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대축일

 

1. ㉮ 산 사람의 눈과 송장의 눈 (1996.4.7: ㉮해 부활)

2. ㉮ 막딸네 여자 마리아 (1993.4.11: ㉮해 부활1)

3. ㉰ 겨레의 부활을 향하여 (l989.3.26: ㉰해 부활)

4. ㉰ 빈 무덤 곁에서 (l980.4.6: ㉰해 부활)

5. ㉯ Cantalamessa, “다시 살아나셨다”(2006 ㉯해 부활)

 

 

1. 산 사람의 눈과 송장의 눈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마태 28,1-10)

 

주님이 부활하셨다! 엊그제 골고타 형장에서 처형당하고 매장 당했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 생사람을 죽이고 송장마저 무서워 무덤에 보초를 세운 사람들! 그러나 무덤을 막았던 돌은 사라지고 무덤은 텅 비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수를 썼다. 경비원을 매수하고,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 스승의 시신을 약탈했을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들(마 28,11-15)! 그들은 지금 다 어디 갔을까? 그들은 무덤 속에 있고 그들이 묻은 죄수는 2천 년을 살고 있다. 2천 년 전에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 계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도 죽는다. 그 사람 그리고 나는 언제 부활하는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는 1999년 8월 15일? 2000년 12월 31일 밤 12시? 반만 년 후? 이미 지나간 우주의 역사가 150억 년이라니까 앞으로 150억 년 후? 어휴, 길기도 해라!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위력적이고 자유로운 정신과 물질의 결합체, 간단히 말해 사람은 ‘육화(肉化)한 인격(人格)’이다. 그러니 육신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영혼만 빠져 나와 연옥이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곳에서 벌을 받거나 복을 받는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다. 육신도 없는 영혼이 지옥에 가서 지옥 불에 들볶인다는 설명도 억지 같다. 영원(永遠)만 있는 하느님 대전에서 영혼이 공심판 날짜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기이하다. 차라리 약간 성급한 신학자들 추측대로, 사람 각자의 죽음의 순간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설명이 더 무난하게 들린다.

 

그러면 죽은 이들은 어떤 육체와 결합하나? 부활한 이들이 왜 우리한테는 안 나타나나? 부질없는 물음이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도 '믿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대제관, 바리사이파, 무덤을 지키던 경비대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다만 마태오가 오보를 전한 것이 아니라면(마태 27,52-5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지시던 순간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시각까지 참았다가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저 성인들이 좀비(무덤에서 나와 돌아다닌다는 송장)가 아닌 이상, 부활은 우주 최후의 날까지 미루어질 필요가 없는 듯하다.

 

대제관도 바리사이파도 빌라도의 염탐군도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다. 그들 눈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맹랑한 소리를 시부렁거리고 다니는 실성한 갈릴래아 사람들이 보였을 뿐이다. 미친놈이라고 죄를 씌워 아무리 죽여도 씨가 마르지 않는 무리, ‘사랑’이니 ‘정의’니 ‘하느님 나라’니 하며 외치고 몸 바치다 나자렛 사람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약한 무리만이 보였을 따름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분신자살한 다음, 그의 귀신은 무수한 의인과 노동자에게 씌워져 이 나라 역사가 바뀌었다. 통일 영감 문익환 목사는 원래 정치와 거리가 먼 학자였다. 데모하느라 숙제 못하는 학생에게 가차 없이 낙제점을 주었고, 동료 교수들의 사회 참여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죽마고우 장준하 선생의 싸늘한 시체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은 독재와 불의와 분단을 향해 내닫는 야생마의 질주로 변한다. 장준하 선생이 죽고 문익환 목사로 새로 부활한 셈이다.

