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1. ㉮ 때로는 눈먼 이가 보는 이를 위로하였다 (1993. 3.21: ㉮해 사순 4)

2. ㉯ 악마의 이름 (1994. 3.13: ㉯해 사순 4)

3. ㉯ 어찌 노래를 부를까 보냐 (1988.3.13: ㉯해 사순 4)

4. ㉰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 줄이야? (l989.3.5: ㉰해 사순 4)

5. ㉯ R.Cantalamessa,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2006. ㉯해 사순 4)

 

 

 

1. “때로는 눈먼 이가 보는 이를 위로하였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요한 9,1-38)

 

제목으로 쓴 글귀는 종교화가 루오의 화집 <미세레레(MISERERE)>(분도출판사)에 나오는 어느 그림의 제목이다. 오늘의 복음 내용에 맞춘다면 "눈먼 이가 보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여주었다."고 바꿈직하다.

 

우리는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 태어나면서 소경인 사람이 눈을 뜬 기적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송장 썩는 냄새를 풍기다 살아난 라자로의 부활 기적을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된다. 아마 이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폭로하는지 깨우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성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같다.

 

"당신이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할멈, 이게 당신 아들 틀림없어?"

"그렇습니다만."

"소경으로 태어났다 이 말씀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만은 틀림 없읍죠."

"영감, 당신 아들이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말짱한 거야?"

"글쎄요... 나이가 있으니 본인한테 물어 보시지요."

"이봐, 당신 어떻게 눈을 떴나?"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눈에 얹어 주시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씻었더니..."

"하, 우선 무면허 의료 행위로 걸고... 그런데 그게 언제야?"

"그젭니다."

"그 사람 하필 왜 안식일에 그따위 짓을 하고 다녀?"

"예?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안식일도 안 지키는 작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보나? 당신, 그 작자를 뭘로 봐?"

"예언잡니다."

"예언자 좋아하시네. 그 사람은 죄인이야."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소경이었다가 지금은 눈을 떴습니다."

"그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아니 왜 자꾸 같은 걸 묻습니까? 그분 제자라도 되실 생각입니까?"

"이게 누굴 놀려? 너나 그 새끼 제자 되라. 우린 모세의 제자야. 그 새끼는 어디서 온 놈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수상한 놈이야."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시지 않았다면 소경을 눈뜨게 하실 수 있을까요?"

"어라... 너 이 새끼 누구한테 설교하는 거야? 이봐, 김실장, 이 거지 새끼들 밖으로 쫓아내버려!"

 

지난해 대통령 선거 직전 부산의 어느 복국집에서 있었던 기관장 선거 대책회의를 회상해 보자. 민자당과 기관장의 선거 음모가 어떻게 해서 매춘 언론과 충견 검찰의 조작을 거치게 되었는지, 또 그 사건이 국민당이 저지른 도청사건으로 변질되었는지를 기억해 보자. 태생 소경이 눈을 뜬 기적은 온데 간데, 없고 "안식일에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만 꼬집어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터무니없는 시비만이 남아 있는 그 변질 과정에 납득이 간다. 게다가 부산시 기관장들이 총출동한 수치스러운 사건이 부산 사람을 낯부끄럽게 만들기는커녕 도리어 영남인들이 똘똘 뭉쳐서 자기 고장 후보에게 투표하자는 결의로 바뀌고, 선거판을 뒤집어 놨음을 기억해 보자. 그 사건에 비추어 보면 라자로의 부활을 보고서 예수를 처형하기로 결정한 예루살렘 기관장 회의는 백분 이해된다.

 

독일 나치가 친위대원, 생체실험자, 고문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자에게 가르치는 첫째 수칙이 있었다. "희생자의 눈을 절대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악에 물들면 제일 먼저 사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진실 역시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사람은 잠시라도 진리의 빛 속에서 거닐지 않으면 당장 어둠 속에 빠지게 마련이다. 어둠 속에 오래 오래 머물수록 눈이 먼다. 악을 행하면서도 악을 악으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리고 만다. 어둠이 그 눈을 빽빽하게 채워서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제 입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에 무관심한 자는 제아무리 세례명을 지니고, 주일미사에 나가 교무금을 바치고, 사도위원에 명단을 올려도 실제로는 "무신론자"다. 우리 주변 성당 안에도 반공이니 안보니 하는 악마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지방색에 기인한 까닭 없는 증오에 물들어, 제 손아귀에 쥔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젖어, 사실도, 진실도, 진리도 안중에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권력과 금력과 안전을 하느님 위에다 섬기는 우상숭배로 사람이 눈을 멀게 되면, 입으로는 그리스도 신자이지만 자신의 권력과 돈과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이빨을 갈고 덤비고야 만다.

