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열번째 꼭지(2002년 10월호)로 보냈으나 실리지 못했음 *

 

 

나를 슬프게 한 것들

 

 

  6.25의 뼈아픈 기억

 

‘한국전쟁’에 대한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청노루가 슬피 울던 능주(綾州)의 달밝은 밤들로 떠오른다. 아버지는 몸을 피해다니시는 처지였고 또 광주수피아학교의 미국인 선교사들을 숨겨주시느라 당신 가족을 깊은 산중에 피난시켜 놓으셨던 것이다. 열살짜리 금심이 누나는 다른 피난처에서 병들어 숨졌다. 국방군이 광주를 철수하면서 시가지를 폭격한 결과, 호남창고 곁에 있던 우리집, 일본식 이층양옥은 벽 하나만 덩그렇게 남기고 흔적없이 날아갔던 광경도 눈에 선하다. 조종사의 오폭이었던지 호남창고는 고스란히 남았으니까 인공치하에서도 시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찾아간 고향마을 장성 소룡리가 빨치산의 소행으로 불타버린 폐허, 일본도에 맞아 반쯤 잘려나간 목을 그대로 얹고 살아가던 이웃아저씨, 한 다리가 없는 당숙부의 가련한 모습이 내 어린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필자는 1981년 로마로 유학갈 적에 그 당숙부와 연좌(連坐)되어 있음을 처음 알았고 그분이 부역자라 하여 산 채로 한 다리가 잘렸음도 알았다.)

 

그 뒤 초등학교 시절에는 교리시간에 교리 가르치기보다는 서북청년회의 무용담을 자랑삼던 선생님이 여자 빨치산을 잡으면 청년단이 어떻게 고문하고 죽이는지 상세히(주일학교 교리시간에 말이다!) 들려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어린 마음은 또한번 상처입었다. 전쟁이 마음을 온통 할퀴고 간 후여서 이데올로기가 씨뿌린 증오심은 남한에서도 상식과 신앙을 까마득하게 넘어서 있었다.

 

해방후 김구, 여운형 같은 애국자들이 한반도가 쪼개지지 않게 하려고 남북을 오가다가 희생당할 적에 한국천주교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6.25라는 배달겨레 최악의 비극을 두고도 천주교는 ‘화해와 용서’라는 메시지를 모른 채 반공일변도로 치달았다. 오죽했으면 천주교가 자타가 공인하는 ‘반공의 보루’가 되었겠는가? 필자의 우려는 국군의 월남파병 때에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전쟁이라는 악마적 횡포를 막으려는 노력은 교회 어느 구석에도 없었고 ‘정의의 십자군’이라는 깃발 아래 군종신부들이 파견되는데도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이 모든 광경은 종교가 평화의 비들기라는 나의 소박한 희망을 무너뜨렸다.

 

“반공의 보루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 유령”

 

그래서 필자는 적어도 화해와 일치를 배우는 신앙인들의 마음 속에서 반공을 핑계대는 증오심을 누그러뜨리고 싶었다. 사회정의에 투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스승이 마르크스 아닌 그리스도임을 일깨우고자 교황 비오 11세(1937)의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Divini Redemptoris)』을 번역하여 정의평화위원회 이름으로 간행하기도 하였고(1980),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1977), 송천성의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1982), 피어리스의 『아시아의 해방신학』(1988)을 번역하여 민주화에 투신하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께로부터, 교회의 사회교리에서 해법을 찾도록 돕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천주교와 그 신자들에게 만연한 반공사상이 자칫하면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심, 곧 마몬의 가면에 불과할 수 있음을 꼬집는 글들을 교회 간행물들에 실어왔다. 생각이 다른 교우들의 반발도 심했다. 박무혁(본명 이태호)이라는 분은 『한국논단』(1996.7)에 “성염이라는 사람은 국가보안법을 악마로, 반공을 우상으로 이해하고 있으므로... 반공의 보루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 유령”이라고 지적하기까지 했다.

