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세례 축일

 

1. ㉯ 교회가 받을 세례 (1994. 1. 9: ㉯ 주의 세례)

2. ㉯ R.Cantalamessa, “나에게 기름 부으시어 축성하셨다”(2006. ㉯해 주의 세례)

 

 

 

1. 교회가 받을 세례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마르 1,7-11)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마태 11,7-9)

 

예언자를 '구경하러'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셨다. 그리고 그 예언자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는 이들과 함께 세례자 앞에 서셨다.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세례를 받자고 작정하셨다. 요르단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인 소위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가난뱅이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람' 혹은 '예언자'라는 요한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고 회개한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고 있었다.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사람들 앞에서 가진 것 하나 없기에, 모두 평등한 그 사람들 틈에서 예수님도 말없이 줄을 서셨다. 그 분은 당신 스스로를 죄인 중 하나로 인정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러 오셨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을 깨달으신다. 나자렛 사람의 그 겸손한 행동, 가난한 사람 중의 하나로 줄을 선 그 자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고자 하는 그 겸허가 하늘을 감동시켰다. 이제 예수님이 당신이 누군지를 깨달으신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시면서 보시니, 하늘이 갈라지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왔다. 이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마르코에 의하면 이것은 예수님만 체험한 신비였다.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신학자 피어리스(Aloys Pieris)에 의하면, 세례는 어느 시대 어느 종교에서나 자신을 상실함으로 자신을 되찾는 예식이다. "내 자존심과 혈기를 마음껏 발휘할 테니 너희가 숙여주고 죽어다오!" 하는 강요가 아니라, 자신이 죽어야만 되살아나는 의식이다. 세례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식들한테, 시부모에게 스스로 죄인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받는 의식이다. 내가 이웃에게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지 헤아리면서 흐뭇해하거나, 남의 배은망덕에 가슴을 앓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세례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라면서 자족하는 의인들에게는 욕이 되고,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가슴을 치는 사람에게는 선물이 된다. 그래서일까? 요르단 강에서 이미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혼자 뇌이던 말이 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요르단은 강이다. 이 땅 골짜기와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시내들이 모이고 모인 강, 한이 맺히고 얼이 서린 우리의 가락과 한숨이 어우러져 흐르는 강, 그 강에 수행을 앞세우는 영성,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소박한 민중의 신앙이 한데 합쳐져 있다. 교회는 이 강물에 몸을 담구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로마 가톨릭'이라는 외래어부터 쑥스러워진다. 서양에서 왔다고, 구원을 독점하고 있다고, 초자연적 계시는 우리한테만 있다고, 인류의 구세주로 하느님이 세우신 그리스도를 우리만 모시고 있노라고 자부하는 오만이 여기서 없어질 것이다.

 

또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줄에 서야 한다. 권력과 부와 지식을 차지한 선량(善良)들과 같은 줄에 서 있으면 위세도 커지고 건물도 높아지고 살림도 윤택해진다. 그러나 주님의 노선과는 분명히 어긋난다. 하지만 광야의 예언자보다 고운 옷을 걸친 왕자들이 좋은 걸 어찌하랴! 기왕이면 맘몬과 하느님을 한데 섬기고 싶은 유혹을 어찌하랴! 정말 어찌하랴!

(1994. 1. 9: ㉯ 주의 세례)

 

 

2. Raniero Cantalamessa, “나를 기름 부으시어 축성하셨다”

    (2006. B. Battesimo del Signore)

    Mi ha consacrato con l’unzione      Matteo 3, 13-17

 

요르단의 세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예수님이 몸소 설명하신다. 요르단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나자렛 회당에 들러 이사야의 발언을 당신에게 적용시켜서 설명하신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다.”(루카 4,18) 베드로도 둘째 독서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얘기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신 일”을 언급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 여기서 다루어진다. 히브리말 ‘메시아’든 그리스말 ‘그리스도’든 ‘기름 부은 사람’을 의미한다. 교부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까닭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대세계에서 기름을 바르는 일은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다. 운동선수들은 몸이 유연하고 날쌔지라고 온 몸에 기름을 발랐고, 남녀를 막론하고 얼굴이 번득이고 예뻐지라고 기름을 발랐다. 지금은 한없이 많은 종류의 화장품과 미용제가 나와 있다. 모두 기름이 들어가는 제품들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적 의미도 있었다. 국왕, 사제, 예언자는 향기름을 발라 그 자리에 올렸으며, 도유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한다는 축성의 표였다. 그런 상징들이 그리스도에게서 현실이 되었다. 요르단의 세례에서 그분은 임금으로, 예언자로, 영원한 사제로 하느님 아버지께 축성 받으셨다. 올리브유를 몸에 바른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영적인 도유를 받으신 것이다. 시편은 성령을 “기쁨의 기름”이라고 부른다. 교회가 성유를 바르는 도유식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교회는 세례에서, 견진에서, 신품성사에서, 그리고 병자성사(한 때는 ‘종부성사’ 곧 ‘마지막 도유’ extrema unctio 라고도 불렀다)에서 기름을 바른다. 이런 도유 예식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유에 참여하는 까닭이다.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되는 예식이다.

 

그것이 오늘의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보자. 요새는 “향료요법”(aromatheraphy)라는 것이 유행한다. 건강유지와 어떤 질병 치료에 기름과 향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참 많이도 나온다. 심지어 “영혼의 향기”니 “내적 평화의 향기”라는 상품마저 나돈다. 의사들은 이런 요법을 별로 믿지 않고 심지어 부작용도 있다면서 꺼린다. 나는 여러분에게 부작용이 없는 확실한 향료요법을 하나 소개하겠다. 특수한 향료, 참으로 냄새가 좋은 향기, “성령 요법”을 소개하고 싶다.

 

성령을 재로로 쓰는 이 향료요법은 영혼의 온갖 질병을 낫게 하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경우에는 몸의 병도 낫게 만든다. 어떤 흑인 영가에는 “길르앗의 발삼향은 상처 난 영혼을 낫게 하네.”(“There is a balm in Gilead to make the wounded whole”)라는 구절이 있다. 길르앗은 구약에 향료 주산지로 꼽히는 곳이다(예레 8,22). “때때로 나는 실의에 빠지고 내 수고가 헛되다고 여기는데 그때마다 성령께서 내 영혼을 북돋우시네.”(“Some times I feel discouraged and think my work’s in vain but then the Holy Spirit revives my soul again )라고 노래는 이어진다. 우리에게는 교회가 길르앗이고 성령이 발삼향이시다. 예수님이 가시면서 우리더러 뒤따라오라고 풍기고 가신 향기가 곧 성령이시다.

 

성령은 특히 결혼의 병고를 다루시는 전문의시다. 서로 주는 헌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결혼이다. 서로 선사하는 선물이 결혼이다. 그런데 성령이야말로 “서로 주는 일” 그 자체이시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당신을 내어주시고 성자께서 성부께 당신을 내어드림 그 자체가 곧 성령이시다. 성령이 임하시면 주고받는 선물이 가능하다. 그 역량이 커진다. 그리고 함께 사는 기쁨과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류사회의 미래에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하실 수 있다.”는 경고를 보냈다. 그리고 우리를 구하려고 이 자리에 와 계시는 신은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 우리 가정, 우리 사회야말로 성령의 강력한 고단위 처방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