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1. ㉯ R.Cantalamessa,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2006. ㉯해 연중 26)

 

 

1. Raniero Cantalamessa,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2006. B. XXV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Chi non è contro di noi è per noi    Marco 9,38-48 

 

사도 중의 한 사람, 곧 요한은 누가 제자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보고서 그런 짓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고서 그 일을 스승에게 보고하였는데 이런 대답을 스승에게서 들은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현대에 와서도 아주 요긴한 가르침이다. 우리 동아리 밖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고 교회에 몸담지도 않은 사람이 선행을 하고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경우,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그런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신학에서 얘기하기로는, 그리스도 신앙이나 세례나 교회 소속이라는 통상적인 길 말고도 하느님께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길이 있다고 항상 인정해 왔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명시적으로 공표된 것은 현대에 와서다. 신세계와 세계 여러 지역이 발견되고 사람들의 숫자가 무한히 많으며 자기 탓 없이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복음을 들었어도 자기나라를 정복한 침략자들이나 가차 없이 수탈해가는 식민주의자들에게서 복음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아주 왜곡된 형태로 들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도저히 그대로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사목헌장 22항)라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바뀐 것인가? 아니다. 두 가지는 여전히 우리가 믿는다. 첫째로, 예수님이 객관적으로 또 사실상 인류 전체의 유일무이한 구세주요 중재자이시라는 점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베푸는 그분의 죽음 덕분에 구원받는다. 두 번째로, 눈에 보이는 교회에 명시적으로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를 향해서 방향을 잡고 있고,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보다 넓은 의미의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이 사람들, “밖에 있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두 가지를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과 그 신앙의 가치에 적극적으로 맞서거나 반대하지 않아야 하고 의도적으로 하느님께 맞서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하느님을 명시적으로 알고 섬기고 사랑하는 지경은 안 되더라도, 적어도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특히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도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뒤따라 나온다.

 

그런데 이런 교리를 밝히고 난 다음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 우리 심리를 올바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덕분에, 외양적으로 교회에 분명하게 소속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배타적인 특전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착실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이런 가르침을 두고서 우리 신자들은 오히려 더욱 기뻐하고 한없는 즐거움을 느껴야 마땅하다. 교회 밖에 있는 형제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라는 말씀처럼 마음이 놓이고 하느님의 어지심을 드러내는 사실이 어디 있겠는가?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정신이 우리에게 깃들어야 한다. 이번 주일 첫째 독서에서 모세가 한 말대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고 하던 말이 우리 마음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직접 믿지 않고서도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니 사람마다 자기 신념과 신앙으로 자족하란 말인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선포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뜻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단지 부정적인 신앙 선포를 그만두고 적극적인 신앙 선포에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에게 구원이 있소. 그분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단죄를 받소!”라고 외쳐대는 소위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따위는 부정적 신앙 선포라고 하겠다. 그런 신앙 선포는 그만두어야 한다. 긍정적 예수 선포는 이렇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알고 그분을 구세주로 모신다는 것은 기막히게 좋은 일입니다. 삶에서도 그렇고 죽음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