 

과연 주님의 부활이든, 나의 부활이든, 겨레의 부활이든, 부활을 보려면 별다른 눈이 필요하다. 죽어서 묻힌 사람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심안(心眼)'을 지닌 신앙인 아니면 볼 수 없다. 미래의 희망을 위해 민중을 위해 숨져 간 사람은 역사의 지평에 시선을 멈추고 죽어 간다. 그 대신 지금도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고 지하에 매장하는 자, 그것도 성에 안차 무덤에 보초를 세우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은 여전히 송장의 눈을 하고 있다.(1996. 4. 7: ㉮ 부활)

 

 

 

2. 막딸네 여자 마리아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10)

 

이 글을 읽는 남성 신자가 자신이 신앙을 가지기까지 어머니나 아내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고 있다면, 오늘 복음을 알아듣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한 여인이 입교하면 그 다음에는 딸, 며느리, 아들이 영세한다. 막차를 탄 영감 역시 제아무리 고집이 세다 하더라도 대세(代洗)는 받고 눈을 감는다. 신앙이 여성을 통해 전수되고 보존된다는 법칙은 동서고금 변함없는 사실인가 보다.

 

여자는 하느님께 직감이라는 선물을 받았으므로,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맛을 먼저 보았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일도 남자보다 먼저 알아챈다. 주님 무덤이 빈 것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막딸네(?) 여자 마리아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뵙고 "선생님!" 하며 매달린 이도 그 여자였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여라." 하는 사명 역시 열두 사도에 앞서 여자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이면 성당을 하얗게 가득 채우는 미사 수건을 보며 교회의 여성화를 우려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본당의 모든 활동과 활력을 도맡는 여교우의 헌신이 한국 여성의 고급 유휴 노동력의 발산이라며 깎아 내는 이들마저 있다. 게다가 여교우가 8할에 육박하는 한국 천주교임에도 불구하고 본당 사목회는, 신한국 내각의 양념장관들 마냥 양념으로 여교우 한두 명을 사목위원으로 끼워 주는 실정이다.

이러던 차에 서울 대교구 신림4동 본당에 여성 사목회장이 임명되어 우리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최순임(루치아) 자매를 사목회장으로 삼은 신림4동 교회와 사목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느님이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신 이상, 남성만 교회 내 직무를 독차지하는 교회는 하느님 얼굴이 반쪽밖에 안 그려진 그림 같다. 그러니 불안하고 흉하기까지 하다. 성령께서 그 많은 시비를 물리치시고 개신교에서,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를 세우시는 광경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필자는 이태리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여자 아이가 복사를 하는 모습이 흐뭇했다. 한 번은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본당 신부님께 이를 슬쩍 권했더니, 신부님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세월이 가면 여자들이 복사도 서고 미사도 드리겠지..."

(1993. 4.11: ㉮ 부활1)

 

 

 

3. 겨레의 부활을 향하여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했답니다."(루카 24,13-35)

 

하르낙이 비웃었던가, 그리스도교는 '빈 무덤' 위에 서 있다고? 옳은 말이다! 국가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혹시라도 되살아날까봐 커다란 바위로 무덤까지 봉해 놓은 이, 나자렛 사람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 텅 비어 있었다. 벌써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따라가는 사람은 같은 부활을 보리라고 성서는 몇 차례나 다짐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 죽은 사람이 하느님의 전능으로, 하느님의 판결에 의해 다시 살아남을 믿는다. 그리고 이 땅 한반도에서 우리는 부활을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신앙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도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온 가슴으로 외칠 수 있는 생생한 부활을 여기서 바라보고 있다.

