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일

 

1. ㉯ 부자는 누가 부자야? (1994.10. 9: ㉯해 연중 28)

2. ㉯ R.Cantalamessa,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2006. ㉯해 연중 28)

 

 

1. 부자는 누가 부자야?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르 10.17-30)

 

젊은이는 슬픔에 잠겨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풀이 죽어 떠나갔다.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겉으로는 전보다 더 경건해지고 신심이 돈독해지고 기도를 더 많이 하고자 힘쓰며 정직하고 의롭고 곧은 사람으로 처신하고자 애썼다. 성전에 가고 헌금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도 많이 하여 참으로 경건한 인물로 흠모 받았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기분은 떨치지 못하였다. 만사가 전과 다르고 다 허전하였다. 자기가 왜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지, 왜 지금도 이처럼 마음이 무거운지 알 길이 없었다. 몇 달 뒤 드디어 예수께서 혼자 계시는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찾아갔다. "주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저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제 재산이 그대로 있습니다만 이미 제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 양도 증서가 있습니다. '나의 전 재산을 빈민들에게 기증함'. 받아 주십시오..."

 

성서학자 마르티니 추기경이 상상해 본 오늘 복음의 뒷이야기다 (마르티니, 「마태오 복음」 바오로딸 1984: 60-75면 참조). 역시 해피엔드가 좋다.

 

우리는 세상 물정을 알기에 저 청년처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선하신 선생님, 저처럼 선한 사람이 세상에서 삼박자 축복도 받고 죽어서 영원한 생명도 물려받으려면(꿩 먹고 알 먹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에서 그친다. 성서와 교리서와 교회 사회 문서에 나오는 뻔할 뻔자 대답을 듣는다는 것도 잘 안다.

 

요즘 부부들이 결혼 전에 작성한 각서에 따라 선을 긋고 산다는데, 우리도 세례 후 몇 해만 지나면 어느새 적당히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좋아요 주님, 주일미사 다니지요. 교무금과 헌금도 하지요. 시간 여유 나면 신심회 활동도 하지요. 다만 그 이상은 간섭하지 맙시다. 인천의 세무 공무원들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남습니다. 재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현대백화점 고객 명단, 그 정도는 써야 사람 대접받습니다. 주님은 세상 물정을 모르셔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지만, 하느님 계시고 돈이 있으니 세상에 안 되는 일없더군요. 우리 서로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마십시다. 이 점은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글쎄요, 부자가 천당 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씀 같은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유복한 중산층에 불과하지요. 땅과 상가와 주식이 좀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부자는 무슨 부잡니까? 주님의 것을 관리하는, 마음이 가난한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대가 정말 마음으로는 가난한 청지기인지 인색한 부자인지 알고 싶은가? 그러면 주님의 입에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라!"라는 말씀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시라!

 

"주님, 저도 줄만큼 주고 나눌 만큼 나누었습니다! 그 이상 어쩌자는 것입니까?"라고 당당히 대꾸하게 되리라.

 

같은 말을 본당 신부의 입에서 듣는다고 하자. "듣자듣자 하니 별 미친 소리 다 듣겠네!"라는 욕지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리라.

 

같은 말을 재야운동가의 구호에서 듣는다고 하자! 당장 "저 빨갱이 새끼들 때려죽여!"하는 고함이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리라.

(1994.10. 9: ㉯ 연중 28)

 

 

2. Raniero Cantalamessa,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2006. B. XXVII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Quanto èdifficile che un ricco entri nel regno dei cieli!

 

이 주일 복음이 재산과 부(富)에 관해서 하는 말을 읽으면서 혹시 껄끄러운 얘기가 나오지 않게 몇 가지 얘기를 미리 해야겠다. 예수님이 지상 재화와 부 자체를 단죄하신 일은 결코 없다. 예수님의 벗들 중에는 부유한 아리마태아의 요셉도 있었고 구원받았다고 예수님이 선언하신 자캐오도 부자였다. 그는 세금을 걷는 직업을 가졌는데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놓는 선업을 하기는 했다. 예수님이 단죄하고 꾸짖으신 것은 돈과 재물에 대한 과도한 애착이었다. 자기 가진 것에 자기 목숨을 거는 짓, 자기만을 위해서 보화를 모으는 짓을 질책하신 것이다.(루카 12,13-21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돈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우상숭배”라고 부른다.(콜로 3,5; 에페 5,5 참조). 재물의 신 마몬은 그냥 우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야말로 돈을 마몬이라고 환치(換置)하여 부른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쇠를 부어 만든 우상”(탈출 34,17)이었다. 마몬은 하느님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존재다. 그야말로 하느님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하느님을 향하는 대신덕(對神德)의 대상을 바꾸어 놓는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느님께 향하지 않고 돈으로 향한다. 모든 가치를 뒤집어엎는 불길한 우상숭배다.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탐욕과 인색은 우상숭배일 뿐더러 불행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심쟁이는 불행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스스로 고립된다. 인정도 없고 혈육에게서도 자기 돈을 탐내는 원수만 본다. 그러다 보니까 그의 혈육마저도 그가 빨리 죽기만 고대하고 그의 재산을 차지할 궁리만 한다. 인색해지면 절약을 외치다 보니까 장차 하느님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주제에 이 세상의 재미도 누리지 못한다. 돈이 많아서 마음 편하고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돈에 영원히 인질로 사로잡혀 산다.

 

예수님이 구원의 희망을 아무에게서도 앗아가지 않으시듯이 부자한테서도 구원의 희망을 빼앗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낙타와 바늘귀 얘기를 하시자 제자들은 놀라서 그러다가는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내놓았고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고 답변하신다. 하느님은 부자도 구원하실 수 있다. “부자가 구원받느냐?”가 문제가 아니고(이것은 그리스도교가 한 번도 문제 삼지 않았다.) “어떤 부자가 구원받느냐?”가 문제였다.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비상구를 가리켜 보이신다. 그들의 위험한 처지에서 벗어날 비상구를 보여 주신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부자들한테 자기네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키라고 가르치시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스위스 은행으로 도피시키라는 말씀이 아니고 하늘로 도피시키라는 말씀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도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돈을 땅에 묻기에 바쁘다. 그럼 돈을 바라보고 세어보는 즐거움마저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과연 그 돈이 땅속에 잘 있는지 어쩐지도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러니 왜 하늘에 그 돈을 묻어놓지 않는가? 거기는 아주 안전할 뿐더러 언젠가 거기서 되찾는 돈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데 말이다. 어떻게 하면 하늘에 묻는가? 간단하다. 가난뱅이들, 거지들에게서 하느님이 그대에게 현신하신다. 저 가난뱅이들과 거지들은 그대가 언젠가 가고 싶은 그곳, 하늘나라에 갈 것이다. 지금은 하느님이 저 가난뱅이 속에서 돈이 필요하시다. 거기 투자하면 그대가 하느님께 가는 날 하느님이 그대에게 되갚아 주실 것이다.

 

잔돈 몇 푼 희사하거나 자선을 베푸는 일이 오늘날에는 천국에 보화를 쌓고 공동선을 도모하는 유일한 방도는 아니다. 세금을 정직하게 내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근로자에게 더 후한 봉급을 주고, 그대의 기업을 개발도상국에 옮겨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일 등이 그 방도겠다. 돈이 유통하게 만들어야 한다. 돈이라는 물이 흐르는 운하 역할을 하되 물을 보존만 하는 인공 땜에만 물을 보내서는 안 된다. 땜은 저 혼자만을 위해서 물을 담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