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

 

1. ㉮ 울타리 밖으로 뻗어가는 포도 줄기들 (1996.10.6: ㉮해 연중 27)

2.  ㉯ R.Cantalamessa, “둘이 한 몸이 되리라” (2006. ㉯해 연중 27)

 

 

1. 울타리 밖으로 뻗어가는 포도 줄기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태 21,33-43)

 

쌀농사가 기울면서 어느 해부터인가 추석이 가까우면 우리네 들녘에서도 포도거두기가 한창이다. 봄철에 사정없이 가지치기를 하여 말끔하게 뻗은 포도나무들이 밭고랑을 타고 가지런한 품이 성당에 나란한 장궤틀 같다. 알이 들 무렵 사정없이 솎아 냈고 물이 오르면서 종이 봉지로 고이 싸매 둔 송이가 검보라 빛으로 향기를 풍기면 주일미사에 착실한 신자들 모습이다. 이사야가 노래한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이사 5,1-7)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이사 5,1-2)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 듯한 이사야의 이 노래를 듣고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한국 천주교를 머리에 떠올리는 바보 있으면 손들어 봐! 아무렴, 이사야마저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이사 5,7)라고 분명히 못 박았으니까…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하여 하늘의 저주를 받은 유대인들, 히틀러가 씨를 말리다 만 유대인들이야말로 참포도 대신 들포도나 맺던 놈들이니 망해도 싸지!’ 우리는? ‘우리야 선업의 열매가 주렁주렁한, 주님의 포도가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들도 ‘그리스도를 죽였다가 포도원 주인 하느님이 가차 없이 없애 버린 이스라엘 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럼 우리는? ‘우리야 그자들의 손에서 포도원을 인수받아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충직한 농부들이고말고!’

 

주님의 끝맺음 말씀,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는 구절을 듣고서 만에 하나라도, ‘한국 천주교가 내버린 어떤 짱돌이 감히 새 역사의 머릿돌이 되리라.’고 떠벌이는 자가 있다면 저주를 받을진저! 그래서 성경은 자칫 미운 놈들 족치는 북채로 쓸 것이지 우리더러 회심하라는 징소리는 결코 아닌 성싶다. 하물며 주님의 사도들이라는 사람들에게 감히 무엇을 깨우쳐 줄 요량으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여!

 

그런데 아무리 농부가 부지런하더라도 간간이 포도원 울타리 밖으로 뻗어나는 줄기가 있게 마련이다. 뻗어나는 순은 생명력의 상징이니까. 거기도 실한 송이들이 달려 있으면 나이 지긋한 농부는 담 밖을 오가는 아이들이나 하다못해 들짐승이라도 목을 축이게 그냥 두리라. 담 밖으로 삐져나갔다고 해서, 남이 따먹는 것이 싫어서 "싹둑 잘라 버려!" 하지는 않으리라.

 

하느님의 영이 바람 불듯 자유자재임을 감지하는 분들이라면 복음과 교회라는 밑동에서 수액을 함께 받는 이상, 제도교회 울타리 밖으로 뻗어 나간 가지라고 해서, 비공인단체라고 하여 모조리 베어 버리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현자 가말리엘의 저 여유쯤은 마음에 품고서 만일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8-39)라면서 잠시 신중하게 헤아릴 것이다. 겨자나무 같은 교회라면 그 건물에 비공인단체가 깃들이지도 못하게 아예 쫓아 버리지는 않으리라. 하늘의 온갖 새들이 깃드는 품이라면, 날갯짓이 좀 거칠다 해도 제 새끼들이 품속이라고 파고드는 것을 굳이 마다하겠는가?

