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일

 

1. ㉯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맡기고 보니(1993.11.28: ㉯ 대림 1)

2. ㉯ R.Cantalamessa, "깨어 있어라!“ (2005. ㉯해 대림 1)

 

 

 

1.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맡기고 보니

 

"그것은 자기 집을 두고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 할 일을 맡긴 사람의 경우와 같습니다." (마르 13,33-37)

 

성경을 읽든 강론 말씀을 듣든 사람이 자기의 본색을 숨기기란 힘들다. 가령 목사님의 열띠고 은혜로운 설교가 쩌렁쩌렁 울리는 교회당 분위기를 상상해 본다(성당에서 뜨거운 열기를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무대를 옮겼다.).

 

성령의 은혜로 가득한 당회장의 말씀에 감격하여 "오, 주여!" "아멘, 아멘!" "할렐루야!" 하는 신도의 신음과 환희와 열락이 클라이맥스에 막 오르고 있는 순간이다. "...?" "?..." "?!" "!"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흥분이 수그러졌다. 신도들이 눈을 뜨고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뭐가 어드레?" "아야, 방금 목사가 뭐랬노?" "야 저, 저 저자 불온분자 아냐?" "순빨갱이라우!"

 

하느님의 말씀을 듣든 사람의 말을 듣든 사람은 두 갈래 기로에 선다. 먼저 첫 번째 길을 살펴보자.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선하고 거룩하며 덕스러운지를 하느님 말씀과 신부님 말씀에서 다짐받고 확인받고 위로받고 감사드리는 길이다. 이 길은 신부님 "말씀이 몽치가 되어" 사악하고 불의하고 불손하고 내게 얄미운 자들을 철퇴처럼 내려치시는 일이 후련하고 뿌듯하고 유쾌해지는 그런 길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검을 사정없이 휘두른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 갈래 길은, 하느님의 말씀이 비수처럼 내 양심에 꽂히고 몽치처럼 내 사고방식을 내리치기에 비명을 지르고 자지러지고 까무러치는 길, 회심의 길이다. 머리가 핑 돌아버리는 회개의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양편에 날이 선 쌍날 검이라, 그것으로 남을 치면 자기가 베이고 그것으로 남을 심판하면 자기가 심판받는다는 이치를 깨닫는 그런 길이다.

 

오늘 복음 말씀에는 종들에게 권한을 맡기고 여행을 떠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대개 이 부분은 하느님께 받은 자질을 선하게 사용해야 심판 때 상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24,45-51)의 비유와 결합시키면 다른 해석이 나올 법도 하다. 마태오는 주인에게 모처럼 전권을 위임받은 종이 "내 주인은 늦으시는구나!"하면서 자기 동료 종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꾼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놀았다고 이야기한다. 군대 가서 내무반장이나 고참들에게 시달려 본 사람, 공사판에 나다니면서 십장의 횡포를 겪어 본 사람, 남의 회사를 드나드는 외판 사원에게 가장 무섭고 떵떵거리는 사람은 사장이 아닌 수위라는 사실을 경험해 본 사람은 오늘 복음 말씀이 피부에 와 닿을 것이다.

 

우리한테 쥐꼬리만 한 권력만 쥐어지면 모가지가 더없이 뻣뻣해지고 성깔은 사정없이 난폭해진다. 어디 그 뿐이랴, 눈 꼬리가 한없이 쳐 올라가는 자신의 비뚤어진 심리에 우리 스스로 아연해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지난 30년의 한국사는 "대통령에서부터 동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무원이, 명색이 국민이라는 주인들에게 공권을 위임받은 종이, 주인을 여지없이 짓밟고 주인 재산을 염치없이 축낸 도둑질의 역사였다.

 

열 두 사도의 그림이나 조각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일정한 상징이 존재한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들고 있고, 요한은 예수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토마는 예수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후비고 있고, 안드레아는 X자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바르톨로메오는 자기 살가죽을 들고 심판자에게 호소하고 있다(그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순교했다). 또 바울로는 장검을 짚고 있고, 베드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상징한다면서 열쇠 두 개를 꼭 쥐고 있다.

