사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을 두고 “죽으심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셨다.”라고 한다.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말이 성립한다. 자기가 죽어가면서 다른 누가 목숨을 잇게 돕는다. 적어도 그리스도 신자라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 경우에, 사랑하는 사람이 돌연사를 당할 경우에 이런 봉헌을 실시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피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당신의 피를 포도주의 표지에 감추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색깔이 비슷해서? 빵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에 표지의 의미를 잘 새겨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자, 포도주가 사람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기쁨과 명절, 축제를 가리킨다. 빵처럼 요긴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기호식품에 해당한다. 즐기는 음식이다. 그냥 마시기만 하지 않고 기분 좋은 일에 한 잔 하면서 건배도 한다. 빵은 사람들의 필수 식품이고 포도주는 식구들의 기분을 돋우는 식품이다. 성경에도 “술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빵은 사람의 마음에 생기를 돋운다.”(시편 104,15)라는 말씀이 나온다. 포도주는 삶에서 시(詩)이고 색깔을 나타낸다. 그냥 걷는 일에 비추어 춤추는 동작이 사뭇 다르듯이, 노동하는 것에 비추어 놀이하는 것이 사뭇 다르듯이 말이다.

 

예수님이 성체성사에 빵과 물을 택하셨더라면, 고통을 성화하시는 의미는 띄었을 것이다. (빵과 물만 먹는다는 말은 서양에서 고행을 뜻하고 재를 지키고 속죄한다는 의미다.) 빵과 포도주를 택하셨다는 사실은 기쁨과 즐거움을 또한 성화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새 술은 구약 전체에서 메시아 시대의 잔치를 상징하였다.

 

그럼 똑같은 사물이 피로서는 고통의 상징이고 포도주로서는 기쁨의 상징이 된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가? 서로 상반되는 무엇이 아니던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그랬듯이 사랑으로 바치는 희생에서는 둘이 상반되지 않는다. 성서에서는 포도주를 “포도의 피”라고 일컫는다. 인간사에서 사랑과 희생 사이의 신비로운 연관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에서는 고통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젊은 부부를 보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는가? 아기가 하나 태어나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이 필요한가?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얼마나 큰 기쁨이 생기는가? 그래서 성찬의 포도주는 희생제사의 기쁨을 나타낸다.

 

둘 중의 어느 편을 택하겠느냐 하면 나라면 서슴없이 기쁨을 택하겠다. 우리 인간은 고통을 당할 적에 하느님께 눈을 돌리게 되어 있다. 어떤 재앙이 닥쳐서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느님께 눈을 돌리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대부분이 그렇다. 그런데 기쁨은 우리 혼자서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하느님 몰래, 우리 혼자서 누릴 수도 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한테서 뼈다귀를 하나 던져 받으면 즉시 돌아서서 멀리 달아나 거기서 뼈다귀를 뜯고 좋아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렇게 달아나는 품이 마치 주인이 그 뼈다귀를 다시 빼앗아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하다.

 

인생의 기쁨도 성찬의 분위기에서 누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향유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하느님이 그 자리에 현존하시고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를 지켜보신다고 해서 우리 기쁨이 반감되지 않는다. 반감되기는커녕 배가된다. 그분이 그 자리에 계시면 우리가 얻은 자그마한 기쁨이 커다란 기쁨, 하느님이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마련하신 영원하고 시들지 않는 기쁨을 희구하는 계기가 된다. 옛날 어느 성인이 힘들여, 힘들여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아, 아름답다. 천국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난 안 가겠다.” 그가 이런 소리를 중얼거리자 다른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네가 이런 것으로 만족한다면 넌 참 바보다. 네가 지금 누리는 기쁨을 장차 올 기쁨과 비교한다면, 너는 진짜 하늘을 두고 종이에 그려놓은 하늘을 보면서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성체성사에서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이치가 바로 이렇다. 우리가 성혈을 영하는 기회는 적지만 거양성체 때에 그 이치를 묵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체만 영해 주는 까닭은 살에는 피가 섞여 있으므로 성체에는 성혈이 포함되어 있다는 설명도 있다.

 

성서에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히브 9,14)라는 구절이 있다. 펠리컨이라는 새가 성체성사의 상징이 되는 것을 까닭이 있다. 이 새는 새끼들에게 먹일 것이 없으면 자기 가슴을 부리로 쪼아서 그 피를 새끼들에게 먹인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성체송가(Adoro te devote) 가운데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 예수, 거룩한 펠리컨이여, 부정한 우리를 당신 피로 정하게 만드소서. 그 한 방울로 온 세상이 그 죄를 용서받고 남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