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수난 성지주일

 

1. ㉮ 신한국의 복음 (1993.4.4: ㉮해 주의 수난)

2.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l987.4.12: ㉮해 주의 수난)

3. ㉯ 난 안 내려간다! (1994.3.27: ㉯ 주의 수난)

4. ㉯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1988.3.27: ㉯해 주의 수난)

5. ㉰ 민족의 성 금요일 (1989.3.l9: ㉰해 주의 수난)

6. ㉯ R.Cantalamessa, “베드로처럼 할 것인가, 유다처럼 할 것인가?”

    (2006. ㉯해 주의수난)

 

 

1. 신한국의 복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버리자고 하였다." (마태 27,20-23)

 

본당의 세례식 사진이든, 견진 기념 촬영이든, 혹은 배론이나 나바위 성지를 다녀온 사진이든 무심코 먼저 찾는 얼굴은 내 못난 얼굴이다. 큰 아이 대학 입학식에 간 아내는 수천 명 젊은이들 가운데서 큰아들 얼굴을 찾느라 부산이었다.

 

그러다 오늘 복음으로 읽는 '마태오에 의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에서 내 얼굴을 찾는다면 어디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될 수 있으면 예수님 가까이, 성모님 가까이, 도망 안 간 제자들이나 예수님 신세를 슬퍼하던 착한 부인들 사이에서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염치가 없다.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수석 사제들이나 바리사이들, 빌라도나 백인대장 틈은 아닐 성싶은데(“아무렴 내가 그 정도까지 못 됐을라구!”), 그래서 "죽여라! 죽여라!"고 외치거나 잠자코 구경하는 군중 틈새가 딱 내 자리일 것 같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예루살렘 성문까지 마중 나가 길에다 외투마저 깔고는 "호산나, 호산나!" 하던 내가 무슨 쥐약을 먹었는지, 아니면 텔레비전의 언론 플레이에 녹아 났는지 똑같은 인물을 두고 "죽여라, 죽여라!"고 악쓰고 있었다. "좋다. 그러면 특사를 내려 풀어 주겠다. 강도 살인범 바라빠냐,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하던 총독의 제안에도 나는 서슴없이 바라빠를 뽑지 않았던가!

 

"잘 살아보세!" "유신시대!" "사회정화!" "정의사회 구현!" "보통 사람의 시대!" "신한국 창조!" 현란하기만 한 표어를 듣는 나는 또한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번쯤 이 민족의 수난사에서 자신의 역할을 더듬어 볼 용기가 필요하겠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대제관이 당대의 성직자였고, 바리사이가 당대의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율법학자가 당대의 지성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하느님 은혜로 신앙인이 되어 그간 판사와 검사, 국회의원과 장차관, 군 고위장교와 고위 공무원, 언론인과 교수, 성직자의 직책을 맡아 온 이들에게는 이 성주간이 은혜로운 성찰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 민족의 골고타에 세워진 그 많은 십자가들, 거기 못 박혀 죽은 의인의 피가 얼마만큼 내 손에 묻어 있는지 들여다보는 기회, 복음적 의미의 "신한국 창조"에 참여하는 기회일지 모른다. 성서에는 정말 우리 모두의 얼굴이 나와 있다!

(1993. 4. 4: ㉮ 주의 수난)

 

 

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l4-27,66)

 

성주간이면 유럽 여러 마을에서 수난극이 공연된다. 특히 350년 전부터 바바리아의 오베람메르가라는 마을에서 10년마다 열리는 수난극은 온 마을 사람 7백 명이 배역을 나누어 참여하는 장대한 극이라, 전 유럽인이 여기에 모여든다.

 

성서가 인류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까닭은 무엇일까?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의 얼굴, 마음, 행실을, 역사와 사회 안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그 책에서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독서자들이 나누어 읽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에서 내가 읽는 내 역할은 무엇일까? 여기 지배층의 제도적 불의에 의해서 의인 하나가 잔학하게 살해당하는 연극이 벌어진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가야파의 이 악마적 논리는 이 시대 이 나라 원로의 명분이 되어 있다. 나라가 적화(赤化)되는 것보다는 저 젊은이들이 고문당하고 옥살이하고, 광주 시민들 쯤은 학살당하는 편이 낫다는 논리로 악용될 수 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참아야 한다!”