 

"진실을 은폐함은 허위를 홍보함과 같다(suppressio veri expressio falsi).”는 옛 로마인들의 속담이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참담한 이 마지막 말씀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실이 우리 양심에 던지는 선언이기도 하다.

(1993. 3.21: ㉮ 사순 4)

 

 

2. 악마의 이름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4-21)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이동진 역, 우신사 1986년)를 펴내어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태리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악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변을 내놓는다. 그는 악마란 “한 번도 의심받아 본 적이 없는 진리”라고 정의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요한 3,20) 우리가 알기로 예수께서는 백 번 옳을 이 말씀을 먼 옛날 유대인들에게 하셨다. 즉, 복음을 접하고도 믿지 않은 불신자에게 하신 경고인 것이다. 성당으로 친다면 냉담하고 죄짓는 신자들에게 하신 경고와 같다. 한 마디로 “나하고는 상관없는 말씀이다. 나는 세례를 받아 이미 빛 속에 서 있으니까.”

 

그런데 훌륭한 성서학자이자 밀라노 교구장인 마르티니 추기경은 오늘 복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들, 특히 교회의 장로들은 어둠이 생활양식으로 굳어 버리고 저 어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초조감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비록 씁쓸하고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그 어둠 속이 편하고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 처지를 즐기고 있다." 같은 성직자로서 마르티니 추기경의 말에 공감할 한국 교회의 장로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진리를 미워하며 허위를 사랑하노라!"고 공언할 미치광이는 지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한단다. 그러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르다. 나의 선량함과 경건함을 다짐해 주는 말은 다 참이다. 나와 내 패거리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말은 무조건 진실하다. 그 대신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진리, 우리를 남부끄럽게 하는 진실, 우리와 우리 패거리에 불이익을 끼치는 사실을 퍼뜨리는 사람은 때려죽이고 싶도록 얄밉다!

 

정보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 윤석양군, 군부대의 부정 투표를 폭로한 이지문 중위, 감사원 비리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 충청도의 부정 선거를 폭로한 연기 군수 한준수, 국회 노동위의 돈 봉투를 폭로한 국회의원 김말룡 의원, 그들이 얼마나 언론과 집권당과 우리한테서 미움 받고 가혹하게 파면당하고 법원으로부터 단죄 받았는지 우리는 목격해 오지 않았던가?

 

성모께서 핏덩어리 예수를 안고 성전을 찾아갔을 적 시므온 영감에게서 들은 불길한 말이 있었다. "이 아기는 반대 받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누구든지 이 아기만 보면 때려죽이겠다고 돌을 집어들 것입니다.) 왜냐구요? 이 아기가 자라면 사람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내고 말 것이기 때문이죠."

 

최근의 예를 들자.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하나의 굳센 믿음이 있다. "전교조 선생들을 죽어도 우리 학교에 다시 받아 줄 수 없다. 그 까닭은, 교회 학교, 교회 직장에서만은 결코 노조를 허용할 수없는 까닭은, 그들이 분명히 좌익분자들이고 대한민국 교육과 교회 사업을 망쳐놓는 타락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감히 시비하는 자가 교회 안에 있다니... 옛날에 오죽했으면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했는지 이해하고도 남겠다." 이 말도 경건한 신학자와 지성인 신자들의 열성에 찬 신념이다.

