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1. ㉮ 샬롬 하베림! (l980.4.13: ㉮해 부활 2)

2. ㉯ “내 손을 만져 보아라” (l987.4.26: ㉯해 부활 2)

3. ㉯ R.Cantalamessa,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겠소” (2006 ㉯해 부활 2)

 

 

 

1. “샬롬 하베림!”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요한 20,19-3l)

 

"샬롬 하베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철석같이 믿던 스승이 돌아가시자 유가족들은 유대인이 무서워서 모두 한 집으로 모인 다음 문까지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리고 되살아나신 분이 그들에게 건네신 첫마디가 '샬롬!'이었다. 평화(平和), 안심(安心), 안보(安保) 얼마나 절실한 말인가!

 

지금 철든 나이로 제단 앞에 나온 우리 중에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구겠는가? 연탄 값 오르지 않을까? 큰놈 학교 성적 떨어지지 않을까? 월급 안 오르나? 이 달 곗돈 어떻게 장만한담? 남편 한눈팔지 않을까? 잔걱정이 가슴을 꽉 메워 분심이 될 것이다.

 

큰 근심도 많다. 나라꼴이 어떻게 되려고 들 저러는가? 누가 잡을까? 석유는 제대로 사들여 오는가? 천정 모르는 물가가 잡힐까? 툭하면 간첩 출현이니 38선이 터지지나 않을까? (바람잡이들이 하도 오랫동안 안보로 재미를 보아 은 탓에 온 겨레가 전쟁 공포로 속병이 들어 있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이 저러다가 미국, 소련이 맞붙으면 우린 앉아서 떼죽음 아닐까?

 

속앓이에다 살림 걱정, 국가와 세계사가 뒤숭숭한 판에 '샬롬'이라는 주님의 인사말이 귀에 들어왔을 성싶지 않다. 그러나 방금 무덤에서 나오시어 손의 못 자국이며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며 하시는 말씀이다. 빈말 같지는 않다. 그이 속에 열 번도 더 들어갔다 나왔으면서도 남편 말을 믿는다면,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는 정치인들도 지도자랍시고 그 공식발언을 믿는다면, 우리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분의 말씀은 믿을 도리밖에 없다. 그분을 두고 딴 데로 찾아갈 임자가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분 말씀처럼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의 죄든지 (교회가)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세례와 판공성사로 죄를 벗었으니 영혼이 평안할 수밖에 없다. 외아들을 보내셨을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배워 우리도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다 보니 신간이 편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고, 거짓과 사기와 음모를 삼가니 이웃 간에 평안하다.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는 말씀을 고즈넉이 받아들이니 "갓난아기같이 순수하고 신령한 젖"(입당송)을 달라고 보채면서 내 운명과 집안 살림, 나라의 장래와 세계 역사를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겠다.

(l980.4.13: ㉰ 부활 2)

 

 

2.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l9-3l)

 

주님을 뵜다구요? 난 못 믿겠소. 손이 보들보들하고 하얗고 귀골이던가요? 펜 끝으로 결재를 하고 지폐를 헤아리거나, 혹은 기도와 예식을 올리던 손인가요? 아니면 방아쇠를 당기며 살아온 손인가요?

 

그분의 손은 수십 년 목수일로 마디마디 못 박히고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고생에 찌든 손이요, 땅을 판 무지 랭이 손, 직공의 손, 청소부의 손, 하루 종일 물에 담그고 있어 오리발이 다된 아낙네의 손이오. 그런 손이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서도 오천 명을 넘게 먹이셨소.

 

소경이든 귀머거리든 차마 보아 넘기지를 못하시고 그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침을 바르고 진흙을 개어 붙여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면서' 낫게 하시던 손이오. 수종 병자의 팅팅 부은 손을 마주 잡으시고 고쳐서 돌려보내시던 손이오. 수십 년 허리가 굽어 하늘을 못 보던 여자에게 손을 얹어 주셔서 허리를 펴 주셨소. 그분이 손을 내미시면 학질 걸린 베드로의 장모도 일어났고,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도 말짱해졌고, 죽은 야이로의 딸도 살아났었소. 문둥이를 보시고는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어루만지셨기에 부정을 탔다고 동네 밖으로 내쫓기기도 하셨소. 음식을 잡수실 때 손을 안 씻는다고 욕들도 했소.

