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


주님은 당신을 비우시고

       나는 나를 채울 줄만 알고



인수봉에 기울던 달을 잃고서

  산은 나더러/나를/부끄러워하라 하네
  산은/나더러/남을 용서하라 하네
  산은 나더러/사는 날까지/사는 것들을/사랑하라 하네...

    (채희문 「북한산 15」)

25년간 우이동 골짜기에 살아왔다. 우이천 건너 쌍문동집은 나의 첫 집이자 마지막 집으로 여겨 가꾸고 고치며 살아왔다. 서재 서쪽 창으로는 북한산 세 봉우리가 한폭의 동양화로 집안에 들어와, “북한산을 송두리째 창안으로 들여 놓았으니 나같은 부자가 있겠는가?”라고 뽐내며 4반세기를 누려왔다. 봄가을로는 새벽달이 인수봉에 걸려 산비탈을 타고 데굴데굴 굴러서 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침기도를 올리는 행복은 참으로 컸다.

국민주택들로 이루어진 단아하고 조용한 마을에 작년부터 집장사들이 들이닥쳤다. 터가 조금이라도 있는 집은 모조리 헐리고 다세대 주택들이 5층으로 들어섰다. 이제 서창으로 북한산은커녕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옆집 사람들도 집을 팔고 떠나가 버리더니 그 자리에도 5층 다세대 주택이 떠억 올라서고 집장사는 우리가 25년간 드나들던 막다른 골목길을 내놓아라, 당신네 집터가 경계에 걸렸으니 집을 헐고 땅을 내놓으라는 소송을 걸어왔다.

그 뒤 몇 달간의 마음 고생이라니! 민원이랴, 변호사 선임이랴, 구청을 닥달하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미움과 원망으로 애태웠던가! 텃세를 앗기지 않으려는 동물적 본능과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조바심이 그토록 심신과 영혼을 피폐케 하는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다! 전에 마음 같아서는 나는 내 재산에 눈곱만큼도 애착이 없는 청직이일 따름이었고, 제아무리 빼앗겨도 의인 욥처럼 태연자적할 것만 같았다.

팔을 벌려 못을 쳐버리면 드디어 나라는 인간이 상실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뼈저리게 아파하기 시작했다. 변변찮은 재물도, 자랑스러운 직업이나 사회활동도, 자존심과 명예도, 마지막에는 목숨마저도 손가락 새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우리에게서 빠져나가거늘 영구히 내 손아귀에 쥐고 있을 듯 당당했다니! 수입의 십분의 일을 나누기에도 얼마나 핑계가 많던가? “인생에 닻 내리고 돛 감을 무렵이면”(단테) 정년이 닥쳐오면서 세월의 수레바퀴는 내리막의 가속도가 붙고, 혼신을 다하던 사회단체에서도 지도위원으로 고문으로 자리가 바뀌며, 언변과 필력은 시력과 더불어 총명함과 재치를 잃어가는데, 교수라는 처지는 거울을 들여다볼 줄을 모르고 강단 아래 젊은이들 얼굴만 바라보느라 제 나이의 철들기가 더 힘드나보다.

눈에 넣어도 아플것같지 않은 자녀도 품에서 무릎으로, 발치에서 우리의 눈길밖으로 멀어져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부모 곁을 그렇게 떠났듯이. “엄마 아빠 오래오래 함께 사시다가 같은 날 주님 품에 드시게 해 주세요.” 두 아들이 저녁기도마다 드리는 염원이지만, 하느님이 사람 나고 죽는 일만은 본인들에게 묻지 않으심을 누가 모르는가?

명색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서 필립비서에서 노래하는 그리스도와 얼마나 멀리 살고 있는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녔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인 양 중히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필립비 2.6-7)

“나뭇잎 족속같은 인생”(베르길리우스)이면서도 내가 무엇이나 되는 양 목에 힘을 줄 적에 하느님의 영원한 성자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생명도 건강도 가족도 직업도 오로지 거저 받은 선물이면서도 내 필생의 노획물인양 웅켜쥐고 있을 적에, 주님은 비우다 비우다 못해 단벌 옷마저 벗기우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지 않는가? 피붙이, 살붙이, 패거리들을 놓칠세라 억척같이 두 팔로 끌어 안고 있다 고개를 들양이면 거기 두 팔을 못질당해 굽으래도 안으로 굽지 못하는 분이 구세주로 서 계시다.


두 아버지의 마음

지리산 서재에는 조광호 신부님의 초기 판화 가운데 하나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사」가 걸려 있다. 노인의 눈에 서린 절망과 슬픔과 아쉬움이라니!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한 손으로는 아들 이사악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비명을 못 지르게. 백세가 넘어 얻은 늦동이치고도 너무도 어린 것을... “아브라함아! 사랑하는 네 외아들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아비의 손으로 아들을 죽여 당신께 제물로 바치라시면서 “사랑하는 네 외아들”이라니! 누굴 놀리시는가? 아니면 당신도 외아들을 골고타로 몰고가실 처지가 서러워 저 늙은이와 동병상린하시자는 건가?

이렇게 아드님의 ‘비움’은 아버지께로부터 대물림한 것이었나보다. 그럼 주님의 비움은 언제쯤이나 내게도 옮아오려나? 아니면 하나부터 열까지 울고 발버둥치며 주님께 빼앗기기만 하는 철부지로 살다 죽으련가? 주님은 젖병을 앗아가시면 숟가락을 쥐어주시고, 우이동 창문을 닫으시면 지리산 자락을 열어주시며, 이 생을 거둬가실 때에는 영생을 주시거늘...

마냥 북한산을 노래하며 행복해하는 “우이동 시인들”(이생진, 임보, 채희문, 홍해리) 가운데 한 분, 아래아랫집에 살던 채희문 시인도 집을 팔고 훌훌 떠나버렸다. 시인이 남긴 애잔하고 여운이 긴 가락만 휑한 골목에 남기고...

  북한산이 날마다 나를 부르네...   

  가을 하늘 떠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가슴으로 가라 하네.
                                 (「북한산 16」)

[ 경향잡지 2002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