이렇게도 우리는 진리를 “추잡하게” 사랑한다. 유대인들이 잡아 죽인 대예언자를 주님으로 섬긴다면서, 이 시대의 예언자를 직장과 교회에서 쫓아내고 욕하고 죽이라고 고함질러 왔다. "진리는 독사와 같아서 손으로 붙잡으려면 문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예수께서도 당신을 뱀에 비유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렸던 것처럼 그렇게 인자도 들어 올려져야 합니다." 진리는 뱀이다. 그 뱀은 비늘이 돋고 혀를 날름거리고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기에 모세가 든 뱀을 쳐다보려면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1994. 3.13: ㉯ 사순 4)

 

 

3. 어찌 노래를 부를까 보냐

 

"하느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려는 것이다." (요한 3,14-21)

 

작년 12월부터 웃음을 잃어버린 분들이 많다. 하기야 지난 30년간 이 나라에 속 시원하게 웃을 일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래도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역사의 흐름이 바뀌기를 고대했다, 국제 세력의 엄청난 선거 사기극에 말려든 우리들은 쓴웃음마저 잃어버렸다.

 

그런데 성탄을 준비하며 극기하는 대림절에도 '기쁨의 주일'(셋째 주일)이 있었듯이 수난을 묵상하며 속죄하는 사순절에도 '기쁨'을 주제로 하는 주일이 하나 있으니 바로 오늘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던 말씀처럼 신앙인의 기쁨은 우리가 아는 세상 재미와는 다른가 보다.

 

30년 군부독재를, 나라를 거덜 내고 민생을 파탄에 빠뜨린 오적(五賊)을 선거를 통한 대권 집권으로 깡그리 징계할 수 있어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이미 무위로 끝났다). "잘못을 저지르고 죽은 우리를… 다시 살려 주셔서"(에페 2, 5) 즐거워하는 것이다. 나라가 이 꼴이고 가난한 이가 저토록 고생하는 것은 오적과 더불어 나의 죄, 침묵과 비겁, 협력과 수혜 때문이다. 용서의 자비를 누구보다 많이 받은 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신앙인의 첫째 가는 자세는 이 땅 위의 그 어떤 불상사 앞에서도 "내 탓이오!"라며 가슴을 치는 일이 아닌가 한다.

 

치사스럽고 악독한 그 많은 죄를 보시고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구원을 베푸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에페 2,8) 심판의 전화(戰禍)가 땅을 휩쓴다면 약자와 없는 자가 먼저 희생되게 마련이고, 오적은 여전히 용빼는 재주로 도망가 살아남고 이국땅에서 번영을 누리지 않던가? 그뿐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선인이나 죄인이나 그분께는 똑같은 자식이 아니던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하느님을 내게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남에게는 '지엄하신 심판자'로 여겨서는 부당하다. 그 어른은 구원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않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셨다."(l베드 2,23) 그러니 이 어둡고 슬프고 희망 없는 시절에도,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가슴에는 잔잔한 기쁨이 흘러야 마땅하리라. 우리마저 주저앉는다면 겨레의 힘없는 팔다리를 누가 붙들어 줄 것인가? (1988.3.13: ㉯ 사순 4)

 

 

4.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 줄이야?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루가 15,11-32)

 

잘 아는 대목이지만 참을성을 갖고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은 집에서 살기가 싫다며, 어느 날 집안의 돈을 모조리 싸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곧 돈도 다 떨어지고 실컷 고생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가 집에 당도하자 아버지는 굵은 몽둥이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길에서 큰아들을 만났다. '어딜 그리도 급히 가십니까? 그것도 몽둥이를 들고', '몹쓸 놈의 네 아우가 돌아왔다. 단단히 두들겨 맞아도 싸다.' '아버지, 저도 거들까요?' '그래. 도와 다오.' 그리하여 아버지와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을 두들겨 패 주었다. 아들을 실컷 때린 아버지는 제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 못된 아들을 벌주리라고 벼르고 벼르던 소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번안은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의 글이란다. 최근에 나온 『화해를 살다』(첸치니 지음, 성 염 번역, 성바오로 출판사)라는 책에 실려 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들은 어린이가 나름대로 비유를 재구성한 것인데, 어쩌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꾸밈없이 담아 놓았을까 싶다. 심보가 옹졸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사람은 두 개의 잣대를 갖고서 산다.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는 '자비'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잰다. 그분은 대자대비하시고 아무리 큰 죄도 용서하신다. 따지거나 꾸짖거나 추궁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용서하신다.