 

체포되면서부터 예수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배심원들, 검사들, 경찰들은 유죄 여부의 진위 판단이 아니고 살인을 감추는 정치적 재판이라는 요식행위만 강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빌라도는 파렴치하게 군중 앞에서 손을 씻는다.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한국의 민주화는 한국민이 스스로 달성할 일이다. 남북 분단이니 군사 정부니 광주시민들의 피에 대해서는 우리는 책임이 없다."

 

우리는 아마 군중일 것이다. 30년간 조작된 신문 기사와 거짓 텔레비전 뉴스와 당국자들의 경멸스런 공약과 엄포에 길들여진 군중이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역사의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언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는 없다. 시골에, 해안에, 미국에, 스위스에 '피의 밭'을 사 놓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리라.

 

조금 용감하달 사람이 있다면 베드로다.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뒤따라… 일의 결말을 보려고" 서성거린다. 역사의 뒤뜰에서.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신 이는 우리가 구경하는 저 죄수였다. 그 뒤를 따르는 이 땅의 죄 없는 무수한 죄인들이 겨레를 마지막 파멸에서 아직까지는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l987.4.12: ㉮ 주의 수난)

 

 

3. 난 안 내려간다!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우리가 보고 믿게..." (마르 15,32).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광야에서 나를 유혹하고도 넘어뜨리지 못한 자가 남겼던 한 마디를 난 잊지 않는다("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루가 4,13).

그런데 그자가 이곳 골고타에 다시 나타났구나.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우리가 보고 믿게..."

저잔 가야파의 심복 제관이구나.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저건 바리사이파의 브레인이라는 교수로구먼. 허지만 난 절대로 안 내려간다!

 

만약 너희들의 빈정거림에 져서 십자가에서 내려선다면, 글쎄 너희가 나를 믿어 줄지 그것도 미지수다. 라자로를 살려내니 나는 물론 라자로까지 없애겠다던 너희들 아니냐. 십자가에서 내려서고 만다면 이제까지 내가 설교한 하느님은 뭐가 되느냐 그 말이다.

 

능하신 하느님, 강자의 하느님, 지배자 하느님, 요구는 많고 참을성이 없는 하느님, 너희 가운데 쇠푼께나 있고 힘깨나 쓰는 놈이 제 이로울 때 써먹는 하느님, 그것들한테 바람잡이 노릇하는 신학자들이 떡칠 해 놓은 하느님, 바로 이런 하느님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게 내 필생의 사업이었다(쌀농사가 망합네, 북한에 핵이 생깁네 하는 세상에서 너희의 하느님상이 똑똑하게 보였다. 뭔가 세고 많고 코 큰 것은 죄다 하느님을 닮았고, 약하고 돈 없고 코 납작한 것은 죄다 하느님께 저주받은 종락들로 체념하는 생각은 없었느냐?).

 

나는 너희가 상상도 못하는 하느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약자의 하느님, 당신이 창조한 사람을 섬기는 하느님, 종을 살려내려고 아들을 죽음에 내다 보내는 하느님. 그리고 지금은 사람한테 당하고 죽임당하는 하느님을 보여 주고 있다.

 

사실 나도 이런 하느님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내 말이 참인지 보려면 내 목숨으로 시험해 볼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보다 맘몬한테 절하는 종교, 로마라는 세계 최강대국이 바로 내 십자가다. 너희가 동서양 어느 구석에 살든, 언덕마다 하느님의 사람이 매달려 죽는 십자가를 무수히 볼 터인데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골고타의 십자가야말로 내 설교가 진정 진실이었는지 아니면 한 종교가의 허튼 수작이었는지 보여주는 곳이다.

 

사람 말이 옳은지 그른 지는 관 뚜껑에 못질할 때 알아본다고 하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여기 버티고 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는 안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못 내려가겠다!

(1994.3.27: ㉯ 주의 수난)

 

 

4.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마르 l1,l-1l)

 

성지주일 두 편의 복음 낭독을 듣노라면,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가지를 흔들고 자기 옷을 벗어 길에 깔던 그 군중은 어디 가고, 무죄한 의인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발광하는 군중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의아스럽다.