 

어느 노인의 장례식에서 읊어진 고별시(告別詩)에서 그 믿음을 우리는 듣는다. "작년 11월 13일, 어린 노동자 전태일의 l7주기였습니다. 연세대 노천극장을 꽉 메운 오만 명 노동자들의 함성에 묻히면서 우리는 태일이, 스물 두 살 난 어린 태일이 우리의 맥박 속에 폭발하는 힘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l월 l4일, 어린 학생 박종철 2주기였습니다. 명동을 휩쓴 대학생, 노동자, 시민들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우리는 종철이, 23살 난 종철이 우리의 숨결 속에서 되살아나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통일은 좋다고 외치던 외로운 준하의 목소리가 이젠 아무도 거역할 수없는 온 겨레의 주장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를 위하여' 피를 흘린 이들이, 나자렛사람 예수의 삶과 죽음을 가장 많이 닮았던 꽃 같은 죽음들이 부활하고 있음을 목격하는 중이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이 시점에서도 민중 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는 눈은 불행하다. 하느님의 영이 공동 무덤에 묻혀 있는 뼈들에게 생명을 다시 불어넣고 계시는지, 그들은 "무덤 돌을 굴려 내면서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무덤밖에 역사의 주님이 서 계시고 큰 소리로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부르시기 때문이리라. (l989.3.26: ㉰ 부활)

 

 

4. 빈 무덤 곁에서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루카 24,1-I2)

 

퍽이나 한가로운 해골산 발치. 아니지, 동틀 녘 아낙네 셋이 성묘를 하러 왔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조금 뒤 남정네 둘이 숨이 턱에 차게 달려와서는 들여다보고 갔다. 그리고 인적이 끊겼다. 빌라도의 군졸도, 가야파의 끄나풀도, 묘주인 아리마태아 요셉도 다시는 자취를 보이지 않는다. 무덤이 비었으니 그럴 수밖에...

 

성전 뜰에는 그제처럼 장이 서고 제단에는 번제연기가 오르고 있지만, 위에서 보시기에는 천지가 이미 달라져 있다.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믿는 이들의 눈에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안티오키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그리스로, 로마를 거쳐 땅 끝까지 눈부신 광명이 번져 나가고 있다.

 

1980년 4월 6일! 70년대의 악몽에서 깨어난 겨레의 시선도 80년대를 가로질러 역사의 지평선 저 멀리로 뻗어 가고 있다. 오늘날 겨레의 말은 단 한마디, 희망이다. 겨레의 혼은 무덤에서 이미 빠져나왔다. 다시는 결박되지도, 죽지도, 매장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해방이 온 누리에 미쳤기에 한반도 남녘도 해방을 맞고 새 역사를 꾸미느라 분주하다.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들! '많은 이를 위하여' 의로운 죽음과 옥고와 고문, 실직과 퇴학과 빈곤에 부치셨다. 기어이 당신의 손가락으로 파라오를 치시어 당신이 역사의 주님이심을 과시하셨다. 당신이 주신 강토와 사람 된 존엄성과 역사의 순리를 지키는 짐을 우리 어깨에 지우셨다. 이집트의 고기 냄비가 그리워, 무덤 속의 안정이 그리워 노예 살이로, 관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타이르셨다. 다시는 군인이 총잡이가 되지 않게, 백성을 한낱 숙주(宿主)로 여기는 정치인과 경제인이 없게, 사법인(司法人)이 폭군의 휘광이 노릇이나 하고 언론인은 바람을 잡고 종교인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속과 굴종을 가르치는 아편장수가 되지못하게 경고하셨다.

 

죽음에서 벗어난 분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됨을 금지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갖고 잴 수 있다. 특히 없고 약하고 순한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는 길 가는 나그네이기에 이 땅에 제아무리 평화스럽고 정의로운 낙원이 서도 거기에 눌러앉지 않을 만큼 자유스럽다.

(l980.4.6: ㉰ 부활)

 

 

5. Raniero Cantalamessa, "다시 살아나셨다!”

     (2006. B. Domenica di Pasqua B)

     È risorto!      Giovanni 20,1-9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 5-6)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이런 얘기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자들은 언덕 저 아래로 뛰어가 버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 쥔 채로. 그리고 다락방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갔다. 여자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거기 있던 사람들은 알아챘다. 여자들의 얼굴이며 눈에 서린 것으로 미루어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아챘다. 여자들이 한꺼번에 소리 질렀다. “무덤이 비었어요! 선생님이 살아계셔요!” 이렇게 부활 소식은 역사를 관통하여 그 달음박질을 시작했었다. 세상 마칠 때까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아무도 멈출 수 없는 조용하고도 거창한 물굽이를 이루어.

