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1. ㉯ R.Cantalamessa, “에파타! 열려라!” (2006. ㉯해 연중 23)

 

 

1. Raniero Cantalamessa, “에파타! 열려라!” (2006년 B해. 연중 23)

(2006. B. XXII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Effatà. Apriti!    Marco 7,31-37

 

 

오늘 복음 구절은 예수님이 행하신 멋진 기적 얘기를 전해 준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이 기적을 하시는 모양을 보면 마술지팡이를 쓰거나 손놀림을 하듯이 행동하지 않으신다. 또 말더듬이의 귀를 만지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시는 장면은 그분이 사람들의 고통에 직접 몸 담그시는 듯하고, 사람들의 불행을 피부로 느끼신다는 인상을 준다. 당신이 그들의 짐을 지시려는 듯하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신 이런 사화를 끝마치면서 복음사가는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라는 성서 구절을 덧붙인다.

 

귀머거리를 눈앞에 두면 우리는 곧잘 조롱을 하는데 예수님은 연대감과 동정을 나타내신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첫 번 가르침을 내리신다. 우리가 함께 살거나 주변에서 보는 귀머거리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주문을 외는 일, 기적적으로 그에게 청각을 돌려주는 일은 우리 권능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 인간을 존중해주고, ‘귀머거리’라는 단어 대신에 ‘농아자’라는 말로 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정성을 갖고 그 사람을 대할 수는 있다.

 

귀머거리를 놀리거나 그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것은 묵은 세상의 버릇이고 아주 묵은 행태다. 구약성경에도 이런 경고가 나온다.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레위 19,14) 귀를 먹은 어느 여성이 남긴 글이 있다. “귀머거리는 아무런 공감도 갖지 못한다.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하기 때문에 귀찮고 화가 난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하고 소외되고, 남들이 자기를 상대로 거의 위협조로 ‘알아들었니, 못 알아들었니?’ 하면서 윽박지르는 데 겁을 먹는다. 귀머거리는 사람들의 세계 한 가운데서 고립되어 살아간다.”

 

귀먹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는 일이 무엇이고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는데 심리학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면에서, 또렷한 음성으로, 명료하고 분명하게 또박또박 말을 해 주는 것이 첫째가는 친절이다. 그는 입술모양과 나의 동작을 보면서 귀로 잘 듣지 못하는 바를 보충해서 알아들을 것이다. 필요하면 되풀이해서 온유하게 말하되, 귀찮거나 짜증나는 표정을 해서는 안 된다. 전보다 목소리를 깔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귀가 먼 사람 앞에서 목소리를 묵직하게 깔고 말하거나 그의 등 뒤에 있는 사람에게 눈짓을 하면서 얘기하는 것은 극력 피해야 한다. 귀를 먹으면 그는 이미 상대방이 자기한테 못된 말을 한다는 의혹을 품으며,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가 잘 듣지 못해서 말을 오해한 듯하더라도 괜히 명랑한 척 하면서 그를 일깨우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그는 더 의기소침하고 비하를 느낀다. 정말 그리스도신자답고 인간다운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자기 가족이나 주변에서 귀머거리나 난청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는 집안이 있을까? 더구나 노인들 말이다.

 

하지만 오늘의 복음이 귀머거리에 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복음사가들이 어째서 예수의 말씀 “에파타!”를 원어로 성경에 실어놓았을까? 에파타는 아람어다. 예수님이 직접 쓰신 언어가 아람어다. 차라리 그분이 쓰시던 사투리라고 하는 편이 맞다. 학자들 생각에는 “압바(Abba)"니 ”아멘(Amen)"이니 하는 단어처럼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예수님이 직접 발설하신 단어라는 말이다. 정말 그분에게서 남겨진 일종의 “유해(遺骸)”인 셈이다. 그런데 그 단어를 복음서에 유독 돋보이게 만든 것은 그 단어가 단지 신체적 귀머거리만 아니고 영적 귀머거리에도 해당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이 단어는 곧 세례 예식에도 들어갔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유아세례 때에 사제는 아기의 귀와 입술을 만지면서 “에파타! 열려라!”라고 염송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과 찬미와 생명에 귀와 입술이 열리라는 축원이다.

 

놀랍게도 오늘의 복음은 귀먹은 귀머거리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귀가 뚫린 귀머거리에게도 해당한다. 시편에 나무로 만든 우상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네.”(시편 115,5-6)라고 읊은 그대로다. 우리 마음은 나름대로 듣는 귀가 있고 나름대로 보는 눈이 있다. 이것은 전 인류가 갖고 있는 신념이고 여러 가지 양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도 “열린 마음”이니 “닫힌 마음”이니 하지 않는가? 타인의 불행과 곤란에 동정심을 갖지 못하고 닫힌 마음을 지탄하지 않는가?