 

예수의 입성을 자발적으로 마중하러 간 것은 예루살렘의 서민들이요, 갈릴래아에서 함께 올라온 이들은 순진한 민중이지만, 빌라도의 법정을 메운 자들은 바리사이파와 대사제가 일당을 주고 동원한 구사대요, 백골단이요, 사복들이요, 무슨 당 끄나풀이라고 보아야 할까? (대사제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빠를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거기 관제언론이 나서서 "죽여라!"를 외치는 이들의 쇳소리를 백성의 소리, 하늘의 소리, 여론으로 둔갑시킨다. 그 동안 위정자의 명령에 따라 물어뜯으라는 이는 물어뜯고 짖으라면 짖어 대고 위정자에게 꼬리가 빠지게 흔들어 대던 그 관제언론이 말이다. 부재자투표와 이중 삼중의 등재, 갖가지 유령인구로 채운 투표함, 호송 도중 바꿔친 상자들까지, 그리고 아예 텔레비전 쇼로 모든 것을 끝장내고서 그 성공에 흥겨워 하는 자들의 뒤에는 누가 있었을까?

 

딴 소리, 딴 진실이 새어 나오지 않게 하던 관제언론이 있었다. 노동부가 경인 지역 사용주들을 모아 놓고 구사대의 폭행 장면을 비디오로 보여 주면서, "까부는 놈들은 이렇게 잡아라!"고 교육시킬 때에도 모든 신문은 '근로협정을 준수 않는 사업주 엄단!'이라는 큼직한 선전 기사를 싣고 있었다. 지난번에 써먹은 선거인 명부로 모든 결과는 다 정해 놓고서 공천 운운하는 연극에 언론은 어쩌면 그리도 바람을 세차게 잡고 야권통합이니 하는 따위로 사람의 시선을 돌리는지!

 

의인 예수의 운명은 뻔했다. 민중의 운명 역시 뻔했다. 카인이 아벨의 뒤통수를 내려친 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때려죽인 돌들, 성전 사람들이 예수를 치려고 집어 들던 돌들, 스테파노를 쳐 죽인 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자 예루살렘에는 돌 위에 돌 하나 얹혀 있지 않은 채 다 무너지고 말았다.

해마다 사순절이 닥치고 성주간이 오지만, 이 땅은 성금요일 오후의 칙칙한 어둠이 30년이나 덮여 있다. 다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 하나가 카다콤바 속의 저 희미한 등불처럼 우리에게 가느다란 희망을 이어 주고 있을 따름이다.

(1988.3.27: ㉯ 주의 수난)

 

 

5. 민족의 성 금요일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루카 18,31-34)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네의 운명에 무엇인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음을 예감하였다. 스승 가까이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불안한 시선으로 주님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성지 주일의 열띤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전에 사도들이 들은 말씀은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그 한마디였다.

 

다음은? 아무도 모른다. 이 민족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정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눈앞에는 희망에 찬 미래가 열릴 것인가, 아니면 동족상잔의 역사가 반복될 것인가? 그에 따른 내 일신과 내 가족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역사라는 것은 전진하는가, 퇴보하는가? 지금은 초저녁인가, 한밤중인가, 새벽녘인가? 어느 닭이 있어 시대의 징표를 알려 줄 것인가? 우리 중에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이들은 이런 의문들을 가질 만하다. 이 민족은 어제도 오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루카 19,28) 오늘 첫째 복음의 첫 구절이다. "이 말씀을 마치셨다."는데 무슨 말씀을 마치셨다는 것인가? 달란트 혹은 미나의 비유로 끝내셨다. 하느님은 인간과 그 집단들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역사를 책임질 미나를 맡기셨다. 그 역할을 거부하는 인간과 민족공동체는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되어 있다. 인간다움을 지킬 의지와 용기가 있는 민족만이 살아남는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떠나셨다. 거기서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예언자가 기록한 모든 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사람의 아들들"에게도 이루어질 것이다. 배달민족이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짓밟히고 수탈당하고 이방인이 시키는 대로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이 과거처럼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앞장서서 걸어가신다." 이 민족의 선구자, 작은 예수들은 언제나 민족의 역사를 앞장서서 나갔다. 우리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겁먹은 얼굴로, 저만치 떨어져서 따라왔을 뿐이다.