그 대신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는 '정의' 라는 잣대가 쓰여야 한다. 주님은 의로우시고 악한을 벌하시며 그것도 당장에 벼락으로 치셔야 옳다. 세리와 죄인이 예수의 말씀을 듣겠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못마땅해 하였다. 선량하고 신심 깊고 윤택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저런 처신이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용서할 가치가 있는 자를 용서해야지….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개선의 가망이 없다.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비추시고 착한 사람의 밭에만 비를 내리셔야지 하느님의 도리(?)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다. 하느님 마음은 어버이의 마음이고, 내가 남에게 가지는 마음은 시샘 많은 동기간의 그것이다. 하느님이 악인을 벼락으로 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 자신이 제일 먼저 맞아 죽었을 텐데…. 그러나 하느님 마음을 아직 배우지 못한 우리는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 7,2)는 말씀을 듣고도 아랑곳없다.

(l989.3.5: ㉰ 사순 4)

 

 

5. Cantalamessa,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2006. B. IV Domenica di Quaresima)

     Così Dio ha amato il mondo!      Giovanni 3, 14-21

 

오늘 복음에는 성서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안이 되는 구절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당신의 사랑을 두고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려고 하느님은 인간이 자연본성의 차원에서 늘 겪는, 사랑의 경험을 이용하셨다. 단테가 하는 형용에 의하면 하느님께는 우주 전체에 통하는 공책이 한 권 있다고 한다. 인간적인 모든 사랑들, 부부애, 부성애, 모성애, 우정은 그 공책의 한 페이지를 이룬다. 혹은 거대한 불기둥의 한 가닥 불꽃을 이룬다. 그 사랑들은 모조리 하느님에게 원천이 있고 하느님에게서 충만한 완성을 본다고 한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특히 부성애의 이미지를 통해서 당신 사랑을 설명하신다. 부성애는 충동하고 떠미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아버지는 자식이 성장하게 만들며 각자의 최선을 다하게 떠민다. 그래서 자식 앞에서 자식을 마냥 칭찬하는 일이 아주 드물다. 자식이 이미 어느 경지에 왔다고 자부하고서 더 이상 노력을 안 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꾸짖고 바로잡는 일도 부성애의 한 가닥이다. 그러나 진짜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자신감을 준다. 삶에서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과 더불어 자유와 자신감을 갖게 한다. 하느님은 오래고 오랜 계시 과정에서 당신이 인간에게 반석과 성채가 되시고 환난 중에는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거듭 가르치셨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은 때로 모성애의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하신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어머니의 사랑은 품어주고 함께 느끼고 자상함을 간직한 사랑이다. 어머니들은 어느 모로 자식들과 공범이 되고 자식들을 감싸고 두둔하며 아버지에게 자식 대신에 소원을 빌거나 용서를 구한다. 성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권능과 위력을 얘기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의 약하심과 어느 면에서 무력하심도 얘기한다. 어머니 같이 약한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유형의 사랑도 경험하여 안다. 이성애 혹은 부부애다. 그 사랑을 두고 성서는 “죽음처럼 강하고” “모조리 삼키는 불꽃”이라는 표현을 쓴다.(아가 8,6) 우리를 위하시는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을 묘사하는데 하느님은 부부애도 형용하셨다. 성서에는 인간에게 향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켜 이성애의 온갖 용어를 구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이 인간을 “꾀다, 유혹하다”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예수님은 사랑의 온갖 형태, 곧 부성애, 모성애 그리고 부부애도 완성을 보게 해 주셨다. 당신을 신랑으로 언급하신 적도 많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우정 혹은 우애(友愛)도 끌어내셨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우정이란 무엇인가? 우정은 혈연보다 강한 사슬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같은 핏줄이 혈연을 만든다. 우정은 같은 취미, 같은 이념, 같은 이해를 지는데 있다. 우정은 신뢰에서 온다. 내 생각과 경험에서 가장 내밀하고 사사로운 것마저 믿고서 알려주는 것이 우정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이유를 설명하신다. 당신의 천상 아버지에게서 알아낸 것을 모조리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한테 다 들려 주셨다. 삼위일체의 가족 비밀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작고 미소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편애하신다는 비밀, 아빠로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이미 우리 있을 곳을 마련해 두셨다는 비밀 등이다. 그래서 가장 깊은 의미에서 우리에게 친구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것이다.

 

이런 사랑을 돌이켜 보고나서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주 간단하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일이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도 요한의 다음 말에 공감하여 우리도 공언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