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탄 대축일

 

1. ㉯ 그분을 알아보게 하는 표시 (1993.12.24: ㉯해 성탄 전야)

2. ㉯ R.Cantalamessa, “하느님께 영광, 사람에게 평화” (2005. ㉯해 성탄)

 

 

 

1. 그분을 알아보게 하는 표시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루카 2,1-14)

 

“하느님, 일은 그렇게 하시는 법이 아니죠. 세상을 뒤집어 놓으시려는 야심에서 '평화의 왕자'를 밀사로 파견하셨다는 것은 압니다만, 암행어사를 보내더라도 마패와 포도대장과 방자를 딸려 보내는 법입니다. 이치대로 하신다면 로마 황제의 아들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헤로데의 왕실에서 왕자로 탄생시켰어야 했습니다. 저렇게 초라한 갈릴래아 시골뜨기 부부의 자식으로 아들을 보내시면 누가 알아볼 수 있나요? 권세를 가진 자의 궁전도, 영업하는 여관도, 처자식 오붓한 여염집도 이 가난뱅이를 보면 문을 닫아 버리는데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정말 모르십니다. 당신이 만드신 세상인 만큼 세상 도리를 존중하셔야지 사람을 그렇게 면목 없게 만드셔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그렇게 떠보시는 법이 아닙니다, 하느님!”

 

없는 사람이 없는 이를 알아보는 법이다. 천대받고 살았던 목자는 하느님의 이 기묘한 일을 알아들었고, 하느님이 밀사로 파견하신 분을 알아본다. 우리가 재산으로든, 학식으로든, 지위로든, 신심이나 덕성으로든 뭐든지 있노라고 자부하다 보면 하느님의 이 술수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조심하자.

 

성탄을 맞느라 판공성사며 자정미사며 성가대며 주일학교에 바쁜 우리가 정작 가난한 이웃에게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 선물과 오붓한 가족의 파티 자리에 어려운 친척과 이웃이 앉을 자리가 없을 때, 곗돈과 월부금 옷값과 사교비로 빽빽한 가계부에 가난한 사람들 위한 계정이 전혀 없을 때, 그 때는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문전에서 박대하는 순간이다. 몸을 풀어야 하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외양간으로 내모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구세주를 영 잃어버리게 된다. 이 요상한 하느님의 술수에 넘어갈까 두려워하자.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면서 알려주신 '표', 당신이 보내신 '그를 알아보는 표'를 지금 우리는 교회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성 라자로원'이 있고 '꽃동네'가 있고 난지도에 살던 '작은 자매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달동네에서 빈민들과 함께하는 신도와 수도자는 지난 20여 년간 제도 교회에게 성원과 칭송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의심과 비난을 더 받아 왔다. 지금도 가난한 이들이 없는 사회를 꿈꾸며 그리스도께 속아 정의니 경제 분배니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는 이들은 돈을 내겠다, 하더라도 교회 건물에 세 들기 힘들다. 가난한 이와 함께 산다는 사업 명분 때문에 어느 교구장에게 거절당한 수도회를 필자는 알고 있다. 그 거절의 핵심인즉 "왜 하필 가난한 사람들이냐? 부자는 천당 갈 권리 없느냐?"였단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중산층이 가톨릭교회를 알아보는 표징이 되었다. 중산층 교회에 알맞게 도심 한 복판에서도 천 평이 넘는 대지에 신축 공사비 수십 억 원을 들여 짓는 웅장한 성당, 그리고 사장, 교수, 법조인, 고급 공무원, 대기업 중견 간부로 짜인 본당 사목협의회, 최신 의료기기와 시설을 자랑하고 최고의 의료진을 뽐내는 가톨릭 종합병원들이 한국 천주교를 알아보는 표시가 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없는 교회, 가난한 이웃의 몫이 없는 교회, 가난이 없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 교회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의 탄생을 무슨 염치로 설교할 수 있을까?

(1993.12.24: ㉯ 성탄 전야)

 

 

2. Raniero Cantalamessa, “하느님께 영광, 사람에게 평화”

     (2005. B. Natale)

     Gloria al Dio, pace all'uomo      Luca 2:1-14.

 

옛날에는 성탄절에 세 대의 미사를 드렸다. “자정미사”, “새벽미사”, “낮미사”였다. 미사마다 봉독하는 성서가 달라 신자들에게 삼차원의 비전을 제공하였다.

 

자정미사는 사건, 역사적 사건에 집중하였다. 하느님이 지상에 오시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너무도 소박하고 가난한 문장들이 쓰인다.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뒤 구절이 전에는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하고 번역했었다.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교회는 “모든 선의의 인간들”에게, 하느님을 믿든 믿지 않든 진리와 공동선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번역이어서 지금은 쓰지 않는다. 공동번역대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지금은 새 번역대로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한다.

 

만약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온다면 세상에 평화를 누릴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하느님 편에서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평화라면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올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사람들더러 착한 마음을 먹으라고 훈계하는 날이 아니고 하느님이 사람들을 얼마나 위하고 사랑하시는지 알려주는 날이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로 우리를 당신 양자로 삼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성탄절은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티토 3,4) 날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호의, 우리를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삼아주시는 인간애 때문에 우리도 “착한 마음”(호의)로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다. 하느님이 하시는 바를 흉내 내고 본받는 것이 그 착한 마음이다. 누구에게도 적대감을 품지 않는 착한 마음이다. 아기로 태어나신 하느님은 누구에게도 서운한 마음을 품지 않으셨고 누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어도 괘념하지 않으셨으며 누가 먼저 나서서 당신에게 잘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으셨다. 일 년 내내 이런 마음을 품지 못할 바에야 적어도 성탄절에는 이런 훈훈한 마음을 주님께 배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