 

간통하던 여자를 현장에서 붙잡았다고 얼씨구 춤추며 당신 앞에 끌고 온 율법학자들에게 분노를 누르시느라고 땅에 무엇인가 끼적거리며 시간을 끄시던 그 손을 나는 보았소.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던" 손이지만 불의를 보시면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내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시던" 손이었소. 그리고 당신을 체포하러 보낸 당국자들의 하수인 하나가 칼에 맞아 귀가 떨어져 나가자 "손을 대서" 고쳐 주셨소.

 

그 손목에 굵은 대못이 박혀 다섯 손가락이 거미발처럼 오그라들어 떨던 광경을 내 눈으로 보았소.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 고문과 형극의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오. 목수의 손, 남김없이 주던 손, 고생한 손, 억울하게 못 박힌 손은 영원히 그 모양대로 생채기가 훈장처럼 남아야 하오. 그렇지 않고는 정의의 승리도, 하느님 사랑도, 주님의 부활도, 내세의 생명도 "결코 믿지 못하겠소."

(l987.4.26: ㉮ 부활 2)

 

 

 

3. Raniero Cantalamessa,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겠소”

    (2006. B. II Domenica di Pasqua)

    “Se non metto la mia mano nel suo costato, non crederò”      Giovanni20,19-31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의 고집이나 초기의 불신앙("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에서 복음서는 소위 기술과학시대의 인간과 마주친다. 과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 말이다. 토마스라면 사도들 가운데 끼어 있던 현대인이라 불러도 되겠다.

 

대(大)그레고리오 성인은 토마스는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당장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유익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야말로 예수님께 당신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손으로 만질 만한” 증거를 내놓으시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의 의심으로 인해서 부활 신앙이 혜택을 입었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믿지 않는 수많은 토마스들을 보노라면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와 비판은, 상호존중과 솔직함에서 이뤄진다면, 커다란 이익을 가져온다. 적어도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신앙이 무슨 특권이나 이익 행위가 아님을 깨닫게 강요한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강제로 부여하거나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 삶으로 보여주고 권유할 수 있을 따름임을 알려준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신앙은 원래부터 하나의 선물이지 공로가 아니다. 선물인 이상 고마움과 겸손함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수밖에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결하다 보면 우리 신앙을 정화하여 너무 황당한 표상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준다. 불신자들이 거부하는 것은 많은 경우 참된 하느님, 성서의 살아계시는 하느님이 아니고 아마도 신앙인들이 만들어낸 하느님의 왜곡된 얼굴이다. 그런 하느님상을 거부함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더러 살아계시고 참된 하느님의 자취를 다시 살려내라고 강요하는 셈이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설명과 묘사를 전부 뛰어넘는 얼굴을 하고 계시다. 그대로 두면 자칫 우리는 하느님 얼굴을 화석처럼 만들거나 속되게 만들 염려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심으로 표명하고 싶은 고백도 있다. 성토마스는 오늘날 얘기의 전반부(믿지 않겠다고 공언하던 단계)만 자기를 본뜨는 것이 아니라 후반부에서도 자기를 본뜨는 동료들을 많이 두고 있다. 위대한 신앙 행위에 이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면에서도 토마스를 본받을 만하다. 그는 문을 닫아걸지 않는다. 자기 입장에 집착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실제로 여드레 뒤에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여 있었다. 정말 믿으려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 와 있지 않았을 것이다. 눈으로 보고 만지고 싶었다. 말하자면 여전히 탐구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다음 그는 예수님께 외친다. 자기가 졌다고 자백하는 말이 아니라 의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사람답게 외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 어느 사도도 토마스만큼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이토록 명료하고 뚜렷하게 고백하기에 이른 인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