 

“에파타!” “열려라!” 이 한 마디는 귀머거리에게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한 인간 전체에 건네는 말씀이다. 자기 속에 갇히지 말라고, 남들의 필요와 고통에 무감각해지지 말라는 초대다. 인간들과 자유스럽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수립하라는 초대요, 타인들과 주고받는 삶을 살라는 초대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열려라!”는 한 마디는 교회를 통해서 전수되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라는 초대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게 허심하라는 초대다. 그런 뜻에서 그리스도의 “에파타!”를 메아리 하는 유명한 한 마디가 있으니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직에 취임하면서 “그리스도께 문을 열어 드리십시오!”라고 호소했던 구절이다.

 

성바오로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음의 저 깊은 경청이 없이는 믿음이 생길 수 없다. 그럴싸한 핑계가 나돈다. 믿음은 선물이라고, 그런데 자기는 그 선물을 못 받았다고, 그래서 자기는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맞을지 모르지만 먼저 과연 하느님이 내게 말씀을 하시도록 진지하게 허심한 적이 있느냐고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하느님이 내게 말씀하실 가능성을 드려 보았느냐는 얘기다. 사무엘처럼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말씀드려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때로는 영혼의 귀로 보다 잘 듣기 위해서 육신의 귀를 닫는 편이 더 좋을 때도 있다. 앞에서 귀머거리가 되어 그 곤경을 털어놓은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그의 말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삶을 진지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영원(永遠)만을 찾을 생각으로 봉쇄수녀원에 몸을 숨기는 처녀들이 있다. 나의 봉쇄수도원은 나의 귀머거리다. 날마다 침묵 속에 삶아감으로써, 외부 세계와 단절되고 시끄러운 소음에서 단절되고, 소란한 세상살이에서 단절됨으로써 나는 평정에 이르렀고 원숙한 삶에 도달하였다. 예수님의 ”에파타!“라는 말씀이 나의 생애에서도 일어났다. 내 마음과 지성을 열어 당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셨다.” 그 사람에게는 귀가 먹은 불행이 화안한 봉쇄구역이 된 셈이다. 거기서 세속의 그 소란스러운 소음을 피하여 보다 진정하고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가장 위대한 귀머거리 베토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그가 생애의 가장 훌륭한 선율들을 쓴 것은 귀가 먹은 다음이었다. 제9 교향곡의 그 웅대한 합창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세계를 발견하려면 억지로 신체의 귀를 먹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선택에 의해서 귀머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선별적인 귀머거리 말이다. 무엇을 들어야 할지, 무엇을 듣지 말아야 할지 골라서 행동한다면 그것은 선별적인 농아(聾兒)라고 하겠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자기 신자들에게 이런 충고를 남겼다. “누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나쁘게 말하거든 귀머거리가 되시오.” 우리도 “누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이웃사람에 관해서 나쁘게 말하거든 귀머거리가 되시오!”라는 충고를 들을 만하다. “누가 그대에게 아첨하고 부정한 소득을 그대에게 약속하면서 그대를 부패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시도하거든 그대는 귀머거리가 되시오!” “라디오나 음반에서 추접하고 모독적인 가사가 흘러나올 때에, 천박하고 야비한 언어가 쏟아져 나올 적에 귀머거리가 되시오!”

 

누가 우리를 헐뜯고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 적에도 귀머거리가 될 필요가 있다. 한 마디 한 마디 대꾸하고 말싸움을 하느니 그의 악담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게 잠자코 버려두는 편이 나을 경우가 많다. 시편작가는 성서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 인용한 구절을 남겼다. 온갖 비아냥거림과 독설에 묵묵히 인종하는 자세다. “저는, 귀머거리처럼 듣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못합니다. 저는 듣지 못하고 입으로 대꾸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시편 38,14) 인간 사회에서, 특히 가정에서 이렇게 해서 파국을 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화가 나서 내뱉는 말을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시늉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파탄을 피할 수 있었던가!

 

그러니 앞서 인용한 귀먹은 그 여성의 말을 우리 생각으로 삼아서 우리도 자그마한 봉쇄구역을 만들자. 더 잘 듣기 위해서 귀머거리가 되자. 우리 시대에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소음과 무익한 언어의 홍수 속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귀머거리가 되는 일은 심리학적 필요이기도 하다. 환경오염 가운데는 소음공해도 포함된다. 어느 날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스라엘아, 조용히 하고 들어라!”(신명 27,9) 우리도 “그리스도인이여, 조용히 하고 들어라!” 라는 말을 할 만하다.

 

오늘의 복음 구절이 예수님을 두고 군중이 하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들려준다.  

“저 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어떤 설교가는 이 구절을 혼동해서 “귀먹은 이들은 말하게 하고 말 못하는 이들은 듣게 하시는구나!” 라고 인용하던 소리를 내가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기적의 축에 들지 못한다. 지금까지 얘기한 말을 간추려 하자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모양으로 가다듬어도 될 것 같다.

 

“복음 말씀이 하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 기울여 듣는다면 귀먹은 이들도 듣게 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는 사람들도 귀거머리로 만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