(1996.10.6: ㉮ 연중 27)

 

 

2. Raniero Cantalamessa, "둘이 한 몸이 되리라"

    (2006. B. XXVI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I due saranno una carne sola

 

오늘 복음은 이혼을 단죄하는 전형적인 성서구절로 꼽힌다. 그러나 나로서는 같은 식으로 이혼을 단죄하고 싶지 않다. 신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복음과 교회의 입장이 어떻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예수님 말씀이 이혼을 금지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이혼에까지 몰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가르친다는 점이다. 이혼이 아니면 적어도 불가피하게 법적인 별거라도 들어가야 하는 그런 처지까지 이르지 않는 길이 무엇인지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복음은 꼭 일이 터진 다음에 압력과 조치를 내리는 게 아니고 미리 예방도 한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것은 “쓰다가 버리는” 소비주의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자기기나 연장이 고장 나거나 흠집이 나타나면 고칠 생각을 않고(그런 수리작업을 해 주던 직업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당장 새것으로 갈아치울 생각부터 한다. 멋진 신제품을 바라는 것이다. 결혼에까지 이런 사고방식을 적용한다는 것은 크게 틀려먹었고 아주 치명적인 잘못이다.

 

결혼은 도자기라는 장식품이 아니다. 도자기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제품이고 조금도 더 좋아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니며, 따라서 금이 가거나 하면 비록 풀로 붙이더라도 가치가 반감하는 그런 물건이다. 결혼은 삶에 해당하고 따라서 삶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그럼 삶은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삶이란 유리장 속에 고이 모셔놓고 부딪치거나 변색하거나 외부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게 잘 보존할 무엇이 아니다. 삶은 끊임없는 상실로 이루어진다. 그 상실을 우리 유기체는 날마다 복원하고 있다.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범하면 즉각적으로 대처하고 또 예방하고 유기체에서 퇴치한다. 적어도 몸이 건강한 동안은 그렇게 한다. 결혼은 바로 이런 생명의 법칙을 반영해야 한다.

 

이처럼 곡절이 많고 그러나 희망과 꿈이 간직된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부부들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한 얘기를 하나 하겠다. 우리 할머니들과 엄마들에게 탁월했던 기술을 하나 다시 써먹는 일이다. “수선해서 쓰기”가 그것이다. “쓰다가 버린다.”는 사고방식을 “쓰다가 고친다.”는 사고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오늘날 물건을 수선하는 직업이나 가게를 찾기가 무척 힘들다. 신발이나 양말, 셔츠 등을 수선해서 쓴다는 것이 부끄럽고 체면이 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 의복을 수리해 입고 싶지 않거든 적어도 자기의 결혼에는 수선해서 쓰는 방법을 적용해 보라. 찢어진 데를 기우고 수선하라. 그리고 즉시 기워라. 수선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수선해서 쓰는 사람은 알고 있다. 즉시 수선하는 것이 비결임을 잘 알고 있다. 시간이 가면 신발이나 옷의 터진 데가 넓어지고 벌어지고 결국 손쓸 수 없게 된다.

 

부부생활의 터진 데를 수선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성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두고 아주 훌륭한 충고를 내리고 있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페 4,26-27)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하십시오.”(골로 3,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6,2).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점은, 찢어지고 기우고, 위기를 겪고 극복하고 하는 가운데 결혼이 시들해지는 것이 아니고 성장하고 세련된다는 사실이다. 술이 오래 묵을수록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값이 올라가는 것과 흡사하다.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임하는 것이 비결이다. 매일 아침, 아니 매순간 우리 삶이 다시 시작하듯이, 결혼도 매순간 다시 시작하는 일이 가능하다. 갖가지 시련과 위기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둘이 서로 원해서 매순간 다시 출발하고, 과거를 덮고서 새로운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

 

예수님이 당신 생애의 첫 번 기적을 하신 곳은 갈릴래아의 가나촌이었다. (술이 떨어져) 신랑신부의 행복한 잔치가 파탄나지 않기 위해서 기적을 하셨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맨 마지막으로 나온 그 술이 잔칫상에서 제일 좋은 포도주였다고 한입으로 말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기 결혼잔치에 초대한다면, 오셔서 그런 기적을 해 주십사 부탁드린다면, 맨 마지막으로 마신 포도주 곧 수년의 세월이 흐르고 성숙하고 노경에 든 사랑과 결합이 신혼초의 사랑과 결합보다 훨씬 훌륭하고 맛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