 

그런데 과연 예수님은 정말로 되살아나셨을까? 그것이 무슨 조작이나 암시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무슨 보장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25년 정도 밖에 안 된 시점에 글을 쓰면서 성 바오로는 그분의 부활 후에 살았던 모든 인물들의 명단을 열거한다. 대부분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먼저 베드로, 이어서 열 두 사도, 그리고 한꺼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맺는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8) 여기서 말을 하는 사람은 목격증인이다. 고대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치고 이만큼 막강한 증언이 남은 사건이 있던가?

 

하지만 그 사건의 진실성을 믿는 데는 전반적인 관찰도 보탬이 된다. 예수가 죽던 시점에 제자들은 흩어졌다. 만사가 끝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하던 말이다. 분명히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돌연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선포하고 다닌다. 그 증언을 하는데 재판도 박해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순교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분이 정말로 되살아나셨다는 확실한 사건 아니면 무엇이 이토록 철저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들이 속았을 리가 없다. 그분의 부활 후에 그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음식을 들었다. 그들은 현실감 있는 인간들이었고 쉽사리 날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본인들도 처음에는 의심을 하고 섣불리 믿지 않으려고 상당한 저항을 보였다. 자기들도 믿지 않으려고 하던 사건인 만큼 남들을 속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배신당하고 인생을 망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들이었다. 부활 사건 없이 그리스도교의 등장은 수수께끼가 되어 버리고 부활 자체보다도 더 설명하기 어려운 사태가 된다.

 

이것은 어디가지나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논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가장 힘 있는 증거는 그분이 살아계신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분 얘기를 하면서 그분을 살아계신 것처럼 취급하니까 그분이 살아계신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보전해 주시는 분이 그분이시고, 당신 현존에 대한 감각을 우리에게 넣어주시며, 우리가 희망을 품게 만드는 분이 그분이시다.

 

부활의 실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늘 ‘자기 암시’의 현상을 내세웠다. 사도들은 자기네가 부활한 예수님을 본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참말이라면 그들이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거창한 기적을 구성하게 된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장소와 환경에서 동일한 환시 내지 착각에 빠졌다는 말이 된다. 환각이나 환상은 그것을 기대하고 간절히 열망하던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런데 사도들은 성금요일 이후로 아무 기대도 더 이상 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대 이론에 따라서 물리 세계에 일어나는 것과 유사한 사건이 정신 세계에 일어난 것이다. 원초의 빅뱅 이론이 그것이다. 에너지의 어떤 폭발이 우주에 결정적인 운동을 심어주었는데 그것은 확산의 운동이며 수십억 년을 넘어 지금도 우주에 그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의 신앙을 제거해 보시라, 모든 것이 단번에 정지하고 소멸된다, 흡사 어느 집에 갑자기 정전 사태가 온 것처럼.

 

19세기 러시아에서 살다 간 수도자 사로프의 세라피노 성인에 관해 이런 일화가 있다. 사람들이 인생고를 털어놓으려고 그를 수도원으로 찾아오면 그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거리까지 그들을 마중 나오면서 “기쁘고도 기뻐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다!” 라고 소리소리 질렀다고 한다. 성인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마디가 얼마나 힘 있는 것이었는지 그 말소리만 들어도 괴로움이 마음에서 싹 가시고 희망이 솟아났다고 한다. 우리도 저 인사를 우리 인사로 삼아보자. 부활절 서로 만났으니 “기쁘고도 기뻐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다!”라고 소리 지르자. 입으로 못하겠거든 적어도 눈으로 이 인사를 나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