 

저런 입장들이 만연했었기에 4.19혁명 이후의 장면정권을 마치 ‘가톨릭 정권’이 들어선양 기세등등하던 천주교가 군사반란으로 그 정권을 전복시킨 군부와 그토록 쉽사리 손잡았던가보다. 70년대 유신시절에 지학순주교님의 옥고와 정의구현사제단의 고통어린 투쟁을 보면서도 대다수 성직자들이 그분들에게 냉소와 모멸만을 보냈고(10.26을 불과 한 주일 앞두고 사제단 징계를 촉구한 원로사제들도 있어 세칭 ‘구국사제단’ 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상당수 평신도들이 천주교도임을 내세우며 군사독재에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80년대부터 여의도에 백만명을 운집시키는 가톨릭의 장중한 이벤트들 역시 필자의 눈에는 서글펐다.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이 일어난지 일년만에 거행된 서울교구설정 150주년행사(1981)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행사(1984)가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치루어졌고, 세계성체대회(1989)마저도 군사정권에 순치된 언론의 조명하에 이루어졌으므로 뜻있는 사람들은 교회의 이 영광이 도대체 누구에게서 받은 것이냐고 의구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대학생회 등이 전국단체가 해산당할 적마다 예언자들의 음성이 교회 안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교회의 모든 문서에 권리가 보장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고 해서 전교조 선생님들을 학교에서 쫓아내는데 앞장선 것도 가톨릭 학교들이었고, 가톨릭 병원에도, 신문방송에도 파업이 생기면 공권력이 투입되고 주모자들은 쫓겨나고 구속되는 모습은 슬픈 광경이었다.

 

사제단에 가입하거나 목요기도회에 참석한 사제들이 수십년간 ‘변방신부’의 신세로 떠도는 모습을 참 많이 보았지만, 그래도 교황대사까지 나서서 사제단을 징계하라는 독촉에도 불구하고 사제단의 활동을 용인한 주교단의 지혜에는 감사드리고 싶다.

 

광주의 연령들을 위하여 주교단의 미사를!

 

그러나 내 평생에 신앙인으로서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든 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대하는 한국천주교의 태도였다. 윤공희 대주교님을 비롯한 광주교구 성직자들이 혼신을 다하였고, 광주의 비극을 주보에 실어내던 서울교구 신부님들의 용기를 내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광주와 전주 두 교구 외에는 사실상 모두가 냉담한 침묵으로 반란군의 광주시민 학살을 방관하였음도 사실이다.

 

맨손의 시민 학생들이 중무장한 특전단 반란군의 총검에 희생되어 갈 적에 [군부와 광주시민 양편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시오!”라던 주교회의 상임위의 성명서가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귀에 어떻게 들렸을까? ‘광주사태’ 중에 어느 교구의 고위 성직자 한 분이 “전라도는 원래 좌익이 많아요. 이번에도 좌익들의 짓이지요”하더라면서 나의 코멘트를 요구하던 호주특파원의 인터뷰는 나를 슬프게 하였다. 사건이 일어난지 16년이 지나서도 김남수주교님이 『월간 조선』(1996.2)에 실린 인터뷰에서, 광주시민의 봉기를 “민란”이라고 표현하셨던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 주교단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필자가 지금이라도 감히 희망을 건다면, 박정희 대통령을 위하여 주교단 전원이 모여 연미사를 봉헌한 자비심으로, 5.18 희생자들과 민주화 희생자들을 위하여 우리 주교님들이 합동미사를 드려주시는 날이 오리라는 것이다. 부마사태를 일으키고서 여자들을 불러다 분탕질하던 술자리에서 총살된 불교신자를 위해서 관대히 미사를 봉헌하신 주교님들이시므로, 스무해가 지난 지금쯤은 정의와 민주라는 위대한 명분을 위하여 숨진 이들을 위해서 목자들의 자상한 애정을 보여주실 만한 시기가 익었다고 본다.

 

우리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선포한다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중산층들만 성당에 모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는 교회 풍경 역시 나를 슬프게 하는 까닭이다.