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1. ㉯ 광야로 나가자 (l979.3.4: ㉯ 사순 1)

2. ㉰ 엎드려 절하고서 받은 영광 (l989.2.l2: ㉰ 사순 l)

3. ㉯ R.Cantalamessa: "예수님과 함께 광야로” (2006. ㉯해 사순1)

 

 

 

1. 광야로 나가자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마르 l, l2-l5)

 

사순절이 왔다. 성탄절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던' 계절은 아니다. 가슴에 돌을 얹어 놓은 듯하고 소화가 안 되는 듯 한 계절이다. 이마에 재를 바르면서는 이번에는 그래도 떳떳하고 그럴듯한 선공(善功)을 세워 보겠노라고 다짐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전에 성주간입네 부활절입네 하여 더욱 떨떠름한 한 철이다.

 

사순절이면 성령이 우리를 광야로 내보내신다. 손바닥만 한 이 나라에, 덕지덕지한 서울 땅에 어디 광야(빈 들)가 있을까만, 사람마다 마음속에는 영혼의 광야가 있게 마련이다. 광야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자동차 소음과 사람의 욕설과 내 욕심이 와글거리지 않는 적막한 땅에 이르면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생긴다. 세례 받고 열심히 하던 시절, 사람들을 사심 없이 위하던 "젊은 날의 순정"(호세 2, 2)이 생각난다. 그래서 사순절이면 명상의 집이며 본당 피정이며 신심서 읽기 등이 참 이롭다.

 

광야는 또한 두려운 곳이다.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 물 없이 메마른 땅”(신명 8, l5)이요, "타조들이 그곳에서 살고 염소 귀신들이 춤추는 곳"(이사 13, 21)이다. 확확 타오르는 열기와 아지랑이에 가려 먼데서 오는 그림자가 천사인지 악마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몇 끼니 단식하며 허기지면, 예수님처럼 돌이 빵처럼 보이고 빵이 돌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푼을 자선하고 십자가의 길을 몇 번 돌고 담배를 끊고 하다 보면 열심해져서 성당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을 것같이 우쭐해진다. 우리 눈에 온갖 허깨비들이 비치기 시작한다. 치유의 은사가 내릴 듯하고 위대한 부르심이 하달될 것 같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벌여도 다 이뤄질 듯 착각이 든다. 온 세상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할 날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광야에서 길을 잃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하였다(욥기 6, l8-I9).

 

광야는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는 터전이기도 하다. 아라비아 사막에 석유가 솟아났듯이, 미국의 네바다 사막과 이집트의 사막이 개간사업으로 옥토로 변했듯이, 메마르고 엉겅퀴나 자라고 독사 새끼들이 우글거리는 곳에도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마음의 사막에 은총의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생명의 냇물이 흐르며,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거룩한 길'이 되는 것이다(이사 35장).

 

사순절이다. 광야로 나가자. 거룩하고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어 하느님을 만나 뵙자. 죄 많고 메마른 영혼에 은총의 물길을 끌어들여 옥토로 꽃피우자. 그리고 돌아와서 외치고 다니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l979.3.4: ㉯ 사순 1)

 

 

2. 엎드려 절하고서 받은 영광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당신이 내 앞에서 경배하면…." (루카 4,1-13)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사탄의 목소리는, 곧 예수의 힘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보려 하는 갈릴래아 사람의 여론이었다. 혁명당 출신 제자들은 걸핏하면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l,6)라면서 칼집에 손을 대곤 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니까, 그들은 당장 스승을 왕으로 삼아 독립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체포되는 스승을 살려야 한다며 칼을 뽑아 덤볐던 베드로의 행동은 그에 비하면 차라리 우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스승께서는 외골로 당신의 길을 가셨다. 홀로 모든 유혹을 감당하시면서….

 

유혹자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300년 박해를 벗어나자마자 다시 나타났다.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의 눈에 그 뒤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권력과 영광의 길' 그 자체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적을 몰살하고 빼앗은 저택과 영지의 상당수가 그리스도교의 대성당과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주님의 무덤을 되찾는다.”는 명분하에 만든 도적떼 십자군이 아랍의 땅과 터키를 휩쓸고 다니던 시대가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을 창설하여 옛 로마제국의 부흥을 꿈꾸던 세력도 있었다. 라틴아메리카로 떠나는 정복군(학살 부대요 도적 떼였다!)의 총검을 성수로 축복해 주며, 인디언에게는 영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안심시켜 주던 성직자가 있었다. 갈릴래아 어부의 후계자가 교회 황제[敎皇]가 되어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을 차지하고서 거들먹거리던 그 창피한 시대를 입에 담는다고 해서 뭣하겠는가?

