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2002.2월호: 야곱의 사다리]



걸어보지 못한 길

 


한 평생 누려온 주님의 은혜

나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교회의 은덕을 입었다. 두고두고 주님께 감사드리는 평생의 가장 큰 은혜가 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살레시오회와 혜화동 낙산에서 받은 가톨릭 교육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혼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고아를 거두어 그 세 아우와 더불어 중고등학교 교육을 시켜 준 분들은 살레시오회 선교사들이었다. 그것도 기숙사에 데리고 있으면서 재우고 먹이고 입히면서 말이다. 한국전쟁 후 가난하고 어렵던 시기에 교회의 덕을 본 사람들이 많겠지만 네 형제가 고스란히 교회의 손에 키워진 사례는 또 없으리라.

그 뒤로도 나의 삶은 살레시오회 수도자로, 마산교구 신학생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품안에서, 교회의 돈으로 공부하고 먹고 입고 살았다. 심지어 평신도의 길로 돌아선 다음에도 내 삶은 교회라는 어머니의 치마폭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다. 교회 기관들에서 근무하고 교회의 책들을 번역하고 교회의 돈으로 유학하고(김수환 추기경께서 독일교회 미씨오 장학금을 받게 해 주셨다.) 지금도 교회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1979년 유신정권 말기에 아우(성찬성)가 번역한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민중교육론)」를 펴냈다가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낸 전력까지 겹쳐) 남산지하실에 끌려가 한 달간을 시달릴 적에 형제를 무사히 나오게 해 준 것도 두 사람의 사상이 불순하지 않음을 보장해 준 여섯 분 주교님들의 진정서였다. 10월 26일 새벽에 형제는 풀려났고 그날 저녁 유신정권은 무너졌다.

아마도 교회의 점잖은 인사들의 귀에 껄끄러운 소리를 곧잘 지껄이는 나의 글투도 내가 교회라는 어머니 손에 막되먹게 키워져서 생긴지도 모르겠고, 그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여 그 얼굴에 검댕이가 묻거나 주름이 지는 모양을 도시 못 견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늦게사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기에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덤불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
  그 길의 보이는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른 쪽 길을 택했다.
  먼저 길과 같이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은 듯싶었지...

프로스트의 “걸어보지 못한 길”이라는 이 싯귀를 나에게 적어 보낸 소녀가 있었다. 1973년이었다. 가을이면 부제품을 받아야 하는데 내게만은 사제직이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다 낙산 숲길을 영영 떠나버린 ‘학사님’에게 아쉬운 마음에서 이 싯귀를 적어 보낸 구로동 본당의 소녀는 이제 50대를 바라보면서 뉴질랜드에서 이민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소녀의 맏아들에게 대부를 서주었고 소녀의 언니 수녀와는 오누이처럼 지낸다.

다른 이들도 다정하지만 유독 남녀 살레시오 회원들, 남녀 바오로 수도자들, 성체회 수녀님들이 나를 언제나 한 식구처럼 대해주어 마냥 좋다. 내 어린 시절 본당 할머니들이 “저 사람, 4품 받고 나왔어!”라는 말을 무슨 주홍글씨처럼 누구 등에 찍어붙이던 일이 기억난다.

그리고 나를 아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나보다 더 반기고 늘상 나보다 더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의 아내(빵기 엄마)다. 성모님은 교회의 품에서 나를 고이 길러주시고는 설흔이 넘어서도 마음이 허허해하는 내게 갈 길을 돌리시고는 이 짝을 맺어주셨다는 것이 지금도 내 믿음이다. 눈 녹을 적 수선화처럼 노란 옷을 입고 나타나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던 처녀는 자기의 결혼을 한 주일 앞두고 집을 뛰쳐나와 내게로 왔다. 서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 이룬 사랑이었기 때문인지 우리는 내내 행복하였고 지금도 그러하여 둘을 맺어주신 성모님께 저녁마다 감사의 로사리오를 바친다.

오, 진리여,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sero te amavi).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고백록 10.27).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영원한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발견하고 죽을 때까지 되내던 철학적 유언이다. 그런데 불손하게도 우리 부부는 날이면 날마다 서로에게 성인의 말을 흉내낸다. “늦게사 당신을 사랑했어요! 우리가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맺어지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암담했을까요!” 우리의 혼인이 아직 서른해밖에 못되어 이토록 철이 없는 것일까? (하기사 내 동료 교수의 부인은 자기 친구들에게 내 아내 얘기를 들려주고 “다시 태어나도 제 남편과 사랑하겠다는 미친 여자가 있더라구.”하며 웃었노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아기의 걸음마를 아빠가 따라가는지, 아빠의 손가락을 잡고 아기가 길을 가는지 모르겠지만 주님은 두 갈래 길에 다 계셨다, 적어도 나의 인생에서는. 물론 내가 걸어보지 못한 길이기에 저녁기도에서 내가 아는 사제들 모두를 위한 기도가 빠지는 일이 없다. 은사들, 동창들, 교회의 대사회활동(주로 바깥쪽이지만)을 함께 하는 사제들, 교회신문에 부고가 나는 사제들을 위하여...

작은 아들 빵고가 군복무를 마치고 정월에 살레시오수도회 수련을 시작하였다. 주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서 한 세대쯤 사람을 기다려주시는 게 대수롭지 않으신가 보다. 그래서도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손이 밤마다 더욱 간절히 모두어진다.

[ 경향잡지 2002년 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