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1. ㉯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1994.10.23: ㉯해 연중 30)

2. ㉯ 칼이냐, 평화냐? (1987.l0.25: ㉯해 연중 30)

3. ㉯ R.Cantalamessa,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졌다”

    (2006. ㉯해 연중 30)

 

 

1.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46-52)

 

간판에 씌어 있는 글씨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진리를 팝니다. 각종 진리일체!"

판매원 아가씨는 매우 예의발랐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완전한 진리를 찾으세요?"

"완전한 진리! 그럼요, 완전한 진리를 보여 주시오. 내게 속임수는 필요 없소! 변명도, 합리화도 필요 없소! 평이하고도 명료한 나의 진리! 그게 내가 바라는 진리입니다."

아가씨는 가게 안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완전한 진리를 파는 곳입니다."

그곳 판매원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값이 비싼데요, 선생님."

"얼마요?" 값이야 얼마든 완전한 진리를 얻고야 말리라고 마음먹고 나는 물었다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그런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안토니 드 멜로의 우화 한 토막이다.

아무리 말려도 소리소리 지르는 바람에 주님 앞에 데려온 소경 걸인! 예수께서는 그를 맞으며 친절하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바라느냐?" 걸인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보았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산천초목이 얼마나 눈부신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만 불의의 병으로 눈이 멀었다. 아름다운 세계를 보지 못하는 답답함을 누가 알아주랴!

 

"다시 한 번만 저 아름다운 세상을 본다면, 빌어먹고 사는 나한테 시집이라고 온 아내의 얼굴을 본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내가 어때서? 나는 두 눈이 성하다고! 시력이 2.0이라서 안경을 안 쓰고도 잘 보이는데." 하지만 주님의 말씀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게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이 말씀에 돋친 가시를 느낀다면 한 마디 내뱉지 않고 못 견딘다. "나도 소경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인즉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요한 9,40).

 

하기야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못 느끼는 바도 아니다. 아버지 재산을 술집 여자에게 갖다 바치고 가문에 똥칠을 한 아우한테 살아 돌아왔다고 잔치를 차려 주시는 아버지! 새벽부터 포도밭에서 땀 흘린 일꾼하고 오후 세시 파장 시간에 얼굴 비친 놈팡이하고 똑같은 일당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경제 정의! 주일이야 하느님께 속한 날이라 미사하고 헌금하고 교회에 봉사해야 마땅하거늘 "사람이 안식일 지키자고 난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 하루 쉬라고 생겨난 거다!" 하시는 예수님의 비공인단체적 발언! 그뿐이랴 한 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철야기도하고 쿠르실료에다 성령봉사에다 ME에다 비밀결사 '오푸스 데이'에다 안하는 것 없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모범 신도들은 예수님의 안중에도 없다. 대신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느니 어쩐다느니 하시는 예수님의 말투! 우리 맘에 안 드는 예수님 언행을 꼽기로 한다면 한이 없다. ("그래 십자가도 싸지 싸!")

 

사도 임원에 신심회 활동에 성경 공부에 어지간히 숙달되어 있노라 는 신앙심으로 우리는 멋쟁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30년간 매춘 언론과 허위 매스컴이 끼워 준 색안경을 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물의 신 맘몬이 씌워 준 반공과 안보 이데올로기라는 콘택트렌즈를 남몰래 끼고 있는지 누가 알랴?

 

그건 그렇고 소경은 눈을 뜨자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소경 걸인의 이름이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전해져 온 것은 그가 초대 교회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1994.10.23: ㉯ 연중 30)

 

 

2. 칼이냐, 평화냐?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4-40)

 

주보를 읽기 싫다는 자매님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부담스럽다는 표현은 퍽 솔직하게 들립니다. 한 주간 내내 세파에 시달리고 하루 종일 라디오, TV와 신문에 쏟아지는 정치 이야기로 식상한 터에 거룩한 성당에서까지 지긋지긋한 정치 이야기를 듣자니 짜증도 나시겠지요. 예수님 말씀대로 평화를 찾아 왔는데 교회가 자매님께 칼을 내민 셈입니다.

 

'하느님이 나의 반석'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저도 내 주먹에 쥔 떡 내가 먹고삽니다. 남편의 직장과 직위, 그의 연줄, 이리저리 키워 가는 돈과 내 수완과 학식 덕택에 살아갑니다. 성당에 나와 좋은 말씀 듣고 봉사활동도 좀 하고 힘닿는 대로 기부나 헌금도 하면 사는 보람이 더 커집디다.