 

유럽이든 제3세계든 가톨릭교회라면 보수반동세력, 권력과 금력을 쥔 기존 체제의 수호자로 행동하고 인정받는 현실은 절망적인 현실이다.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보다 기업인, 집권자, 중산층, 부유층을 기준으로 교회를 운영하려는 유혹은 늘 따른다. 성당을 짓고 교회 사업을 운영하면서 특혜를 이용한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공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노릇도 해 왔다. 이 모든 일은 나자렛 사람 예수의 정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만 빌린 행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교회와 지도자들이 '권력과 영광'을 누린다면, 권력을 쥔 누구에게 절을 하고 그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l989.2.l2: ㉰ 사순 l)

 

 

3. Raniero Cantalamessa, 예수님과 함께 광야로

     (2006. B. I Domenica di Quaresima)

     Con Gesù nel deserto      Marco 1, 12-15

복음의 첫 구절에 집중해 보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이 구절은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호소를 던지고 있다. 예수님은 방금 요르단 강에서 메시아 소명을 받은 터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낫게 하고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중의 어느 것도 서둘러 시작하지 않으셨다. 성령의 충동에 순응하여 광야로 물러가셨다. 거기 40일간 머무시면서 단식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그리고 투쟁하셨다, 철저한 고독과 침묵 중에.

 

광야로 물러가신 예수를 본받으려고 나선 남녀 인간은 역사상 통틀어 거대한 무리를 이루었다. 동방에서는 안토니오 수도원장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이집트 사막이나 팔레스티나 사막으로 은둔하였고 서방에는 모래사막이 없는 까닭에 고독한 산이나 골짜기로 물러갔다.

 

광야로 예수님을 따라가라는 부름은 우리 모두에게 오는 초대다. 은수자들과 수도자들은 공간적인 광야를 택하였고 우리는 광야의 시간을 따로 가져야 한다. 우리 주변에 좀 비어 있고 침묵이 어린 분위기를 갖는다는 뜻이다. 소음과 외부 소란에서 물러서서 우리 마음이 가는 길을 찾는 일이다. 우리 존재의 보다 깊은 원천과 맞부닥뜨리는 일이다.

 

사순절은 잘만 하면 영혼의 중독을 치료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탄산가스 오염만 있는 게 아니다. 청력의 중독, 조명의 중독도 있다. 우리가 모두가 소란과 외향에 취해 있다. 인간은 태양계 저편에까지도 우주선과 전파를 보내면서도 자기 마음의 세계는 도통 모르는 수가 많다. 도피하고 즐기고 머리를 쉰다는 말이 지금은 자기 자신에게서 탈출하는 것으로, 실재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통한다. 픽션의 세계로 가서 사는 모습이다. 심지어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는데 원뜻(alieni)은 자기에게서 이탈하여 남의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인간, 소외(alienation)된 인간을 가리킨다. 지구라는 행성 밖에서 어떤 존재들이 지구를 찾아올 것도 없이 우리 스스로 지구상에서 외계인으로,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살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런 소란의 도취될 위험이 훨씬 크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두고 자기 신하들에게 내리는 명령이 있었다. “그자들의 일을 더 힘들게 하여라. 그러면 그들이 일만 하느라 (모세가 말하는 노예 해방이니 하는 따위의) 허튼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탈출 5,9) 오늘 이 시대의 파라오들도 말소리는 내지 않지만 같은 정책을 편다. “저 젊은이들에게 소음을 더 들려주어라. 혹시라도 그들이 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스스로 결단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유행이나 따르게 만들고, 우리가 획책하는 술책을 따라오게 만들고, 우리가 광고하는 상품이나 무진장 소비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광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이므로 우리 내심에 조그만 광야를 축주해야 한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이 점에서 상당히 그럴 듯한 시사를 한다. “우리는 항상 은수처를 함께 갖고 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마음만 내키면 은수자처럼 그 속으로 숨어드는 일이 가능하다. 우리 몸이 은수처(隱修處)이고 우리 영혼은 그 속에 은둔하는 은수자(隱修者)다.” 이 이동식 은수처에는 아무 데서나 남의 눈에 띠지 않고서 우리가 드나들 수 있다. 사람이 빽빽한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는 순간에도 들어갈 수 있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만 알면 된다.

 

그런데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신” 분은 성령이시다. 그분이 우리도 끌고 가셔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악과 투쟁하고 그래서 쇄신된 영으로 파스카를 경축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