 

부활은 온다. 우리 민족의 하느님은 살아 계시며, 이 민족은 생존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겨레에게나 민족사의 성 금요일이 있는 법이다.

(1989.3.l9: ㉰ 주의 수난)

 

 

6. Cantalamessa, “베드로처럼 할 것인가, 유다처럼 할 것인가?”

     (2006. B. Domenica delle Palme)

     Con Pietro o con Giuda?      Marco 14, 1 - 15, 47

 

주의 성지 주일은 우리가 일 년을 통틀어 복음서에 실린 수난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놀라운 일은 마르코에 의한 수난기를 읽으면 거기에도 베드로의 배반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 배반은 주님이 최후만찬석상에서 예고하신 것이고 그 전개과정이 복음서들에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르코가 적나라하게 그 과정을 묘사하는 점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마르코는 다름 아닌 베드로의 비서 역할을 했고 베드로가 기억과 서술로 들려주는 대로 복음서를 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 배반 이야기를 전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베드로였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베드로의 공식 자기 고백인 셈이다. 용서를 받은 기쁨 때문에 베드로에게는 이 일화가 사도단의 우두머리라는 자기 이름이나 명망에 끼치는 결과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처럼 타락한 사람이라고 혹시 누가 용서받지 못할까 절망하지 말기 바랐던 것이다.

 

베드로의 배반 일화는 유다의 배반 일화와 병행시켜 가면서 읽을 만하다. 유다의 배반도 최후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신 일이고 올리브 동산에서 완결되었다. 베드로의 배반에 예수께서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신 것으로 나와 있다(루카 22,61). 유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입을 맞춘 것으로 되어 있다. 허나 그 결말은 사뭇 달랐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슬피 통곡하였고 유다는 밖으로 나가 목을 매달았다.

 

이 두 일화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우리 바로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했노라고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을 증거할 기회가 그토록 흔한데도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어서 나서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던가! 우리 행동과 침묵으로 “당신이 말하는 예수라는 자를 나는 모릅니다.”라고 공언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유다 이야기도 우리와 동떨어진 얘기가 결코 아니다. 어느 사제(Don Primo Mazzolari)는 성금요일에 “우리 형제 유다”라는 제목의 유명한 강론을 하였다. 우리 각자가 자칫하면 어떻게 해서 바로 유다의 입장이 되는가를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냥에 예수님을 팔았다. 그보다 훨씬 싼 값에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노라고 말할 사람이 우리 가운데 과연 누굴까? 그것이 유다의 배반보다는 덜 비극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훨씬 무거운 범죄였을 것이다.

 

두 얘기가 아주 가까운 시점에서 발생한 점을 염두에 두고서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베드로 이야기와 유다 이야기는 너무도 달리 결말을 보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나는 무죄한 피를 흘렸소.”라고 외치고 은전을 던지고 나온 것으로 미루어 유다도 같은 가책을 느꼈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어디 있는가? 하나밖에 없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믿었고 유다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갈바리아에서도 똑같은 행태가 벌어진다. 강도 두 명이 똑같이 범죄를 저질렀고 악행을 하였다. 그런데 하나는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고 절망하여 죽는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파스카를 지낸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개인적으로 체험함을 의미한다. 어느 어린이가 유다의 배반 이야기를 듣고서 어린이다운 총명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유다는 목을 매단 나무를 잘 못 골랐어요. 무화과나무를 골랐거든요.” 놀란 교리교사가 “그럼 뭘 골랐어야 했을까?” 라고 묻자 어린이는 “예수님 목에 매달렸어야죠.”라고 대답하였다. 맞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목에 매달려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는 오늘날 성 베드로처럼 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오래 된 규칙을 알고 있다. “일 년에 한 번은 고백성사를 받고 적어도 부활절에 영성체 할 것.” 사실 이것은 의무가 아니고 선물이다. 절호의 기회다. 예수님의 목에 매달리는 절호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