 

솔직히 나는 텔레비전과 신문을 그대로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철거민이 어떻게 당했다느니, 수해가 엄청나고 그 탓이 정부에 있다느니, 누가 어떻게 박해받고 고문당하고 죽었다느니, 근로자들이 폭도가 아니었다느니, 위장취업자나 민민투가 빨갱이들이 아니라느니, 군정은 종식시켜야 한다느니, 사상 유래 없는 부정선거가 준비되고 있다느니 하는 소식은 나로 하여금 시비를 가리고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라고 떠미는 것 같아 여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매님, 이 땅이 원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고, 독재와 경제적 불의와 고문과 거짓말만 하는 언론과 부정에 희생당한 겨레들이 일제히 하느님께 피눈물로 외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한테 하느님이 "내가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고 으름장 놓으시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고 내 남편, 내 자식한테 그 칼이 안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지요. 군인들 손아귀에 들면 하나도 건질 것이 없음을 겪었다면, 하물며 하느님의 정의의 손이 미칠 때 우리가 믿고 버티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없는 사람들의 편이시랍니다.

 

하느님 사랑이니 이웃 사랑이니 하는 것도 강단 없이는 안 되지요. 인정 있는 한마디와 따뜻한 손길, 진실을 알려는 작은 노력, 약자를 도우려는 한마디 발언이나 행동, 불의를 보아 넘기지 못하는 용기, 치사한 선물과 수작에 흔들리지 않고 군정만은 종식시켜야 한다는 소신으로 던지는 투표…. 이런 것들이 신앙인의 사랑이겠지요. 복음이 우리에게 아편 주사여서는 안 되고 남편과 자식, 사회와 민족을 길이 살리는 일에 정신 차려 뛰어들게 만드는 칼이어야겠지요.

(1987.l0.25: ㉯ 연중 30)

 

 

3. Raniero Cantalamessa,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졌다”

(2006. B. XXX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Preso di tra gli uomini e costituito per gli uomini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소경 바르티매오의 치유 사건을 들려준다. 바르티매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소리를 들었다. 평생에 한 번 닥칠까 말까 한 기회임을 알아챘고 민첩하게 행동한다. 옆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은 소위 잘 사는 사람들의 속내를 잘 드러낸다. 어느 시대나 잘 사는 사람들은 비참상이 감춰져 있게, 드러나지 않게, 사람들의 시선을 거북하게 만드는 일 없게, 잘 사는 사람들의 꿈자리를 사납게 하지 못하게 손을 쓴다.

 

“소경”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많은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에도 무지와 무감각이라는 정신적 맹목은 눈 먼 상태와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바르티매오는 소경이 아니고 그냥 앞 못 보는 사람이었다. 마음의 눈으로는 주변의 그 누구보다도 잘 보는 사람이었다. 믿음이 있었고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신앙의 이 내면적 시선이 외적 사물을 보는 시력도 회복해 주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다.

 

복음 해설은 여기서 멈추겠다. 이 주일 둘째 독서의 주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제의 이상상과 역할을 들려주는 까닭이다. 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혔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러니까 사제는 하늘에서 지팡이 짚고 떨어진 사람이 아니고 인간 사회에서 단절되고 뿌리 뽑힌 사람도 아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뒤에 가족이 있고 각자가 살아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혔다.”는 말은 사제 역시 다른 피조물들과 똑같은 반죽으로 빚어진 인간이라는 말이다. 모두에게 있는 욕망이 그에게도 있고 감정이 있고 투쟁이 있고 주저하고 망설이고 허약함이 있다. 성서는 이 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설명한다. 스캔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남에 대한 동정심을 품을 수 있고 자기도 나약함이 있어서 남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힌 사람으로서 사제는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졌다. 사람들에게 다시 보내어 그들에게 봉사하게 만드셨다. 인간의 가장 심원한 내심을 건드리는 봉사,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봉사에 세워졌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사제직을 한 마디로 간추려서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코린 4,1)라고 설파하였다. 사제가 사람들의 인간적 필요를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의 인간적 필요를 두고도 정치가나 사회학자와는 다른 시각에서 다른 정신으로 관여한다는 뜻이다. 대개 본당은 그 지역이나 구역에서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모임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결속점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사제의 면모에서 적극적인 관점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제가 항상 그렇지는 못하다. 신문에 나고 소문에 나돌듯이 다른 측면도 있다. 사제의 약점과 불충실에서 오는 측면이다. 그런 것을 두고 교회로서는 용서를 구하는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일에 접하면서 일종의 위안을 받기도 한다. 사제도 인간이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단이나 고백실에서 사제로서 행하는 바를 무효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위안을 준다. 사제가 부적격하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결여되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고 고백실에서 사죄경을 염하는 이는 그리스도이시고 사제는 그리스도의 손에 들린 연장일 따름이다.

 

여기서 나는 베르나노스의 소설 <시골 본당신부의 일기>에서 그 신부가 죽기 전에 되뇌던 말을 상기하고 싶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게 은총인 걸.” 그 사제가 그토록 고생한 알콜 중독도 본인에게는 은총으로 보였다. 그 중독증상으로 그 사제는 남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남들에게 인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지상에서 대리하는 인간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라고 다그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만큼 자애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