 

베드로가 위엄 있는 표정으로 손에 꼭 쥐고 있는 쇠붙이는 그 이름이 "열쇠"다. 그런데 이 쇠붙이를 가리키는 서양말(clavis, chiave, clef, key, der Schoussel)은 하나같이 "자물쇠"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단어가 그러하다 보니 사고방식도 그렇게 굳었을까? 애당초 주님 말씀이야 "너한테 천국 열쇠를 맡기겠다. 네가 열지 않으면 아무도 못 들어가니까 정신 차리고 대기하고 있어라!"는 뜻이었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네 멋대로 여닫는 것이니까 너한테 밉보이면 못 들어오게 하려무나!"라는 권력의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천 년의 교회사가 사실상 이 열쇠 두 개를 권력으로 휘둘러 온 횡포로 점철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란 힘들다.

(1993.11.28: ㉯ 대림 1)

 

 

2. Raniero Cantalamessa, “깨어 있어라!”

     (2005. B. I Domenica di Avvento)

     Vegliate!      Matteo 24, 37-44.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

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42-44)

 

당신이 오시는 시각, 우리 각자의 죽음과 맞아떨어지는 그 시각처럼 아주 중요한 것을 하느님이 뭣 땜에 우리한테 감추실까? 전통적인 대답은 “어느 날에나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늘 경계해야 한다.”(시로의 에프렘 성인)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점이다. 자기 죽음의 정확한 시간을 미리서 안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가공할 공포가 엄습할지를 하느님이 너무도 잘 아신다는 점이다. 시일이 확정된 죽음이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게 다가옴을 기다리면서 견뎌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다. 오늘날에는 ‘불치의 병’으로 죽는 사람들보다는 심장마비 같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더 많다. 죽기는 죽는데 우리가 희망을 걸만한 불확실성이 없다는 점에서 불치병이라는 것은 얼마나 큰 공포를 자아내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시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살게 만들어서는 안 되고 깨어 기다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림절이 전례력으로는 한 해의 시작인데 일반 달력으로는 한 해의 끝이다. 이 점도 우리 실존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사실이다. 가을에는 대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흘러가는 세월에 관하여 한 번 더 사색에 잠기라고 부탁한다. 어느 시인(Giuseppe Ungaretti)은 제일차 세계대전 중 최전선 참호 속에서 어느 병사의 심경을 이렇게 읊고 있다. 우리 인생은, 우리 병사들은 “가을철 나무에 달린 잎새들 같다.” 빠르든 늦든 나무에서 낙엽으로 떨어질 운명이라는 뜻이다. 시인 단테도 “시간은 가버린다. 그리고 인간은 감지 못한다.”고 하였다.

 

고대철학자는 이 사실을 단 한 구절, “만물은 흐른다.”(panta rei)고 표현하였다. 우리 인생은 흡사 텔레비전 화면과 같다. 장면 장면이 연달아 흐르면서 새로 나오는 장면은 앞 장면을 지워버린다. 텔레비전 화면은 그대로인데 장면들이 바뀌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여전한데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진다. 신문지면과 텔레비전 뉴스를 가득 채우는 저 많은 이름들, 저 많은 얼굴들, 저 많은 소식들... 몇 해 후, 아니 십년 후면 그 중에 얼마나 남을까? 허무로다, 허무로다! 인생은 바닷가 모래밭에 파도가 그려놓은 얼룩과 같다. 다음 파도가 밀려오면 깨끗이 지워지고 없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 신앙은 뭐라고 하는가 보자.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그러니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 있고, 지나가버리지 않는 누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도 영영 사라져버리지 않을 방도가 하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귀의하는 일이다.

 

이승의 삶에서 우리는 바다로 막 흘러들어가는 뗏목과 같은 처지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영영 돌아올 길이 없다. 그런데 어쩌다 뗏목이 우연이 강가에 닿을 경우도 있다. 우리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외치면서 힘껏 육지로 뛰어 오를 것이다. 단단한 땅을 딛고 서고 나면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쉴 것인가! 신앙에 다다른 사람도 아마 이런 심경을 가질 것이다. 여기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남긴 유언 같은 한 마디를 기억할 만하다. “그 무엇도 그대를 혼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도 그대를 놀래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결국은 지나가니까. 하느님 홀로 남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